처음으로 사랑한 남자는 굉장히 쓰레기 같은 남자였다. 가출한 미성년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막나가는 인간중에서 좋은 남자란 건 원래 쉽게 찾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는 자주 술을 마셨고, 자주 담배를 피웠고, 자주 화를 냈다. 그리고 그가 쓰레기같은 만큼 나도 앙칼진 여자였다. 나는 맞는 만큼 그를 할퀴었고, 그가 술을 마시는 만큼 그의 옆에서 소리질렀다. 담배를 피는 옆에서 술을 마셔댔다. 매일같이 에너지가 흘러넘쳐서 폭발하는 듯한 매일이었다. 집안을 뛰어다니며 옷가지를 뒤적이고, 부엌에서 맛없는 요리를 만들고, 또 시답지 않은 일로 싸우고,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다. 가끔 그는 샤워실에서 흥얼거리고 나는 욕조에 앉아 목청을 돋구어 흘러간 로큰롤을 불러댔다. 젖은 몸을 하나의 큰 타월로 감싸서 그대로 침대 위에 넘어지는 것도 일상이었다. 담배냄새에 절어있는 그 아파트의 좁은 방. 그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전부인 것마냥, 그렇게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이 서로를 향해 감정을 쏟아부었다. 나는 그를 죽도록 사랑했고 그도 나를 죽도록 사랑했다.
헤어진 것은 그 애정을 표출하는 방식에 서로가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맞는 것에 질려갔고, 그는 자신의 폭력에 무감각해져갔다. 멍든 팔을 보이며 이제 끝이라고 소리질렀을 때 그는 웃기지 말라며 소리질렀다. 짐을 싸서 밖으로 나가는 등 뒤에서 성난 남자의 고함소리가 쫓아왔고, 내가 한번 돌아보지 않는 동안 그 고함소리는 울음으로 변했다. 그 게 끝이었다.
두번째 남자는 소심한 동양인 유학생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는 금발에 긴 다리를 가진 여자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 믿기 어려워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하루 8시간을 공부에 쏟아붓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절대 자기와 다른 나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뭐라고 입을 잘못 떼면 내가 바로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흥청망청 술을 마셔도, 옷을 사들여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려 애썼다. 어쩌다 일찍 일어나 그와 같이 아침을 먹거나, 점심께쯤 도서관에 가는 그에게 다녀오라고 키스를 해주면 그는 칭찬받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발갛게 붉히고 기뻐했다. 학교 공부를 재대로 시작한 것도 그의 영향이었다.소심하고 유유부단했지만 다정하고 안전한 남자였다. 그런 그의 편한 면에 기대듯이 그를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했다.
헤어진 것은 그가 결국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유학생활이 끝나갈 무렵에 그는 나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홀로 본국에 돌아갔다.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함께 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도 그를 따라갈 마음은 없었으니 그는 옳은 방식으로 우리들의 고리를 끊은지도 모른다. 그는 크게 상처입지 않았고, 나도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에 남은 아쉬움은 잠깐이었다.
세번째 남자는 자신만만한 엘리트.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럭비부 주장이었고 지금은 학교의 스타라고 자랑하는 게 입버릇처럼 되어있는 남자였다. 집을 제공해준다는 말에 나는 그의 조건을 두말없이 받아들였고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너는 정말 아름답다며 입에 발린 칭찬을 진심으로 늘어놓았다. 자만심으로 가득찬 그의 애정은 굴곡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편했다. 여러 여자와 쉽게 바람을 피웠지만 그는 그들을 디저트라도 되는 양 가볍게 대했다. 네가 가장 좋다며, 잘난체 하듯이 말하곤 했다. 그런 자랑을 가만히 들어주면 기뻐하는 남자였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것은 굉장히 편했다. 자만심과 자존감으로 되어있는 단순한 남자였기 때문에 애정도 그렇게 직설적이었고,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그도 아마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헤어진 것은 그의 하늘 높은 자만심이 갈 길을 잃었기 때문에. 학기가 바뀌면서 그는 수업에 따라가는 것을 버거워하기 시작했고, 그의 성적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꾸준히 상승하던 내 점수가 그를 처음 앞질렀을 때 그는 좀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 격차가 계속 벌어졌을 때 그는 마침내 짜증을 냈다. 그런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독점욕, 열등감, 자만심. 어지럽게 섞인 감정들은 쉽게 증오로 변했다. 멸시어린 폭언을 반복하고, 이기적인 분노를 쏟아내는 그에게 지쳐 이별을 고했다. 마지막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를 위해 우는 눈물은 아니었다.
그 밖에도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스쳐갔고, 떠나갔다. 하지만 같은 침대를, 같은 컵을, 같은 식탁을 사용하며 함께 일상을 공유했던 남자들은 그들이 전부였다. 하나, 둘, 세 명. 그리고 지금 또 한 사람. 혹은 마지막 사람.
"네번째에요."
"뭐가?"
"내가 만난 네번째 남자가 당신이라구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배개를 나란히 하고 누운 남자는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얼굴 어디에도 나에 대한 책망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미안해하고 있을 뿐. 그가 죄책감을 부풀리기 전에 나는 웃으며 내 말의 답을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세 명의 전처가 있다고 너무 미안해할 거 없어요, 자기."
"어, 응. ....미안."
"미안해할 거 없다니까요."
장난스레 말하자 제임스는 겨우 안심했는지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웃었다. 쑥스럽게 따라붙은 꼬리표같은 사과에 웃음소리를 섞어 핀잔을 주자 그는 아이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마 위에 살그머니 남을 듯한 키스를 했다. 그는 두 팔로 나를 안아주었다. 품에 안기자 그는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었다. 입맞추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어떤 사람이었어?"
"글쎄. ..여러 종류의 남자들이 있었어요. 나를 때리던 사람도 있었고, 나를 숭배한 사람도 있었고. 나를 미워한 사람도 있었고. 훌륭한 남자는 하나도 없었어요."
"앰버."
"하지만 모두 나를 사랑했죠."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는 기분좋은 울림이 되었다. 그 울림이 머리 끝에서부터 나를 채웠다. 기분 좋은 감각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또 어찌할바를 모르겠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고, 다정한 사람. 대답을 돌려주자 그는 조금 망설이듯 고개를 떼었다. 올려다본 시선의 끝에 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당신도?"
"물론이에요.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지금도 그들을 사랑해?"
걱정어린 눈동자. 순간 웃음이 나왔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한결같은 그는 지금 질투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재대로 보여주지 않을 얼굴로. 그의 상냥함에 질려서 떠났다는 여자들은 그의 이런 얼굴을 알고 있었을까. 기뻤다.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목소리에 잔뜩 웃음기가 배었다.
"Honey.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겠죠. ..지금은 당신이 유일한 내 사람이에요."
다정하고 유약한 그가 좋았다. 차가워질 수 있는 자신의 내면만은 절대 드러내려 하지 않는 그가 좋았다. 소년같은 얼굴을 하고 웃는 그가 좋았다. 성인남자가 할 수 있는 배려보다 더 한 것을 하려고 애쓰는 그가 좋았다. 손끝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한 그가 자신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까지 당신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약한 소리 하기에요?"
조금은 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밀어붙이듯 끌어앉았다. 당황한 목소리를 흘리기 전에 그의 위로 올라탔다. 그의 위로 눕자 체온은 편안하게 나를 채웠다. 웃으며 그의 뺨에 입맞춤을 남겼다. 가까워진 눈동자가 좋았다.
"맹세해요,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는 한, 영원히 이 곳에 있을 거에요."
"앰.."
"떠난다고 해도 놔주지 않을 거에요."
"앰버.."
조금 기쁜 듯이 그가 어깨 위로 팔을 둘러왔다. 다정한 사람. 아이같은 사람. 상냥한 남자. 그가 좋았다. 그를 끌어안은 채 몸을 돌려 침대 위로 누웠다. 함께 성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다시 입맞추려다, 문득 생각나 장난스레 속삭였다.
"음, 최소한 하우스에게는 주지 않을 거에요. 그 점만은 알아둬요?"
"앰버!"
"진심이에요."
웃음기 어린 말에 그는 또 조금은 당황한 듯 웃었고, 나는 그의 팔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주 껴안은 두 팔이 행복했다. 어디로 달려나가지 않아도 너는 채워져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이. 놓아줄 생각이 없는 여자와 떠날 생각이 없는 남자. 아마 우리 둘은 아주 잘 맞는 한쌍이었다.
바라건대 여기 함께 서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나를 안은 당신의 이 두 팔이 영원하기를.
fin.
윌슨은 은근히 겁많고 (그 하우스니까 친구하겠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이고
앰버는 죽도록 드세고 (그러니까 하우스와 맞지 않았다 싶을 정도로) 전투적인 인간인데
둘이 함께 있으면 그런 모자란 부분들이 남김없이 채워지는 좋은 커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리를 찾는 앰버에게 있을 곳을, 유약한 윌슨에게는 이정표를.
하우스 윌슨은 정말 좋아하는 조합이긴 한데 둘다 부족한 인간이니까 서로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좋은 거지만.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