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생일 선물을 사주러 근처 서점에 갔다. 처음 찾아간 곳은 서점이 아니라 술집이 되어 있었다. 내가 뭘 잘못 찾아왔다. 그 곳을 지나 다른 서점으로 갔더니 그 곳은 서점반 카페반의 양상이 되어있었다. 책에 저런 것들 튀면 어쩌려고. 답답한 마음에 아무 것도 사지 않고 밖으로 나온다. 어차피 내가 찾는 책이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친구와 마주쳐 몇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집으로 향한다. 햄스터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있다. 햄스터를 들어올려 길게 숨을 불어넣는다. 이제 괜찮아, 아가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시 집을 나선다.
시간은 새벽이었다. 나는 동아리에 가려고 근처 빵집을 찾는다. 대부분을 닫혀있고, 겨울 바람은 차갑다. 동아리 원들과 마주쳐 왁짜지껄하면서 가다가 닫기 직전인 빵집을 들어갔다. 몇종류남아있는 것중에 빵을 고르고 나가는데, 뒤에서 선배가 문듣다. 너희 오빠는 잘 있으시대? 뭐가요? 전투파병나가셨잖아. 목소리는 가볍다.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는 듯한. 그도 그럴 것이 자국의 군대는 그 곳에 도우러 갔을뿐, 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빠도 그 곳에 갔다. 멍하니 있다가 힘없이 웃었다.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투다. 나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는 무덤덤하게 쓸려나간다. 곧 사라질 바다의 거품처럼 하얗다. 어제 전보가 왔어요. 군기지에 가스탄이 살포되서 90%는 죽었을 거라고.
세상이 어지럽게 빠르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오빠는 남은 10%에 들어있을 거라는 왠지 모를 자신이 있었다. 큰 불안감과 희미한 기대. 그런데도 죽음은 저만치 멀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발표된 사망자 명단 속에는 오빠 이름도 있었다. 그런데도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죽음을 믿지 않는다. 문득 햄스터가 생각난다. 몸을 웅크리고 있지 않았다. 길게 편 채 드러누워있었다. 아, 그렇지. 이 아이도 이미 죽었지. 숨을 불어넣으면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불어넣은 숨은 폐로 기어들어가 이미 활동을 멈춘 그 곳을 무의미하게 채워올리다가, 폐포속으로 스미는 일 없이 그 내장을 찢어놓은 채 상처만 남기고 다시 허공으로 돌아가 사라졌을 것이다. 죽은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으로 오빠의 죽음을 실감했다. 실감해서는 안됐다. 돌아올 테니까. 아니, 아직 그 죽음은 여기 없으니까.
오빠가 살아돌아왔다. 곁에는 구해줬다는 인도인-흑인이었을까?- 여성과 그 동생들이 함께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죽음은 다시, 저만치, 저만치 멀다.
흙 속에 파묻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스가 살포되던 때에 나를 도와준 인도인 여성은 깊은 토굴로 들어가 입구를 막아올렸다. 나는 거의 흙에 파묻혀있었다. 숨이 막힐 법도 했지만 그렇게 괴롭지도 않았다. 몸을 덮은 흙은 무겁지 않았고, 그저 이대로 썩어가도 괜찮다는 듯이 따뜻했을 뿐이다. 거의 그 것에 동화되어 갈 때 토굴의 입구가 무너지고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집으로 옮겨 오랜기간 간호해주었다. 여인의 동생들은 나를 좋아했다. 피부색이 다른 나는 바깥에 나갈 수 없었지만, 사방이 막힌 조그만 방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사각으로 사방이 막힌 상자 속에 길게 기대어 앉아 천장을 바라본다. 이 곳에는 빈 공간이 있다. 되풀이되는 매일. 찾아오는 여인과 그 동생들이 사랑스럽다.
어린 소년은 학교에 가는 것이 죽을만큼 싫었다. 바지와 모자와 조끼도 싫었다. 바닥에 드러누워 성대하게 떼를 쓰면 어머니는 늘 용서없이 엉덩이를 때리고 모자를 씌워 밖으로 내몰았다. 맞은편 집의 그 애는 집안에 있지 않느냐고 소리치면 어머니는 되려 큰 소리로 그 사람 이야기는 하면 안된다고 했다. 소년은 반항을 모르는 아이였기에 대부분 입을 다물고 바깥으로 향했다. 맞은 편 집의 꽁꽁 닫힌 문 속에 있는 그 애가 부러웠다. 소년은 그 애에 대한 것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아마 자기와 비슷한 나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새하얀 손과 작은 얼굴밖에 없었다. 남자애일텐데도 그 애의 피부는 하앴다.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싫은 것은 아니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농사일에 지쳐 둔해진 얼룩덜룩한 손가락은 아무래도 예쁘지 않다. 머리에 쓴 모자를 벗었다. 바지 자락을 괜히 쥐락펴락했다. 틈 너머로 보였던 그 애의 하얀 얼굴이 생각났다. 사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머니가 입는 긴 치마자락이, 여동생의 머리끈이 부러웠다. 그 애라면 썩 잘 어울릴 것이다. 예쁘게 옷을 입고, 흰 피부 위로 화장품을 더하고. 소년은 치마를 입고 싶었다. 그 애가 부러웠다. 바지자락을 움켜쥔 채 소년은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