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의 기상은 4시 반으로 정해져있다. 톨레미의 조항사인 리히텐달 찰리는 그 이른 기상과 꽉 짜여진 매일을 좋아했다.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정해진 상황 속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은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하기사 한 때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게 하루를 시작하는 최적의 행동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늘어놓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싸그리 무시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미 오래된 일이다.
"좋은 아침, 리히티- 잘 잤어?"
"아, 크리스 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덕분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조례를 마치고 조종실의 문을 열자 쾌활한 인사가 들려왔다. 환하게 웃은 크리스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히티는 먼저 와있던 크리스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함내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처음 톨레미에 탑승했을 때 그녀는 분단위로 나누어진 스케줄표를 보며 성대하게 불평했다. 하지만 피부가 망가진다던 볼멘소리가 무색하게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충실했다. ..의외의 일면이었지. 어쩌면 그 때부터 좋아졌던 걸지도.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행히 크리스는 눈치채지 못한 것같았다.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리히티는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밤사이에 이 자리를 지켰을 펠트는 성실하게 일처리를 해놨고, 덕분에 해야할 일은 그다지 없었다. 리히티는 잠시 밤 사이의 정보를 건성으로 열람하며 뭐라고 크리스에게 말을 걸까 고민했다. 빈약한 어휘에서는 딱히 좋은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때마침 등 뒤에서 상쾌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와이~ 끝!"
"어, 뭐하고 계셨어요?"
"후후훗, 유니온 군사 기지 정보 빼돌리기!"
"언제부터 그런 걸 다 하셨던 거에요?"
"예전에 스메라기 씨 부탁으로 조사했을 때 뚫어놓은 루트가 아직 발견 안됐더라구. 덕분에 추가 접수좀 했습니다~"
"굉장하네요, 언제봐도."
"별 말씀을. 이걸로 다음 플랜은 좀 쉬엄쉬엄 할 수 있겠다!"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같은 즐거운 어조에 리히티는 덩달아 웃었다. 머리 속 어딘가에서는 일국의 군사적 중요거점의 네트워크 시스템을 해킹하면서 상대가 눈치도 못채게 한다는 게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인지 계산해보고 있었지만 이내 그만뒀다. 과부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속한 집단은 그게 당연한 것이다. 아침 먹기 전에 군사 기지 해킹하는 것쯤은 일도 아닌 초일류 오퍼레이터는 행복한 얼굴로 방글방글 웃고, 의자에 길게 기대어 자신의 개인 단말을 꺼내들었다.
"그걸로 아침 일은 끝이세요?"
"그렇지 뭐. 어제 펠트가 다 해놨더라구."
"성실하네요, 정말. 흠잡을 데 없죠? 펠트는."
"그렇지 뭐. 나로서는 좀 더 활발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긴 하지만."
"그건 성격이니까요."
"그래서 '나로서는'이라고 붙였잖아. 리히티도 참."
"아하하하.. 실수네요."
재미없다니까, 하고 빙긋 웃고 크리스는 단말에 떠오른 화면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곁눈질로 보기에도 전술전략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화면에 불쑥 호기심이 솟아올라 리히티는 상체를 틀어 크리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뭐에요?"
"응? 음- 쇼핑 카탈로그."
"사시게요?"
"그럴 리가 없잖아? 배달해달랠 수도 없고."
"안 사실 거면 왜 보시는 건데요?"
"마음의 여유라는 게 있잖아. 리히티 센스 없구나- 인기 없지?"
"..지당하십니다.."
"아하하, 그런 걸로 울지마!"
배달을 거론하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조금 뾰로통해진 것을 눈치채기까지 리히티의 센스는 약 3할쯤 부족했고, 일반적인 공대 남자다운 질문을 던졌을 때 크리스의 목소리는 훌륭한 원뿔형이 되어있었다. 그야 인기라면 있어본 역사가 없습니다만. 또 점수가 깎였다 싶어 푹 꺾이는 리히티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크리스는 다시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차마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던 리히티의 시선은 슬금슬금 올라가다 크리스의 단말에서 멈추었다.
"어.. 크리스 씨, 보석도 좋아하세요?"
"응? 뭐 여자라면 싫어하지 않겠지."
"평소에는 잘 안하시니까 관심 없으신가 했어요."
"그말도 한 -5점쯤은 당할 거야, 악세서리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어."
"그것도 일반론이잖아요.."
"일반론적인 여자인데 뭔가 불만있으신가요?"
"아니, 없습니다.."
장난스레 쏘아붙이며 크리스는 손안의 단말을 빙글 돌렸다. 화면에 비춰지는 예나 지금이나 오래오래 사랑받는 여성 의류나 악세서리의 홀로그램도 따라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 영상을 눈으로 쫓으며 크리스는 다소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지만 일할 때는 불편하니까 참는 것뿐이야. 이 반지같은 건 휴가 때 살까 생각중일 정도라구."
"헤에.."
"리히티는 그런 거 없어?"
"별로.."
말끝을 흐리면서 리히티는 크리스가 지목한 영상의 반지를 열심히 쳐다보았다. 작은 호박색 보석이 중앙에 박혀있고 테가 한번 꼬아진 심플하고 가느다란 반지였다. 여자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예쁘다는 생각은 들었다. 눈 앞에 실물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까, 대체 무슨 용기였는지 리히티는 한번 숨을 들이키고는 긴장된 목소리를 내뱉어버렸다.
"소,손가락 치수가 어떻게 되세요?!"
"어? 12호. 보석점에 놓여있는 반지의 평균사이즈, 좋지?"
"그..렇네요."
"칭찬 고마워."
"크,크리스씨."
"응?"
긴장한 것이 거짓말같을 정도로 크리스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 점이 미묘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거나 크리스의 대답을 얻어냈다는 것때문에 리히티는 조금 고양되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리히티는 기합을 넣었다.
"사,사,사드릴까요?"
"응?"
한톤은 더 높아진 목소리에 크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히티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잔뜩 긴장해서 대답을 한마디라도 놓칠 세라 리히티는 크리스의 입을 응시했다. 침묵이 흐르고,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 말이야?"
"아뇨! 아니,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오,옷도 괜찮은데.. 바,바,반지도 괜찮지 않나 해서!"
"..반지?"
간신히 힘주어 말한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뜬 크리스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웃음이 사라진 채 그녀는 뭐라 말할 지 고민하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런 여자의 얼굴 앞에서 남자가 쥐어짜낸 용기란 3분쯤 가면 대단한 것이다. 리히티의 어깨가 순식간에 축 처졌다.
"안될..까요? 역시."
"...."
"아,안되겠죠 역시! 아하하!"
자기가 듣기에도 억지로 짜낸 웃음소리는 어색했다. 단말기 끝을 톡톡 두드리던 크리스는 입술 끝으로만 살짝 웃었다. 실망감을 감추느라 애쓰던 리히티는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간 감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리히티의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했던 시선을 다시 크리스 쪽으로 돌렸을 때, 그녀는 이미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른 걸 사줬으면 좋겠어."
"네?"
퍼뜩 정신이 들어 리히티는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는 웃으며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고개돌린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을 응시하며 그녀는 의자 위에 길게 몸을 기댔다. 무언가를 그려보는 듯 먼 곳을 보고, 크리스는 천천히 말했다.
"좋은 언덕이 필요해. 깨끗한 잔디도."
"네?"
"대리석은 약하니까 기왕이면 강화플라스틱같은 게 좋..지만 역시 로망이 없지. 그냥 대리석같은 걸로 해줘. 화려하게."
"크리스..씨?"
의자 위에 길게 기댄 채 크리스는 고개만 돌려 멍하니 자신을 보는 리히티를 보았다. 그녀는 이것좀 보라는 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새하얀 손가락을 깍지 껴고는, 그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깊은 휴식에 잠기는 것처럼. 의례적인 그 행동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지 않았다. 리히티의 굳은 얼굴을 보며 크리스는 맑게 웃었다.
"역시 안해줄 거지?"
"...저는.."
"나도 바라지는 않아. 바라지도 못할 거구."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살짝 웃음기 어린 얼굴로 의자에 기댄 그녀의 얼굴은 몹시도 평화로워보였다. 햇살 아래에서 눈을 감고 느긋하게 순간을 즐기는 휴가철의 여자처럼, 나무 그늘 아래에 몸을 기대고 잠든 소녀처럼, 영원의 휴식 속에서 두번 다시 눈을 뜨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평온해보였다.
"그러니까, 리히티는 안돼. ..그렇잖아?"
"...."
리히티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문 너머로 조용히 사라질 때까지 리히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크리스가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리히티는 싫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건넨 호의에 대해 그녀가 돌려준 대답은 거절도, 불편함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반드시 찾아와 비켜나가지 않을 그 종말을. 실수로라도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없는 그녀의 위치를. 누구보다도 당신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아마도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가 말한 장소를 그녀에게 선물할 수 없었다. 그녀도 이 선물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지금 자신의 위치였다. 그녀의 위치였다. 그녀도 나도 이 배에서 내리는 것은, 아마도..
입술을 깨물었다. 무심코 울음이 터질 것같았다. 같은 것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와 자신의 교차점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돌아보는 일 없이, 서로에게 어떠한 미래를 발견하는 일도 없이, 그저 모두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 서로 다른 시점이라한들 언젠가 모두 같은 종말을 맞을 테니.
"..차였구나, 나.."
입술 끝에 맺힌 말은 씁쓸하게 방울져 떨어졌다. 눈물도 나오지 않은 메마른 눈을 한번 깜빡이고 고개를 숙였다. 몸을 채운 금속이 묵직하게 아팠다.
평소보다 늦게 메인 제어실로 향하던 스메라기는 맞은편 복도에서 오고 있는 크리스와 마주쳤다. 가볍게 손인사를 건네자 크리스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소지었던 스메라기는 크리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순간 정색하고 이동용 스틱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크리스? 무슨 일이야. 안색이 안좋은데."
"별거 아니에요, 스메라기 씨."
"괜찮아?"
걱정스레 마주하는 스메라기의 얼굴을 보고 크리스는 애써 웃어주었다. 창백한 얼굴로 지은 미소는 전혀 편해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의료반으로 가자며 팔을 붙잡는 스메라기에게 크리스는 고개를 젓고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요, 그렇게 중얼거리자 스메라기는 더 종용하지 못하고 한걸음 떨어져 크리스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괜찮아?"
"네. 그냥.. 그냥 좀, 놀랐거든요."
"무슨 소리야."
"그냥,"
자신의 말이 스스로 우습기라도 하다는 듯 크리스는 힘없이 한번 웃었다.
"아직도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구나, 싶어져서요."
"크리스?"
"아니에요. 그보다 어서 가요. 유니온 군사 네트워크에 다시 침입했었거든요. 추가정보 체크해주세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안색을 살피는 스메라기를 응시하던 크리스는 이내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고 다시 한번 웃었다. 이번에는 재대로.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인 스메라기의 등을 떠밀어 다시 이동용 스틱을 붙잡게 하고, 그 뒤를 따르며 크리스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나를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제고 눈을 감게 될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주마등처럼, 혹은 그보다 더 의미없이 사라진 과거의 기억들을 쫓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길을 택했다. 어디까지나 홀가분하게, 자신이 사라진 후의 미래에도 여전히 도사리고 있을 절망이나 슬픔같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걷어버리고 떠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아, 정말이지 주변에 좋은 남자가 없어서 우울하네요-"
농담처럼 중얼거린 탄식에, 앞서 걸어가는 상냥한 상관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뭐야, 그런 거였어? 하고 되받아주었다. 아마 그녀는 그 말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을테지만, 그래도 그런 척 납득해주었다. 그게 정해진 선안의 행동이었으니까. 리히티도 그래야했다. 속내를 파고드는 대신에 웃고 넘기는 그런 방식으로 말을 걸어주어야 했다. 아니, 리히티가 아닌 자신이. 웃으며 넘겼어야했다. 그랬어야했다.
그런데도 평온하게 잠들 관을, 안식의 무덤을 그려보았다. 한번도 꿈꾼 적 없는 평온한 끝을 생각했다. 서툰 호의, 진심어린 목소리, 긴장한 얼굴, 그런 것들에 끌려서. ..어느 새부터인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을 쫓는 시선, 애정어린 눈길, 서툰 호의가 가득 담긴 그 목소리 같은 것들에.
어깨를 나란히 해도 결코 겹쳐지는 일은 없을 곳을, 혼자 걸어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fin.
예전에 쓰다가 던져놓은 크리스와 리히티의 이야기.
서로 죽음을 예감했기에 끌어안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