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치뤄진 것은 공기가 차가운 가을날이었다. 관이 차가운 땅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윌슨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격식과 형식에 순응하며 살았던 그녀답지 않게 그녀가 입은 검은 여성용 수트는 여기저기 구겨진 채였다. 그녀는 결코 손에 삽을 들지도 않았다. 그저 관 위로 흙이 쌓여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는 윌슨을 보고도 사람들은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눈물자국이 남은 채 엉망이 되어있는 얼굴과 넋이 나간듯한 처량한 표정은 어떤 것도 지금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무덤 위에 묘비가 세워지고 하나 둘 사람들이 흩어지게 될 때까지도 윌슨은 말 없이 무덤가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내버려두고 멀리 갔을 때, 돌연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앰버 볼라키스를 잃었다.
윌슨은 망연하게 방안을 바라보았다. 집안 곳곳에는 그의 흔적들이 배어있었다. 그가 입원한 며칠동안 윌슨은 온종일 그의 곁을 지키는 데에 매달렸다. 덕분에 집안은 그가 사고를 당하던 그 날에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정리할 겨를이 없었고 지금은 일부러 남겨두는 것들이었다. 그가 놓아둔 컵, 옷, 시트, 시계, 그런 모든 것들. 침대 위에 벗어놓은 앰버의 잠옷까지도. 앰버는 함부로 옷을 벗어놓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급하게 집을 떠나야 했다. 금방 돌아올 생각으로 굳이 정리하지 않았으리라. 배개 위에는 앰버가 남기고 간 쪽지가 놓여있었다. '곧 돌아올게 달링.' 그다운 섬세한 필체로 쓰여진 장난스러운 문구는 가벼웠다. 그 풍경 속에서 무언가가 훼손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변함없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쪽지를 닳도록 만지면서 윌슨은 모든 것이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는 잠시 나갔고 곧 돌아올 거라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렇게 누군가가 사라진 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이 슬펐다.
[..아직도 죽을 상이야?]
소파 위에 몸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은 윌슨의 뒤에서 침묵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앰버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윌슨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지팡이 소리가 울리고 끄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것 또한 익숙했다. 빌어먹을만큼 소중한 인간. 윌슨은 손등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가까스로 밀어낸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나가, 제발.]
[5주째 연락두절을 하고 의자 위에 앉아 슬픈 미망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면 슬슬 제임스 윌슨으로 복귀해도 늦지는 않은 것같은데.]
[하우스, 나가.]
[아픈 다리를 끌고 찾아온 친구도 내칠만큼 그렇게 자기 세계에 빠져있나?]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것 같아?]
[적어도 지난 10년간은 그랬지.]
여느 때처럼 빈정거리는 말을 늘어놓고서 그레고리 하우스는 윌슨 맞은 편에 놓인 소파에 깊숙히 앉았다. 몇년 동안 쌓아온 긴 우정 때문에 그가 밉살스러운 소리를 늘어놓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윌슨은 그의 눈빛 속에 가라앉아있는 걱정을 읽어냈다. 미사여구나 인사치례를 늘어놓아 본적이 없는 그의 행동들은 대부분이 진실했고, 그 것은 언제나 짜증내면서도 놓을 수 없는 위로가 되어주곤 했다.자신의 말을 무시하며 멋대로 행동하는 그의 태도를 어느 때처럼 고마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윌슨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당신이 앰버를 죽이기 전까지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그건 내 탓이 아냐. 난 그를 태운 버스를 운전한 운전사도 아니고, 그 버스를 들이박은 쓰레기 트럭의 운전사도 아니지. 너도 알고 있잖아?]
어조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진실이었다. 평소라면 수긍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담담한 진실이 뒤틀려서 견딜 수 없었다. 반발에 밀려 터져나온 말은 둑을 무너트리고 격하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당신이 그 버스에 그를 밀어넣었어.]
[나는-]
[알아, 고의가 아니었어. 하우스. 당신 말은 전부 사실이야. 당신은 그를 죽게만든 직접적인 원인에는8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 그를 살리려고 노력도 해줬지.당신 탓이 아니라고, 그렇게 납득하려고도 해봤어. ..알아, 당신은 노력했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빨갛게 부은 눈가에서 열이 타고 올라왔다. 바짝 마른 목이 아팠다. 그래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 몇백번, 몇천번 생각했던 말은 숨처럼 자연스럽게, 흉기처럼 차갑게 쏟아졌다.
[당신은 그 버스에 혼자 타고 있어야했어.]
[.....]
단호하게 말을 끊은 그녀 앞에서 하우스는 그로서는 드물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윌슨이 가장 애먹는 얼굴이었다. 인간적인 감정을 재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난감해하는 듯한 그 시선. 언제나 그 얼굴을 보면 약해지곤 했었다. 어느 때처럼 미안해하며 자신의 말을 철회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가운 돌을 삼킴 것처럼 심장 언저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그를 향한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터져나오는 힐난을 멈출 수 없을 것같아서였다. 하우스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하우스의 씁쓸해하는 시선을 마주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지팡이등을 몇번 쓰다듬던 그는 이내 겨우 끌어낸 것처럼 말을 꺼내놓았다.
[..결혼할까.]
[...뭐라구?]
[말대로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윌슨은 순간 미움도 잊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에야 증오는 가슴 속에서 다시 꿇어올랐다. 비웃는 듯이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윌슨을 감추지도 않았다. 쾅! 하우스가 지팡이로 거실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의 목소리는 욕설만큼 거칠어져있었다.
[내가 네게서 앰버를 빼앗았어. 맞아. 내가 젠장맞을 원인 제공자야.]
[알고는 있었어?]
[너는 그가 네게 가족을 준다는 것에 집착했어. 네가 세번의 결혼 생활동안 모조리 실패한 그 빌어먹을 가정 말이야. 너는 매번 모든 걸 다 잃어버렸지. 그리고 앰버는, 적어도 네가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이번에는 똑바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줬어. 사실이 어떻든 간에, 네가 기대할 수 있는 빌미를 준 유일한 인간이야. 그리고 그 빌미가 스스로 꺾여 나가기 전에 나는 실수로 그 빌어먹을 관계를 잘라버렸어. 그래서 너는 분노했고, 괴로워했지. 그러니까 내가 주겠다는 거야, 네 금발머리 연인을 대신해서 내가 하겠다고. 알아들어?]
그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의 홍수는 멋대로 내달려 윌슨을 덮쳤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들으며 윌슨은 뒤로 떠밀리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그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그의 감정을 쏟아부었다. 마지막 비명같은 외침을 끝내고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서도 긴 시간 동안 윌슨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곳에 앉아있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누가...]
[누가 당신에게 내 가족을 달라고 했어?]
떨리는 목소리는 일단 자신의 귀에 다시 돌아온 순간에 훨씬 더 명확해졌다.
[당신이 그런 걸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뭐라고 하든 절대 듣지 않고, 절대로 굽힐 줄 모르는 그레고리 하우스가?]
[못할 건 없어. 아마 변할 수도 있지.]
[절대 못해, 하우스. 난 당신을 알아.]
[난 지금 변하겠다고 얘기했어.]
[모든 건 변하지 않는다는 게 당신 신조야.]
[새로운 답을 내놓을 때도 있지. 아주 가끔이지만, 가짜는 아냐.]
[당신은 못해.]
[난 하겠다고 했어.]
[다물어, 하우스.]
윌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든지 격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침착하게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서고, 침착하게 고개를 숙였다. 격정은 거기서부터 타올랐다. 자신을 밀어붙이듯이, 증오를 쏟아붓듯이 윌슨은 하우스의 입을 벌리고 비집고 들어갔다. 머뭇거리던 그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혀가 얽히는 진한 키스는 길었다. 그 순간만큼 윌슨은 그에 대한 증오와 그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접었다. 사랑하던 남자는 죽어서 그녀를 떠났고 망가진 채 살아있는 이 남자는 지금 그녀를 원하며 이 곳에 있었다. 윌슨은 그를 끌어안았다. 이 순간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동시에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이대로 머무를 수 있다면. 그렇게 비는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그녀는 증오와 애정을 담아 하우스를 밀어냈다. 한뼘 멀어진 그를 이번에는 떨쳐내지 않고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채로 윌슨이 웃었다. 울음같은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스며나왔다.
[당신은 죽어도 못해.]
[..윌슨.]
[난 당신이 절대 변하지 못하는 걸 알아. 그게 하우스 당신이야. 그걸 부정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건 정말 당신답지 않은 방법이지.]
숨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윌슨은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얼어붙어있는 이 남자를 정말로 좋아했다. 삶의 한 부분으로서 함께 있어온 사람이었다. 어떤 예의도 허구의 말도 요구하지 않은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너무나도 편했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그였기에 말하지 못했던, 말한 적이 없었던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만일 당신이 변할 수 있었으면, 난 이미 10년 전에 당신을 택했어.]
[..지금은.]
[그 선택지는 오래 전에 사라졌어. 말이 더 필요해? 남은 선택지는 하나야.]
대답을 듣지 않으려는 듯이 윌슨은 하우스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을 놓았다. 그 손이 구겨진 셔츠깃을 스치는 순간 윌슨은 손끝을 움츠렸다. 그를 다시 잡고 싶어지기라도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이 결정을 죽도록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제임스 윌슨은 어느 때보다 자신이 해야할 선택을 쉽게, 그리고 명확하게 받아들였다. 두어걸음 물러나 윌슨은 눈 앞의 사람을 다시 똑바로 응시했다.
[잘 가요, 하우스. 우린 더이상 친구 사이가 아니에요.]
손끝으로 현관문을 가르키자, 소파에 앉은 남자는 잠깐, 그의 지성을 잃은 듯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윌슨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옛 친구는 아주 느리게 손을 뻗어 지팡이를 쥐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윌슨을 지나쳐 문을 나섰다. 느리게 지팡이를 짚고, 절름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나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작아졌다.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서야 윌슨은 쓰러지듯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자, 미처 못 나온 울음처럼 가느다란 웃음이 흐느끼다가 사라졌다.
한 사람을 잃었고, 한 사람을 버렸다.
어느 쪽이 더 괴로운지, 지금의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fin.
두번 다시 안써..orz
그냥 '한쪽이 여자였으면 당장 결혼했겠지'라는 대목에 하윌이 들어있는 걸 보고 망상하다가 나온 글. 어째 쓰고나니 인상이 판이하게 달라져 캐릭터 강간이란 이런 걸까 싶어 쓰고나서 우울해졌습니다. 경어체가 아니라 반말을 쓰고 있는 건 하우스는 결코 경어체를 쓸 작자가 아니니만큼 반말을 해댈텐데 그 반말에 대해 여자인 윌슨이 남자인 하우스에게 경어를 쓴다면 그건그것대로 기분 나빠지기 때문에.
대충 설정으로는
제임스 윌슨
이혼만 세번인 종양의학과 여의사, 리사 커디와 같은 유태인계면서 여성이라는 마이너리티때문에 제법 친한 사이. 이름이 남성형인 건 뭔가 이유가 있음. 어릴 때 정신분열을 앓던 남동생을 끝까지 돌봐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 없는 장남 사이에 끼어서 부모의 기대주이자 절대 삐뚤어질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음. 착한아이 증후군때문에 결혼한 남성들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성모마리아 컴플랙스에 가까웠음. 의외로 내면은 격한 기질이지만 절대 주변에 풀어놓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하우스를 상대하는게 제일 편했음. 다만 하우스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알맞은 독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탓에 이성관계로 발전하는 건 처음에 고민해보다가 이내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렸음.
원판이랑 좀 달라진 건 식사 뺏기면 그 가격 계산해서 나중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낼 것같음. 딱히 금전이 아니라도..
앰버 볼라키스
아마 윌슨이 여자였다면 원판 앰버의 성격을 180도 바꿔 오히려 윌슨에게 가까운 성격인 게 나을 듯. 작중에서도 윌슨은 어떤 의미로 하우스의 안티테제인데 이런 글 써놓고 뭐하지만 윌슨이 여자였다면 그냥 하우스랑 사는 한이 있더라도 하우스 마이너판인 앰버와 사귀었을 것같지는 않음. 게다가 내여자에게만 착한 나쁜 남자 혹은 내 여자에게도 큰소리치는 나쁜 남자는 정말 영 아니란 말이지, 나쁜 여자에게 쥐여사는 남자는 괜찮아도 나쁜 남자에게 쥐여사는 여자는 볼 수가 없는게 내 취향. 올 백프로 내 취향. 죄송합니다 여자마초라서. 어쨌든 윌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머뭇거리는 일면들에 대해 재대로 받아들이라고 해줬을 남자같음. 아, 나 의외로 원판 앰버 좋아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