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한번도 자신이 걷는 길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손에 들렸던 검.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총기의 감각. 다른 누군가를 없애기 위한 것들. 귓가에 맴돌던 찬가. 그 것들은 그대로 소년의 삶이었고,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삶은 부정하거나 긍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신을 따라, 신을 찬양하고, 그가 원하는 길을 걸어, 마침내 그의 말로 세상을 뒤덮을 날이 오기를. 그 것이 소년이 아는 세상의 전부였고, 소년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의 전부였다. 한치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신의 뒤를 따라 그 길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지에 남겨진- 버려진 아이들 중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흙먼지로 뒤덮인 그 전장에 남아있는 것은 아이들밖에 없었다. 신의 이름을 앞장서서 부르던 남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난 후였다. 그들이 '신이 이끄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신을 따르라 했던 지도자들이 신을 버리고 사라졌다. 어째서.
어째서?
누구도 그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았다. 남겨진 아이들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의문도 분노도 무엇 하나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 누구도 자신이 걷는 길을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와서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은 총기를 손에 들었다. 소년도 자신의 총을 손에 들었다. 화약이 튀어 살이 익고 무게에 짓눌린 어린 손가락에 화농이 일었을 때도 놓은 적이 없던 그 애기가 처음으로 무척이나 무거웠다. 내딛은 전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울려퍼지는 찬가도, 성인 지휘관도 없었다. 무너진 모래 언덕에 꼬이는 작은 개미떼처럼 소년병들 한무리만이 우왕좌왕하며 흙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었다. 그에 맞추듯 흙먼지가 이는 전장에는 대인살상병기가 연속으로 쏟아내는 총성이 울리다가 사그러들기를 반복했다. 함께 뛰쳐나온 다른 소년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져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소년은 처음으로 이 곳이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신은...
마음 속에서 어떤 단어가 응어리졌다. 소년은 그 것을 묵살하기 위해 전장을 달렸다. 손끝이 아려왔다. 다리에는 감각이 사라졌다. 흙먼지가 매캐하게 번지는 그 메마른 땅 위에서는 총성만이 부서져 흩어졌다. 소리없는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퍼지다 사라졌다. 어설프게 줄여입은 방탄조끼가 어깨에서 무겁게 흔들렸다. 이대로 쓰러지면 끝이라고 소년은 되뇌었다.
신은, 이 곳에.
- 아니, 여기에는.
머리를 침식하듯이 단어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소년은 그를 지우려 감정을 의식 밑으로 우겨넣었다. 무거운 발끝에 돌이 채였다. 가까워진 병기가 거대한 몸을 뒤틀었다. 손에 쥔 총기가 둔한 소리와 함께 탄환을 밀어냈다. 병기에는 긁힌 상채기가 생겼을 뿐이었다. 소년은 다시 돌담 뒤로 달렸다. 숨이 끊어질 듯이 터져나왔다. 소금과 모래로 버석버석한 얼굴에 다시 소금땀이 흘렀다. 갈라진 입술에 먼지가 내려앉아 마른소리를 냈다. 병기에서는 다시금 엄청난 소음이 울리고 곁에서 동료가 또 하나, 쓰러졌다. 의식이 다시한번 헝클어졌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신은, 여기에는.
- 아냐. 아니야.
소년은 내부의 목소리를 부정하며 다시 총을 쥐었다. 연사했던 오른 손의 손톱이 빠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남자를 떠올렸다. 신을 말하던 남자를. 그의 가늘게 웃던 눈매가 기억 속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가 말한 영광이, 신의 목소리가 소년의 전부였다. 다시 한번 병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소년은 소리없이 되뇌었다. 그가 말해준 신의 이름을. 마치 시험대에 오른 신앙을 독려하듯이. 무거운 다리를 끌어당기며 소년은 병기를 피해 또 달렸다.
......!
쏟아져들어오는 총알을 피해 몸을 굴려서 들어간 돌담에 죽은 동료의 시체 하나가 누워있었다. 넝마처럼 널부러진 시체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흙먼지와 소음 사이에서 그 붉은 색이 시야에 쏘아들어오듯 박혔다. 반만 남은 얼굴에 핏기 잃은 눈동자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 어디에도 환희는 없었다. 남자가 말했던 신의 영광은 없었다.
그 순간에 심장에서 핏덩어리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신은, 없어.
결말은 단호했다. 둑이 무너져내리듯 터져나온 감정을 막아줄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비명은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살이 벗겨져 화끈거리는 손으로 총을 고쳐쥐고 소년은 무너져내리는 몸을 다잡았다.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신은 없어..!!"
누군가에게랄 것도 없는 그 외침은 메마른 전장 위에 메아리쳤다. 소년의 증오는 그의 신앙만큼이나 간단하게 산산히 흩어졌다. 타인에게 닿을 일 없이. 그 사실이 아팠다. 두 손으로 붙잡은 열기를 품은 총신만이 지금 소년의 곁에 남은 전부였다. 소년은 무턱대고 총기를 쥔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소리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년의 입에서는 여전히 비명 한번 터져나오지 않았다. 새빨간 증오와 새카만 절망은 마음 속에서만 응어리쳐 검게 흘러내렸다.
모래바닥을 딛고 달려나가는 순간까지도, 어디에서도 찬가는 들려오지 않았다.
fin.
그리고 그 후에, 소년에게는 빛이.
지금도 생각합니다. '소란 이브라힘'은 그 때 그 곳에서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던 거라고.
어린 소년에게 너무 눈부셨던 그 기적이 '리본즈 알마크'가 일그러진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또 아이러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