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는 언제나 조금 늦게 먹었다. 달콤한 가정요리의 꿈에 젖어있던 두 사람은 세끼만큼은 정각에 먹자고 합의를 보긴 했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게 녹록한 것은 아니어서, 첫 날 냄비 요리에 도전한 록온과 그 다음날 국을 끓인 티에리아는 피차 서로의 요리실력이 한없이 바닥에서 오십보백보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인터넷에서 긁어모은 레시피와 <초보도 할 수 있는 가정요리 100선>따위의 책 십여권을 끌어안고 공부를 시작한 티에리아와 달리 록온은 조리법이 적힌 종이 세장만 부엌벽에 붙여놓고 연습에 임했다. 결과는 록온 승, 티에리아 패. 피차 저차원이긴 했지만 어쨌든 록온은 '먹을 만함'레벨에 도달했다. 결국 승부욕과 식욕사이에서 헤메다가 저녁 설거지의 만년 당번을 수락한티에리아가 이를 부득부득가는 것을 보고 록온은 승리포즈를 취하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초보는 초보, 산더미처럼 만들어내는 설거지감에 비례하듯이 요리 시간은 언제나 한없이 길어졌다.
"저녁식사 멀었습니까?"
"아? 음- 쫌만 더 기다려봐. 양이 안 맞는 것같아."
"또 입니까? 그러게 비커 쓰랬잖아요."
"내가 매드 사이언티스트냐? 넌 가끔 황당한 농담을 하더라."
"그럼 저는 미친 과학자라 이겁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비커로 계량하고 메스로 먹는게 과학자의 기본 아니야?"
"내가 언제부터 과학자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좀 알려주시죠."
"..내가 잘못했습니다."
티에리아는 현명하게도 개수대에 쌓이는 그릇에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동거인의 요리실력을 비아냥거리는 스킬을 연마했다. 그리고 그 티에리아의 세배쯤 똑똑한 록온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대신 괜히 개량을 들먹이며 그릇 세개를 더 꺼내왔다. 이 참에 아예 그릇들을 다 꺼내버릴까. 비커를 가지고도 소금양을 못맞춘 너는 어떻냐고 쏘아주는 대신 록온은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사는 족족 깨먹던 티에리아 덕분에 그릇 세트를 한 벌 더 주문하게 생긴 참이기도 하고.
"..아직 멀었습니까?"
"어, 잠깐만. 쫌만 기다려. 수저 먼저 놓을래?"
조금 지난 후에 다시 한번 티에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건 진짜 배고픈 거다. 목소리가 약간 힘이 빠져있는 것을 감지하고 록온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면 개량이다 뭐다해서 난리치는 동안 평소보다 더 늦어져있었다. 보글보글 끓고있는 냄비의 불을 줄이면서 록온은 냄비 속의 것을 노려보았다. 시력좋은 눈이 요리가 딱 알맞게 익는 타이밍을 잡아준다면 정말 좋겠지만. 300년 전 tv프로그램에서 앞치마 두른 후덕한 아주머니가 <요리는 감이에요 호호호>하고 웃던 것을 별 바보같은 소리가 다 있다고 넘겨버린 10대의 자신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뭐 이쯤이면 괜찮으려나. 적당히 색깔이 변해서 록온은 가스렌지의 불을 끄고 주방장갑을 집어들었다.
"오늘 특선 메뉴, 아이리시 스튜입니다~"
"..일주일 전에도 이 메뉴 아니었습니까?"
"맛있었지? 그래서 재도전한 거야."
"분량은 2인분인가요?"
"..어, 음. 어."
"또 불어난 겁니까."
"아니, 쪼끔이야. 쪼끔. 내가 더 먹으면 돼."
록온은 손사레를 설레설레 쳤다. 일주일전 아이리시 스튜는 눈대중으로 부어넣은 비프스톡이 물보다 많이 들어가 그걸 희석한답시고 물과 야채와 고기를 추가하고 추가한 끝에 몇 일이상 먹어도 될 양이 되어버려 두 사람은 사흘간 물만 먹는 식물마냥 스튜만 먹어야했었다. 그러고도 같은 요리에 도전하다니 질리지도 않나, 저 사람은. 록온의 취향과 할 수 있는 요리 메뉴중 어느게 우선시 되었는지 가늠해보던 티에리아는 이내 포기하고 스푼을 집어들었다. 피차 사교의 시간보다는 에너지 섭취를 위한 행위로 식사를 취급했던 사람들이라 대화는 거의 없었다. 묵묵히 비워가다가 그나마 말문을 연 것은 록온쪽이었다.
"맛있지?"
"지난번보다는."
시큰둥하게 말하면서도 티에리아는 얌전히 음식을 떠먹었다. 미지근한 우주식량에 익숙해져있던 시절에 비하면 분명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부엌이 어떤 꼴이 되어있을지 상상하는 건 나중 일로 미루는 게 속편하긴 해보였지만. 록온은 나름대로 자신이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세좋게 먹어치우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맛있게 된 것같다니까."
"다음에는 메뉴를 좀 늘려줬으면 하기도 합니다만."
"어린아이는 잠자코 먹습니다, ok?"
"그 어린애한테 식후노동을 시키는 건 위법이라고 생각 안합니까."
"가사분담은 완만한 가정의 지름길 아냐?"
"어린애는 잠자코 먹으라면서요?"
"아- 음, tv나 볼까나?"
자화자찬으로 시작된 대화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록온은 딴청을 피우며 tv를 틀었다. 탁자 옆에 설치된 홀로그램 tv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녁식사시간에는 뉴스보지 말자더니. 티에리아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도 티는 내지 않고 록온을 따라 tv에 집중했다. ..그리고 금방 낭패한 기분이 되었다.
[이번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폭탄테러사태로 정부시설 3군데가 완전 폭파되었으며........피해액은 총.....사건에 휘말린 민간인은 4천명에 달했습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냉정하게 고지하는 기사의 내용을 따라 화면에서는 엉망이 된 거리와 건물이 배경처럼 지나갔다. 순식간에 입맛이 떨어져서 티에리아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화면을 틀었던 록온의 눈은 조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는 채널을 돌리지도 tv를 꺼버리지도 않은 채 컨트롤러를 든 팔에 고개를 괴었다.
"..저런 일은 참 끊이지 않고 일어나더라."
"네."
"볼 때마다 기분이 답답해져. 옛날같으면 정부는 뭐하는 건지-하고 그랬을 것같은데. 자꾸보고 있으면 무감각해지는 모양이야, 저런 것도."
"..."
"티에리아?"
무덤덤하게 말하던 록온은 대답없는 티에리아 쪽을 돌아보았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그의 말을 듣던 티에리아는 손을 뻗었다. 핏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화면에 에, 하고 록온이 바보같은 소리를 냈다.
"어이어이, 보고 있는데 꺼버려도 돼?"
"식사중에는 끄는 겁니다."
"하아.."
"이야기나 하시던가요. 먹을 양도 많겠다."
대화거리도 별로 없으면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록온은 동거인의 심리를 거스르는 대신에 얌전히 스튜를 퍼올렸다. 냄비 속에는 아직 3인분쯤 남아있는 스튜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머리 속으로 굴리면서 역시 소화제를 새로 사올까 고민하기 시작할 즈음에 티에리아가 담담한 말투로 물어왔다.
"옛날 일은 여전합니까?"
"응."
"아무 것도?"
"설마."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록온은 익숙해진대로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몇번인가의 재생수술을 거치면서도 눈은 여전히 예리한 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요리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데에는 별로 쓸모 없었대도 싸늘한 붉은 눈동자 밑에 가라앉은 걱정어린 시선을 읽어내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도저히 걱정끼치지 못하게 만들 얼굴로 그런 소리하지 말라니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록온은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음부터 다 잊어버린 게 아니었잖아. 다 기억합니다, 이것저것모두."
"..록온, 당신은.."
"됐잖아, 너무 심각해질 것없어."
간만에 진지한 눈이 된 동거인을 보며 록온은 손사레를 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큰 사고를 당하고도 무사히 살아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하늘이 준 복은 다 써버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팔도 다리도 멀쩡하게 붙어있었고 혼자 음식을 만들어차릴 수 있을만큼 잘 움직이고 사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중요한 건 지금 아니겠어?"
주말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지만 말이야. 말하면서도 본인도 조금 쑥스러웠는지 록온은 입을 다물고는 딴청을 피웠다. 시선을 맞추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티에리아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습니까."
"뭐 그 시절의 나한테 맡겨둔 거라도 있어?"
록온은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그 것을 받아치는 것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이런 순간에는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티에리아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자신은 아직도 그가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고, 어디까지 잊어버리고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다. 그런 자신을 보며 그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같은 눈으로 턱을 괴고 있었던 손을 풀었다. 팔짱을 낀 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상관없어. 지금도 만족하니까."
"..정말입니까."
"정말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자신을 보는 티에리아를 향해 그는 맑은 눈으로 웃었다.
"만족해."
어딘가 포기한 기색이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그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 건지 티에리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런 티에리아를 내버려두고 양지 아래 고양이같은 얼굴로 스푼을 집어들고 스튜를 뒤적이던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지금같이 사는 데에 불만도 없고. 그렇잖아? 여기에 네 요리실력이나 내 요리실력이 조금만 더 좋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예전에도 둘다 못했습니다."
"..과한 바램이다 이거구만."
티에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잇사이로 앓는 소리를 낸 록온이 조금 식은 스튜를 떠서 입안에 밀어넣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맛을 음미하는 그를 티에리아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록온."
"응?"
"잊고 있었습니다만."
티에리아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애초부터 많이 담지도 않은 것을 절반가까이 남겼지만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록온이 빤히 보고 있음을 알았으나 티에리아는 굳이 고개를 들지않았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식기를 정리하면서 티에리아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당신을 꽤 좋아합니다."
오늘 식사는 맛있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맛없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 어울리는 어조에 록온은 허,하고 한 순간 할말을 잊었다. 스푼을 입에 문채로 족히 1분쯤은 벙쪄있다가 록온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황송하네?"
"알면 됐습니다."
"귀엽지 않다니까 정말. "
"안 귀여워서 죄송하군요."
"그거 완전 빈말이지?"
"아시면 됐습니다."
삐딱하게 식탁에 기댄 록온은 단호하게 말을 끊고 먹고 남은 스튜를 한쪽으로 모으는 티에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같으면 똑바로 앉으라고 한 소리 할 테지만 티에리아는 잠잠했다. 그 것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네가 꽤 좋아."
"...그거 다행이군요."
잠깐 지체하긴 했지만 티에리아의 대답은 그나마 빨랐다. 접시를 들고 일어선 티에리아는 개수대로 가 층층히 쌓여있는 그릇위에 먹고난 접시를 올렸다. 식탁에 앉아있는 록온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자리로 돌아온 티에리아는 록온의 옆에 멈추어섰다. 뭔 일 있어? 하고 명백하게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록온 앞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다가, 티에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가벼운.
"...뭐야, 대낮부터 애정행각?"
"설마요."
"그럼 뭘로 해석하면 되는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자는 회유책입니다."
농담처럼 웃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티에리아는 방금 전 머리 속을 채웠던 기억들을 지웠다. 그에게 돌려주어야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지웠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본명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지웠다. 동시에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을,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잊었다. 망설임이나 죄책감은 이미 오래 전에 흐려져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지워나가면 그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남자의 맑은 눈을 보며 문득 자신은 그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다. 그처럼 평온한 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소원일까. 지워버린 것들 속에 서 있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안고 있었던 것을 전부 내버리고 이 곳에 와있었다. 버석버석하게 매말라 갈라진 살갗을 드러낸 허물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일단 그릇을 깨트리면, 그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은 서서히 흘러나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눈 앞에 남아있었다.
"흐음- 남은 스튜 처리하는 거 도와주면 생각해볼지도."
"내일 아침을 그걸로 하죠."
치사하지 않냐 그거? 하고 볼멘소리로 말하는 록온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런 삶도 견뎌낼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에게 들려주며 머리 속에 떠올랐던 기억들을 다시 한번 지웠다. 록온은 눈 앞에서 평화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장난스레 농담섞인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 곳에 있었다.
그만큼은 허상이 아니었다.
fin.
07. アネモネ (아네모네) / アネモネ
例えば海の底であなたが生きてるのなら
가령 당신이 바다 속 깊은 곳에 살고있다면
私は二本の足を切って魚になろう
나는 두 다리를 자르고 물고기가 될게
深海へ落ちるほどにあなたが近づくのなら
심해에 잠길수록 당신과 가까워진다면
果てない闇を彷徨う影になってもいい
끝없는 어둠을 방황하는 그림자가 되어도 좋아
좌우간 일상적인 두 사람. 제멋대로 써봤습니다.
이 록온이 닐인지 라일인지에 따라 난이도는 더 올라갑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