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이야기.
날은 따뜻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더웠다. 여름 교복이 아직도 어색할 6월이었는데도 날씨는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 걸까. 모처럼 꺼내 입은 새 하복조차 입은 보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마모리는 부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이 미식 축구부 -데이몬 데빌 배츠-의 매니저가 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무척 아끼는 동생이었던 세나를 잘 모르는 곳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고, 어느 정도는 발끈하는 기분도 있었다. 선도부에 들어간 가장 큰 이유가 된 ‘그 사람’에게 세나를 맡기고 싶지 않다는 기분도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마모리는 살짝 볼을 부풀려보이고는 부실의 문을 열었다. 유난히 뜨거운 햇살에 얼굴을 찡그리느라 그녀는 순간적으로 문 안쪽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안에 있는 것은 단 한사람 뿐이었다. 2학년 수업만 한 시간 일찍 끝나는 수요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그러고보면 1학년들은 아직 수업도 안 끝난 거구나.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쿠리타는 어디로 간 걸까.
부실 안에 있는 것은 단 한 명 뿐이었다.
히루마 요이치.
자의로든 타의로든 악마로 불리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남자. 문을 닫지도 열지도 못한 채 마모리는 조금 열기를 띈 철문을 붙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평소라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 즉각 비웃거나 수첩을 꺼내들었을 히루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고 있었으니까.
마모리는 잠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팔을 괴고 잠든 그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망설이며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훅 끼쳐오는 열기에 멈춰섰다. 창도 열어놓지 않고 햇빛도 그대로 들어오는 좁은 부실은 바깥보다 오히려 더웠다. 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조금 전까지 덥다 싶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울텐데.."
문 가에 서서 중얼거린게 자신이라고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스스로 말했다고 생각조차 안 했는데도 걱정하는-그 것도 저 사람을-목소리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모리는 순간적으로 그대로 문을 다시 닫을 뻔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들어오자 잠들어있는 히루마의 주변에 잔뜩 어질러져있는 것들이 보았다. 평소의 그 위험한 무기같은 건 아니었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던 걸까. 책상 한쪽에 올려놓은 노트북은 여전히 전원이 들어와있었다. 타자를 치다가 잠든 건지 팔을 벤 채 책상에 엎드려있는 모습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꽤 지쳐보였다. 소리가 나지않도록 조심스레 맞은 편에 의자에 앉으며 마모리는 덥다는 생각에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입구의 더위와 비할 바가 아니다. 노트북에서 나오는 발열 탓인지 책상 주변은 한층 더 뜨거웠다. 이런 곳에서도 잘도 자고있구나 싶어 마모리는 히루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아무리 히루마라도 덥기는 더웠던 듯했다.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든 그는 이따금씩 낮게 으음,하고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머리카락 몇가닥이 땀에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어있었다. 찌푸린 이마에서부터 땀이 흘러내려 목덜미쪽으로 떨어져내렸다. 더운 여름이라면 있을 법한 일이지만 히루마 요이치라는 사람에게 그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습에, 마모리는 갑작스레 웃음이 나왔다. 날카롭게 생긴 시원한 인상에 피어스도 복장불량도 전혀 개의치 않은 폭탄같은 히루마였지만 잠들어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
....
.....
"..!!"
"언제까지 자고 있을 생각이야?"
갑작스레 뺨에 와닿은 차가운 감촉에 히루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눈앞에 있었던 것은 웃음기가 잔뜩 묻은 마모리의 얼굴이었다. 얼른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빤히 응시하는 히루마에게 그녀는 방금 히루마의 뺨에 갖다대었던 것을 내밀었다.
"자, 음료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그녀는 책상 위에 비닐봉투를 내려놓았다. 비닐 사이로 음료수 캔이 보였다. 얼떨결에 받아버린 그 것역시 음료수다. 복숭아 그림이 그려진 동그란 원캔. 탄산은 아니고, 게다가 차갑다. 마모리는 히루마로부터 몸을 돌린 채 말했다.
"도대체가, 이런 더운 곳에서 그렇게 자고 있다가 더위라도 먹으면 어쩌려는 거야?"
"어디서 난 거야?"
"덥길래 사러갔다왔습니다, 뭐."
자신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안하무인격의 질문에도 마모리는 개의치 않았다. 톡톡 튀는 경어체로 대답하며 그녀는 봉투 안의 음료수들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얼결에 캔을 받아들고 앉아있었던 히루마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왠지모르게 선선하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역시 차가운 음료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실의 창문은 열려서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노트북도 한쪽에 가지런히 치워져있었다.
"..!"
"노트북에 쓰여있던 거라면 재대로 저장하고 대기모드로 돌려둔 거니까 안심해."
히루마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마모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리고 대전표의 인명록 정리하다만 건 내가 마저 해놨어,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빤히 쳐다보는 히루마에게 대놓고 눈을 흘기며 마모리는 불평하듯 말했다.
"그런 건 매니저한테도 좀 부탁해도 괜찮은 거라구. 더운데 문까지 걸어잠그고 할 건 없잖아. 쓰러지기라도 했다간 이것저것 잔뜩 짜놓은 계획이 엉망이 된다는 거 알고 있어? 부원들이 실망할 거야."
"..계획을 짰는지 어떻게 알아?"
"늘 하는 일이잖아."
"..."
"지나칠만큼 열심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어디하나 반박할 부분을 찾지 못할 명확한 어조였다. 간신히 부루퉁하게 대꾸해봤지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마모리앞에서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할말을 찾지 못한 히루마는 괜히 머쓱하게 손에 들린 차가운 캔을 굴렸다. 마모리가 생긋 웃으며 자신 몫으로 사온 캔을 들어보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마시고 좀 쉴 것."
"별로 목 마른 건 아닌데."
"수분 보충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1학년 수업 끝날 때까지는 아직도 조금 남았다구."
"기어오르기는."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기 전에 순순히 마셔."
몇 달간의 부활동 속에서 히루마의 패턴에 꽤나 익숙해진 마모리는 히루마의 위협하는 듯한 어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히루마는 순순히 어깨를 으쓱하고는 캔을 땄다. 피식-하는 소리가 울렸다. 빙긋 웃은 마모리역시 같은 행동을 했다. 그리고 마모리는 당연한 듯 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던 히루마는 이내 그 의미를 이해했다. 이내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건방져졌군, 빌어먹을 매니저."
"불만 있어? 그 쪽만큼 안하무인은 아니라구."
"아아, 슈크림을 몰래 집어먹을만큼 성실한 선도부원이지."
"..진짜!"
히루마는 또 한번 마모리의 유일한 약점-이자 유일하게 싫은 기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다. 지금까지의 유리한 고지를 단번에 잃어버리고 얼굴에 열이 올라 소리치는 그녀를 보며 히루마는 다시금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협박수첩에 적은 내용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골려먹기 위한 의도로 놀리는 건 히루마에게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이겼다,라는 조금은 기세등등한 기분으로 히루마는 마모리가 앞으로 내민 캔에 자신의 것을 가볍게 부딪혔다. 건배!라고까지 외칠리는 없었지만 그 것으로 충분했는지 마모리는 여전히 조금 붉어진 얼굴로 음료수를 마셨다. 히루마도 씨익 웃고는 꿀꺽꿀꺽 음료를 마셨다.
더위 속에서 생각외로 목이 말랐던 걸까.
마모리가 사온 음료수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달콤한 맛이 났다.
fin.
07년 10월 20일.
평소의 히루마라면 절대로 단맛나는 것따위는 입에 안대겠죠. 마모리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끈적거리는 단 것보다는 맑은 청량음료로 골라왔을테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단맛인데도 군말없이 먹는 히루마도 나름 배려한 거라는.. 그런 정도의 기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