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아득하게 길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모든 것이 명확한 수치로 제시되었던 나의 세계. 기호로 나뉘고 숫자로 대답되었던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은 조용히 가라앉아있었다. 베다. 그녀는 필요한 것을 제시해주었고 원하는 것을 나타내주었다. 애매모호한 것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선명한 단어. 명확한 해답. 당연한 길. 익숙해져서 걸었다. 기억의 처음을 더듬어보아도 그런 것은 자신 안에 없었다. 주어진 것은 임무였다. 자신은 그녀에게 걸맞은 위치에 있었고 집단 내에서 유일하게 그녀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를 알기 전까지.
남자는 웃으며 그녀와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다. 명확한 대답은 무엇하나 주지 않았다. '네 의지로 생각해봐, 티에리아.' 부드러운 채근. 짜증났다. 그는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겠다는 마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가 거기 있지 않아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양 그의 태도는 담담하고 조용했고,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할 것만을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눈 앞이 붉게 물들었던 날을 떠올린다. 그녀의 내부만큼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별들의 바다에서 부서진 조각이 떠돌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내부에서 부서진 콕핏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을 때 그 속을 떠도는 붉은 피에 숨이 막혔다. 그 안에 쓰러져있는 그를 시선에 담았을 때 그의 피가 이마에 묻은 것을 알았다.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받았다.
그 후에도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웃으며 그 곳에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알려준 그를 보았다. 그의 감정이 옮듯이 함께 움직이는 자들을 좀 더 다정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에게 품은 감정의 이름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동경과 애정, 감사와 죄책감. 여러가지 것들이 얽혀있는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특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을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복잡한 얼굴로 웃었다. 여전히 무엇하나 대답해주지 않은 채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 그는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대기명령을 위반했다. 본함으로부터 그의 출격을 전해들었을 때 가슴 속에서는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 감정을 따랐어야했다. ..그랬어야했다.
밀려들어오는 MS사이에서도 시야는 청명하게 넓었다. 전장에 피어오른 한줄기 섬광은 곧 사라졌다. 파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붉고 푸른 빛이 난무하던 우주 속에서 그는 그렇게 한번의 빛을 남기고 사라졌다. 정보단말은 그의 이름을 모두에게 전했다. 되풀이되는 목소리가, 반복해서 불리는 이름이 파랗게 시렸다. 가슴 속에 품었던 이름만이 날서린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이름에 품은 자신의 감정에는 이름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에게 받은 것들은 무엇하나 명확하게 정의내려지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그에게서 배운 이 마음에 형태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불명확한 것들은 어지럽게 뒤엉켜있어서 끊어낼 수도 없었다. 그는 선명한 대답은 하나도 주지 않았다.그렇게 자신은 그 것들을 내버릴 방법도 배우지 못했다. 끌어안고 그의 뒤를 따라 걷는 것만이 남겨진 선택지였다.
부서진 체제를 정비하며 과거의 정보를 주워모았다. KPSA의 소년병. 인혁련의 강화인간. 테러의 희생자. 과거에도 접했던 정보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동료들은 목숨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헤쳐나왔음을 알았다. 자신에게도 그들과 같은 과거가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남겨진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겪은 상실을 어떻게 메꾸어나가는지 알지 못했다. 잊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저 순간에 매달리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앞으로.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다. 타인과의 대화. 웃음. 배려. 그 중심에는 그에게 배웠던 것들이 있었다. 4년의 세월동안 과거의 자신이 녹슬어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을 완전하게 객관화시켜 보던 습관은 차츰 엷어져 결국 사라졌다. 중심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앞길을 제시해주던 그녀가 사라진 이상 스스로 길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걸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고 문득 생각했다. 기호화되고 정형화된 완전한 답을 구하던 버릇도 잊었다. 그에게서 배운 감정들만이 그 빈자리를 메꾸듯이 불어났다.
세츠나의 곁에 서서 함께 돌아온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그와 같은 목소리를 한 남자였다. 기계적인 연산은 그를 록온의 자리에 놓았다. 그는 사라진 남자를 대신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동료들과 함께할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을 수치로 환산한 시스템은 빠진 자리가 메워졌음을 알렸다. 마치 처음부터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양 임무는 속행되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받은 감정들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그의 대신이 될 수 없다고. 이름없는 감정들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근원을 알았을 때 불안하던 감정은 그의 환영을 보며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 것은 그 때 그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정해진 길이 없어도 자신은 4년의 세월동안 '티에리아 아데'를 만들어왔다. 보통의 사람들과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록온은 자신에게 무작정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앞으로 나아가.
그 것은 그가 건 주문이었을까. 자신이 만든 길이었을까. 이따금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감정이 채운 마음은 과거처럼 완벽한 것은 될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는 여전히 빈 채 자신 안에 남아있었고 물의 표면이 떨리듯 사건 속에서 마음은 흔들리고 떨렸다. 그런 자신을 다독이고 일으켜 세울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똑같이 불완전한 인간이었던 그를. 그도 이와 같은 마음을 짊어진 채 자신에게 빛을 알려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수한 별의 바다는 여전히 아찔할 만큼 드넓게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영원같은 그 풍경 속에서 그를 떠올렸다. 순간을 살아가. 멋대로여도 좋으니까.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불완전한 채로도 완전해질 수 있다. 남자는 그렇게 여기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여기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이유도 짊어지고 있었다.
fin.
17. 目眩を覚えるような空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하늘) / ポロメリア
록티다운 록티를 쓰고 싶었던 거 아니었냐..orz 티에야.. 니가 너무 남자다워서 그런 거냐 나도 록티좀 쓰자 얘야..orz 이거 록온을 족쳐야되는 거니? 그런거니?ㅠㅠㅠ
제 안의 티에리아는 이렇습니다. 록온을 잃어버린 상실도 짊어지고 이것도 저것도 다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가기로 결정한 아이. 그게 옳은 길인지 망설일 때도 있지만 명확한 답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록온이 보여준 인간에게는 수치화 된 대답이 적용되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