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에 임용고시 패스했을 때 집안에서는 경사가 났다. 엄마 생일날 장미꽃 마흔 여섯송이를 사온 다음 날 창피한다고 회사에 안 갔던 아버지가 술에 얼큰하게 취해 베란다에다 대고 "우리 딸 만세!!"를 고래고래 외쳤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그 후에도 창피한 줄 모르고 아버지는 헤실헤실 웃어가며 우리 딸이 만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교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아무리 취업이 어렵다지만 그건 좀 오바라고 말려도 들어먹질 않았다. 술자리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했더니, 상현 선배는 곰같이 푸후후후훗하고 웃다가 사례들려 콜록거렸다. 한심한 꼴을 지켜보다가 나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밌수?"
"좋은 아버지시잖냐."
"선배가 윗층 아주머니한테 손 붙잡힌 채 '만대일이라며, 우리 딸 과외좀~'소리 들어봐. 그 말 나오나."
"으하하하!!"
"진정해, 쫌. 나잇값좀 하라니까."
술에 얼큰하게 취한 선배는 아이처럼 머리를 긁적대고 웃었다. 네 살 연하의 후배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도 화 한번 내지 않는 게 그다웠다.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선배는 복학생이었다. 부스스하게 자란 머리를 긁적이며 동아리 방으로 들어온 곰같은 사람을 보는 순간 무덤덤하던 고학번선배부터 깐깐하던 회장언니까지 죄다 일어나 반색을 하는 바람에 나는 소개도 못받을 뻔했다. [어, 신입생이세요?] 벙글 웃는 그 사람좋은 얼굴에 순간 나는 멋도 모르고 고개를 꾸닥하며 뱃속부터 뻗어나오는 발성으로 [네!!]를 외쳤다. 쩌렁쩌렁 울린 소리에 동방은 한 순간 얼어붙었고 그 후에 나는.. 빌어먹을, 새침떼기 도시여자에서 군대못간 막내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기사 그 후에 동방사람들이랑 친해졌으니 상현선배 덕분이라면 덕분이기라도 했지.
"잉, 화났어?"
"됐어, 추억의 과거를 반추하다가 열받은 거니까."
"어, 뭐가?"
"선배만 아니었어도 나 비싼 여자였거든?"
"응?"
"됐어."
눈을 껌벅대는 선배에게 한마디를 쏘아붙이고 소주잔을 들이켰다. 남자와 단둘이 술 마시는 걸 알면 아버지는 기절하겠지만 이 남자만은 예외였다. 복학생은 죄다 짐승이니 조심하라고 눈을 부릅뜨던 사촌언니가 무색하게 상현 선배는 신입생들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몇번 경계하던 나도 어려운 거 있으면 말하라며 곰같이 웃던 얼굴에 그만 넘어가 자주 문자를 주고받게 됐다. 도움을 줄망정 작업은 안 걸어대는 남자였으니, 오죽하면 살아있는 돌부처로 불렸을꼬. 그런 사람이니까 졸업한 후에도 계속 연락하는 거겠지만. 탁자 위로 푸쉬쉬 쓰러진 돌부처는 술기운에 빨개진 얼굴로 헤벌레 웃었다.
"어쨌든 축하해, 후배님. 이제 교사일 하는 거야?"
"내년부터."
"어디?"
"모교는 아니고 같은 지역 남고야. 운 좋지 뭐. 멀리도 안 가고."
"내 직장이랑은 머네.."
"선배 직장이랑 가까운 곳에 고등학교가 있기는 해? 애초에 가까울 필요도 없고."
본의아니게 쏘아대듯 말하자 선배는 혼난 곰같은 얼굴로 울상이 됐다. 이 화상. 빈 술잔을 채워주며 나는 애를 타이르는 엄마같은 심정이 돼서 말했다.
"그리고 선배도 좀 후배들 그만 챙기고 얼른 좋은 사람 만나야지 않아? 미연 언니랑 헤어진 게 몇년인데 여직 여친이 없나그래?"
"성은이랑은 이미 그냥 친구 관계거든? 나 솔로인 거랑은 상관없어."
"그래서 친구는 많고 연인은 없으시다?"
"어쩌겠냐, 좋아하는 여자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 있긴 했어?!"
푸념조로 말한 선배의 말에 나는 술집에 쩌렁쩌렁 울릴만한 소리로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현선배는 한심하다는 듯이 올려봤고, 나는 주위에 꾸벅꾸벅 사과하고는 홍시가 되서 자리에 앉았다. 키득거리는 상현 선배를 한번 째려봐주고 작게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 진짜있어?! 누구?"
"연하라서 고백하기가 어렵더라고."
"누구? 민아? 은진이? 아님 유정언니?"
"어, 음. 어... 좀 능력이 좋아. 얼마전에 고시 패스했거든."
"우와! 진짜? 세상에, 동기중에 그런 애가 있-"
거기까지 말하다가 나는 말을 멈췄다. 상현선배는 귀까지 벌겋게 익어서 아예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알기로 내 동기, 혹은 선배중에 고시 준비하는 사람은 세 명밖에 없었다. 통과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까,
나 빼고.
"...네?"
"그니까, 저기, ...좋아합니다."
탁자에 처박은 돌부처 곰의 입에서 우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떨지 안봐도 훤했다. 떡 벌어진 입이야 둘째치고, 화끈화끈한 뺨은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있겠지. 문득 이 사람이 고개도 못드는 성격인게 엄청나게 고마웠다.
"쌤--- 남친 있어요?!"
"쌤!!! 연하 관심없어요?!"
"시끄러!!! 닥치고 책 편다, 실시!"
남고의 학생들은 좋은 의미로는 활기찼고 나쁜 의미로는 폭주마였다. 학교 담 도랑타넘기와 철봉에다 공 쏴대는 걸 예사로 아는 혈기왕성한 녀석들을 책상머리에 앉혀놓는 건 더럽게 힘들었다. 하물며 지난 6교시에 눈이 쏟아지는 바람에 세상에서 눈을 가장 좋아한다는 생물 둘 중 하나로 꼽히는 고딩들은 흥분상태가 하늘을 찔렀다. 지휘봉으로 탁상을 두드려도 좀체 가라앉지 않는 녀석들을 사납게 째려봐주고 나는 교재로 시선을 돌렸다. 12월이니 네가 읽으라 하고 찍은 12번은 그제서야 교과서를 책상에서 꺼냈다. 종친게 언젠데 이제 책을 꺼내냐고 노려봐주자 녀석은 본인도 찔끔했는지 낭랑하게 문단을 읽어내려갔다. 애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난방이 세다는 핑계를 대며 창문을 열었다. 방금 전 쏟아지던 눈은 보송보송하게 내리는 함박눈으로 바뀌어있었다. 춥다고 우우우 거리던 애들도 창문가에서 살랑 들어오는 눈에 시선을 빼앗겼는지 금방 조용해졌다. 싸늘해진 손끝을 호호불며 나는 창가에 서서 풍경을 만끽했다. 사실 오늘은 보충수업도 없는 날이라 끝나고 약속이 잡혀있는 만큼 나도 좀 들떠있었다.
"어? 저 사람 뭐야?"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랑 시선이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도 쪼끔 더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낭랑하게 읽는 12번 옆자리에 앉은 남자애가 그 소리를 하는 순간 먼 곳을 보던 내 시야는 운동장으로 내려박혔다. 동시에 반 애들의 시선도 쏟아졌다. 애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파닥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경악으로 입을 떡벌렸다. 6시에 시내에서 만나기로 한 커다란 곰은 헤헤 웃으며 V자를 그렸다. 저 인간이 뭐하는 짓이야-까지 생각했을 때, 상현 선배는 교내를 쩌렁쩌렁 울릴만한 크기로 소리질렀다.
"사랑한다!!!!"
...오오오오오!!!!!!!!!!!!!!
..잠시 후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아이들이 야유의 환성을 질렀다. 다른 교실의 창문도 연달아 드르륵 열리는 것을 보고 나는 그만 얼굴이 빨개져서 손에 들고 있던 분필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분필은 상현 선배에게 정통으로 맞았고, 그 건 또다른 환성을 불러왔다. 전교생의 시선이 집중된 창문가에서 나는 불타는 고구마가 된 채 푹 주저앉았다.
"..차라리 만대일이 나았어..."
귀까지 빨개져 중얼거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좋은 곰은 헤헤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fin.
모처에서 해치운 연성 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