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떨려서 놓치는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될 정도로 무거웠다. 그런데도 그 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했다. 그 무게로, 그 예리함으로 무엇이든지 베어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냐."
푸르게 시린 검날에 목을 들이대고, 여인은 달빛처럼 웃었다. 그 달빛을 머금은 검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무심코 입술을 깨문 비담을 곁눈질로 보고 미실은 가늘게 눈을 휘었다.
"이리 늦어지는 것이 이로우리라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당신께서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채근하는 듯한 여인의 말에 이어진 비담의 목소리는 쥐어짜내듯 연약했다. 미실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가채 위로 수없이 꽂은 은백색의 떨잠이 가는 소리를 흘렸다. 연꽃색의 귀걸이가 투명음을 냈다. 목에 걸린 날조차 그 장신구인양, 미실의 모습에는 흠이 없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혀끝으로 밀어내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번도 걱정해본 적은 없다."
"..."
미실은 고개를 돌려 비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표정없이 다만 얼음처럼 차갑고 달빛처럼 무색한 그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할 수 없었다. 녹아내린 얼음처럼 고고한 얼굴로,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등 뒤를 돌아보고, 발 밑을 내려다 본 적이 있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 뒤에는 독사가 한 마리 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 말 그대로의 의미다."
여인의 목소리는 착각조차 일게 했다. 자신과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을 허상으로 지울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서늘한 독을 품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발끝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떠밀리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 비담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는 애원의 빛이 섞여들었다.
"새주."
"그 독을 풀어 사람을 모으고,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뱀이다. 그 독니로 사람을 죽이고, 왕을 죽이고, 천하를- 물어삼키는 뱀이다."
"..."
"그 뱀이, 네 발치에 매여있다."
미실이 고개를 들어 비담을 똑바로 응시했다. 경국지색으로 군림해온 여인의 기품있는 몸짓은 과연 홀릴 듯이 아름다웠다. 허리를 꼿꼿히 세운 뱀처럼 매끄럽고 서늘한 미소였다.
"왜 그런지 아느냐."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너도 같은 뱀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저은 비담의 목소리를 비웃듯이, 미실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강했다. 입술을 깨문 비담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졌다. 그를 보며 미실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익히 수많은 자를 홀려온 독기서린 미소였다.
"같은 독을 만들어내고, 같은 탐욕을 갖고 있는 뱀이다. -모르겠느냐."
"나는 당신과는 다릅니다."
입술을 깨물며 쏘아붙인 말에 그녀는 달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차르릉. 달 아래에서 빛에 흠뻑 젖은 비녀가 다시 소리를 냈다. 고요하고도 선명한 음색이 베어 비담의 가슴을 찢었다.
"아니, 아니다. 너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네 검에 배인 핏자국을 안다. 이 미실이 어찌 그 것을 모르겠느냐."
비담의 떨리는 말을 지워버리듯 길게 이어지는 미실의 목소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달았다. 그에 미혹되듯 손에 들린 검이 흔들렸다. 여인은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사락하는 소리가 날 것처럼 길고 짙은 눈썹끝에 서늘한 빛이 맺혔다. 내리깐 눈동자가 처음으로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네가 해온 것들을, 나도 했었는데."
고개숙인 여인의 목소리에, 전과는 다른 색이 배어나왔다. 비담은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옥좌에 앉은 여인은 눈을 들어 아들을 응시했다. 한 개의 가면을 벗어던진 듯한 그녀의 얼굴에서 짙은 빛이 피어올랐다.
"진흥대제는 어린 미실의 주인이고 주군이었다. -내가 너와 달랐겠느냐. 조금이라도 틀렸겠느냐. 나는 그 분의 곁에 있었다. 그 분을 위해 독을 품었다. 화랑 원화로서, 폐하의 인첩으로서, -그리고 그 분의 검으로서,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 마음이, 덕만을 보는 너와 같았다. 한 치도 틀리지 않고 그렇게 같았다. 그 마음으로 이 나라를 만들고, 이 나라를 지켰느니라."
말문이 막힌 비담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웃었다. 꽃이 피어나는 듯한 색채였다.
"-그 마음을 가진 내가, 너를 모를까."
"..그리 아시는 분이,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왜."
"당연한 것을 묻지 마라. 나는 너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
말이 되지 못하고 흩어진 목소리가 꽃잎처럼 졌다. 비담의 눈가가 붉어졌다. 소년처럼 그는 말끝을 더듬었다. 미실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버린 아이를 스쳐, 여인의 시선은 먼 곳에 닿았다.
"진흥대제를 보내고, 이 신국만이 나에게 남았다. 내가 품은 독으로 지키고, 아끼고, 사랑할 이 나라만이 내게 남았다. 그러니 누가 나를 막겠느냐. -누가 감히, 이 미실을 부정하겠느냐."
"...덕만이 있습니다."
"그래, 네 주인이 있다. 덕만이 있지. 계양자의 주인이고 대의를 품은 덕만이 이 미실을 막았느니라."
흐려지는 시야를 흩어내려 애쓰며 비담은 힘겹게 미실의 목소리를 부정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뱀은 결코 닿지 못할 긴 세월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독을 품은 여인은 웃었다.
"그러나 덕만이 제 아무리 찬란한들, 네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공주님을 따라갈 겁니다."
"공주, 공주. ..허나 비담. 너도 나와 같지 않느냐."
미실은 비담의 말을 못들은 채 말을 이었다. 서늘한 미소를 몸에 두른 여인은 섬섬옥수를 들었다. 흠칫 경계하는 비담의 몸짓에 따라 여인의 목께에 들이댄 검에 횡랑한 음색이 실렸다. 그녀는 눈썹 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회장 가장 윗 석에 앉은 것이라도 되는 양 우아한 자태으로 손을 뻗었다. 달빛처럼 처연히, 그녀는 속삭였다.
"너도 나와 같은 뱀이다."
고요한 목소리는 날이 선 칼날처럼 차가웠다. 응어리진 피가 까칠하게 맺힌 비담의 뺨 위로 그 손가락은 음율을 울리듯 스쳤다. 눈부시게 곱고 가녀린 여인의 손가락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비담은 단검에 찔린 것마냥 몸을 움츠렸다. 미실이 눈가를 곱게 휘었다. 그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정한 여인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떨렸다.
"-참으로 닮은, 모자간이 아니냐."
자신을 곱씹듯한 흐려진 목소리에 비담은 기어코 검을 든 손을 떨구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잡고 비담은 뒤로 두어걸음 물러섰다. 옥좌 위에 앉은 여인은 독을 품은 입술로 제 눈물을 억눌렀다.
"독사가 양지의 꽃을 동정한다고 해서, 그 꽃이 너의 것이 되어주겠느냐."
"미실."
"너는 나를 몰랐어야했다. 알아서는 아니 되었다. 나를 안 너를, 네 주인은 품어줄 수 있겠느냐."
손끝으로 어루만진 감촉을 끌어안으려는 양 미실은 움켜쥔 손을 소매속으로 가렸다. 떨리는 음성이 짙었다. 처연한 음성이 젖어들었다. 긴 세월을 살아온 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제 감정을 억눌렀다.
"..하물며 이제, 네 뒤에 죽은 뱀의 시체가 매달려갈 터인데."
미실의 손이 닿은 자리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비담은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미실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오랜 세월 동안 고개를 치켜들고 제 자리를 지켜온 독사의 그림자가 없었다. 그녀는 가여운 것을 보는 여인처럼, 자식을 보는 어미처럼 비담을 응시했다. 입꼬리를 올린 그녀의 일그러진 웃음 위로 떨리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내 이름이 너를 누를 시체가 되겠구나."
"어머.."
"너는, 나에게 와서는 아니되었다."
"그럼 원망할까요. 저주할까요."
비담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렸다. 여인을 응시하는 사내의 눈가가 젖은 열을 내었다. 깊은 한을 토해내는 목소리가 처절했다.
"나를 낳은 게 당신인 것을, 나보고 이 이상 절망하라는 겁니까?"
"-착각,하지 말아라. 너에게 어머니로 있었던 적은 없다."
고운 두 손을 모으고, 여인은 상처입은 아들을 보듬어주는 것을 거부했다. 아름다운 옷자락을 다시 가다듬고, 그녀는 언제나 그래왔듯 깊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으로 궁에 들어오던 날도, 처음으로 검을 쥐었던 날도, 처음으로 사내와 동침하던 날도, 처음으로 야망을 품었던 날에도, 난으로 뛰어들던 날도 그랬듯이, 침착한 호흡이었다. 그 숨을 모아 미실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독사의 시신을 짊어지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그러니."
미소지은 여인의 볼 위로 눈물 한방울이 타고 흘렀다. 비담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여인에 대한 원망이, 증오가, 연민이, -애정이 스민 눈물이었다. 미실은 그 얼굴을 외면했다. 일그러진 뺨 위로 흐르는 제 눈물을 미처 닦아내지도 못한 채, 그녀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네가, 이 미실의 최후를 보거라."
울음에 묻히면서도 그녀의 어조에는 한치의 망설입도 없었다. 고개를 떨군 비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실은 그런 비담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탁자 위에 놓인 검은 자기그릇을 집어들었다. 세상 모든 어두운 빛을 모아둔 듯 어두운 그 그릇을 들어, 미실은 천천히 그 것을 모두 들이켰다. 그녀의 심장 깊은 곳까지 독은 흘러가 닿았다. 그녀가 품은 독의 깊이까지 스밀 듯이, 미실의 숨소리 속으로 짙은 독이 섞여들어갔다.
-여인의 숨소리가 끊어지는 순간, 어린 뱀은 기어코 쓰러져 오열했다.
fin.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저는 미실과 비담의 관계가 좋습니다.
같은 독을 품고 서로 다른 곳을 보며, 필요하다면 물어뜯는 것도 서슴치 않겠지만
그 꼬리 끝이 서로 묶여있는 두 마리의 뱀. 한마리는 양지를 동경하고, 한마리는 야망을 품었다는 것이 차이.
원작에 떡실신 당할 거 아니까 되도록 빨리 쓰고 싶었는데 좀 늦었네요..orz
아니 이미 원작이 다 해먹으셔서 버릴까 생각했는데 그래도 올려봅니다.
아들에 대한 모진 모성,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것을 내비치지 않을 그녀의 애정, 혹은 독의 깊이.
닿을 듯이 스친 끝, 격한 마음, 끝내 표현하지 못한 어미의 애정.
시바 그래도 행복했겠지요, 남김없이 두고 가면서도.
...아아 전 역시 미실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