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23세기에 와서도 고풍스러움이 남아있는 런던의 거리를 좋아했다. 그녀의 말대로 런던의 거리에는 모든 것이 신식으로 가득 차버린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과거의 냄새가 났다. 저녁이 되면 베레모를 눌러쓴 청소부들은 전자동체제로 바뀐지 오래인 가스등에 기어올라가 촛대모양의 센서를 들이대서 불을 붙였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리가 어두워지는 일은 없었지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 거리에 묻어있는 옛 시대의 향수는 그렇게 잔잔히 남아있었다. 오래되고 불편한 것을 거부하지 않는 그 모습이 언젠가 시들어 떨어진 자신도 이 거리에 녹아들 수 있게 해줄 것같아 좋다고 했다. 다정한 것이 좋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그녀는 과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과거얼마 지나지 않아 옛 거리의 향이 좋다던 그녀는 영영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 조금만 더 풍요로웠다면 그 고풍스러운 의식을 보며 웃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를 잃은 후에 내 시야는 조금 흐려졌다. 그녀를 잃은 나는 과거에 젖은 그 거리에서 과거와 다를바 없는 일을 시작했다. 인류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사라질 일 없는 직업은 매일 먹고 살 식량과 잠들 지붕을 제공해주었다. 할렐루야. 혀끝으로 내뱉은 신의 이름은 쓰디쓴 맛이 났다.
그 날은 유독 안개가 짙은 조용한 밤이었다. 마땅한 손님을 잡지 못해 헤메던 나는 술 취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혔다. 행인은 피해가는 대신에 런던의 자랑인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창녀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거세게 밀쳐 나동그라졌을 때 등을 세개 부딪혔다.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같았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남자의 큰 입이 뭐라고 소리지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가 팔을 움켜쥐었다.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나를 때리려던 손을 잡은 것은 기적같아서, 오히려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가씨를 때리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남자의 손을 붙잡은 그는 서두를 것도 없다는 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크게 울리지는 않았지만 얼음처럼 차가웠다. 얼굴이 붉어진 술취한 행인은 나를 움켜쥔 손을 놓았다. 자신에게 팔을 휘두르는 취객을 그는 간단하게 팔을 후려쳐 떨쳐냈다. 취객의 워렁워렁 울리는 비명이 안개 낀 거리를 뒤덮었다. 남자는 손을 들어 거리 반대쪽을 가르켰다. 가. 경찰을 부를까?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으나 의지만은 더없이 차가웠다. 빨간 호박처럼 부풀어오른 얼굴을 하고 취객은 뭐라고 욕설을 토하며 어기적어기적 멀어져갔다. 안개가 그의 모습을 먹어치운 후에, 남자는 나를 보았다.
"괜찮아, 아가씨?"
"..저기..."
"이런 시간에 큰 소리가 나길래 깜짝 놀랐지 뭐야."
"괘..괜찮아요."
"이런 시간에 나다니면 안되죠."
당황해서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핀잔을 주었다. 마주친 청록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미소지은 남자의 얼굴에서는 방금전 보았던 차가운 인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나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손을 뻗어주었다.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다가 등이 아파 작게 소리질렀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축했다.
"다친 거야?"
"밀쳐졌을 때 약간.. 괜찮아요, 가서 치료하면 되니까."
"병원이라면 같이 가줄까?"
"아니요."
친절한 남자의 말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ID카드가 없거든요."
남자의 눈이 살짝 놀라움으로 커졌다. 유니온의 복지 시스템은 국민 전원을 커버하고 있다고 미디어에서는 시끄럽게 말해대지만, 실상이란 이런 것이다. 사회에 기록도 되어있지 않은 비참한 사람들은 안개로 흐려진 거리 너머 어디에나 있다.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다른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같아, 조금 비참한 기분이 되곤 했었는데. 남자의 눈이 너무도 맑은 탓이다. 이상하게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그거 우연이네.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은 나도 ID카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못되거든."
"네..?"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레였다. 남자가 선뜻 내뱉은 말은 도저히 그 본인과는 겹쳐져지 않았다. 깔끔하고 좋은 옷에 귀티가 흐르는 외모는 어딜봐도 사회 뒷자락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검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 위로 가져갔다. 쉬잇.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그가 말한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는 나를 바라보았다. 입가를 누르며 웃음을 그치고, 나는 겨우겨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상처 치료라면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
"..하지만 집까지 돌아가는 건 좀 무섭네요."
"그러면.."
"데려다주시겠어요?"
무슨 의미인지는 그도 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노골적인 대화에 익숙해져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여겨질만큼 자신의 유혹은 정중했다. 안개로 덮인 옛 시절의 추억들이 남은 그 거리에서,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갈색 코트에 몸을 감싸고 고수머리를 어깨에 늘어트린 남자의 모습에는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숙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신사처럼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안개의 거리에서 홀연히 나타난 코트의 신사.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이 비현실적인 풍경에 저항은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등에 남은 둔통이 한번 더 몸부림쳤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잡았을 때야, 겨우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났다.
"..고마워요."
입술에 스미는 듯한 그 한마디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그는 다정하게 웃어보이고는, 손 위에 겹쳐진 손등 위에 정중히 입맞춤을 남겼다.
거리 외각의 좁은 샛길을 한참이나 들어간 곳에 내가 머무는 집이 있었다. 한 때는 그녀와 함께 머물렀던 집이었다. 한 때 그녀는 23세기에 남은 이 19세기의 건물을 무척 좋아했다. 낡은 수도관이 있고, 그보다 더 낡은 욕조가 있고, 주저앉은 매트리스가 있는 이 방을. 아마 나도 그랬었다. 장사를 위해 침대의 매트리스를 바꾼 것 외에 이 집은 그녀가 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회색빛 안개 속에서 듣기 싫은 경첩음을 내며 열린 문을 그는 소년같은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침대에 주저앉아 옷의 버클을 풀어내리고 드러낸 등을 보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장갑을 벗었다. 이제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곁눈질로 본 그의 하얀 손가락은 무언가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손가락으로 그는 선반 구석에서 가져온 약을 발라주었다. 조용히 움직이는 그 손가락은 추호의 흑심도 없이, 다만 누이를 대하는 오빠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어쩌면 그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 그 손가락을 한사코 붙잡은 것은 자신이었다. 상처 위에 거즈와 반창고를 붙이고 멀어지려는 손을 붙잡았다. 하얀 손은 차갑고 옅은 약품냄새가 났다. 그 손을 끌어 당겨 뺨에 가져다대었다. 입모양으로만 중얼거린 자신의 말이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의 손은, 몸짓은,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상냥했다. 겪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다정했다. 벗은 옷과 허리 아래의 시트에는 눅진한 열과 습기가 들러붙었는데도 안고 있는 남자의 손은 어디까지나 서늘했다. 가을의 내리는 비처럼 선선하고 여름밤의 바람처럼 차가웠다. 그 마르고 선선한 감촉이 어딘지 모르게 그리워서, 슬퍼서, 그를 끌어안은 나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모를 감정 속에서 헤메고 있는 여자를 보고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곤란한 듯 웃은 남자는 또다시 정중한 입맞춤을 남겼다. 이번에는 입술 위에. 스치기만 한 그 감촉역시 차갑고, 서늘했다.
..상냥했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진부한 한마디다. 침대위에 길게 드러누운 나는 곁에 누운 남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정사 후의 남녀라기보다는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된 친구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는 조금 멋쩍어보이는- 아니 곤란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할 필요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또다시 웃었다.
"아프지는 않았어?"
"설마요. 직업이에요."
"아니, 등."
"괜찮았어요. 상냥하게 해주셨으니까."
여전히 서로의 몸에는 가까워지지 않은 채 나란히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캄캄하게 젖어있는 천장은 그저 고요했다. 안개로 뒤덮인 그 거리가 하얗게 흐려질 것같았던 것처럼, 이 곳에 스민 밤에도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무언가가 조용히 떠돌고 있었다. 그 밤의 적막 속에서 띄엄띄엄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가족은 없었어요, 라든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 같은. 의미 없이 이어지는 그 말들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 질답만이 계속 반복되고 이 밤이 끊이지 않을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름이 뭐야?"
"..앨리스에요."
질문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척이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물어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그녀의 이야기.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실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원래는 제 이름이 아니었어요."
"누구의 이름이었는데?"
"제 쌍둥이 자매요."
앨리스. 사랑스러운 나의 언니. 바구니째로 버려진 쌍둥이 사생아의 흔해빠진 이야기중에서, 일찌감치 염세주의에 물든 여동생이 사랑할 수 있었던 단 한 명은 그녀였다. 다정하고, 세상을 부드러운 눈으로 보고, 꿈같은 이야기를 좋아했던 나의 언니.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했던 언니를 정말로 좋아했다.
"저를 버리고 떠났어요."
그녀가 왜 이 곳을 벗어났는지, 왜 나를 두고 갔는지 내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숨겨야할 사실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무엇하나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언제나 생활 속의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 들려주던 나의 언니. 순수한 세상을 즐겁게 이야기하는 한켠에서 그녀는 다른 것들을 보고 있었던 걸까.
"괴로웠어?"
"모르겠어요. 그저"
"그저?"
"..언니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를 떠나기 전, 우리가 함께했던 마지막 날에 나와 나란히 누웠던 앨리스는 입속말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피로에 지친 나는 앨리스의 한마디를 듣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들어야지. 잠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를 미워했던 걸까, 뭔가 견딜 수 없던 게 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져서."
"앨리스."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정말 좋아하는 내 언니였는데."
"..앨.."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기억이 쏟아져내려와 뺨을 타고 흘렀다. 소중했던 사람이 나를 떠나고 둘이었던 우리들은 하나가 되버렸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상냥하고 다정했던 그녀는 멀리 떠났다. 그녀가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하나 가르쳐주지 않은 채 영영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은 여기 남아있었다. 언니가 사라진 이 거리에서, 길을 잃은 미아처럼.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앨리스를 찾고 있었다. 울음을 억눌렀다. 남자가 터져나오는 것처럼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닐 디란디."
"..예?"
"내 이름이야. 닐 디란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름을 되새기듯이 한번 더 반복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눈가가 젖어든 게 아니냐고 순간 착각에 빠질만큼 그 이름을 입에 담는 남자의 얼굴에는 애잔함이 스며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응시하며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ID카드를 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했지?"
"아..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거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정확히는 고요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을 한 조각 잘라낸 것같은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상하게 납득하는 자신이 있었다. 장갑 아래의 하얀 손가락과, 서늘한 체온과, 안개 속에서의 그 모습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 순간에 명확해졌다.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빨갛게 부은 눈가를 누르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저는 죽은 사람과 하룻밤을 보낸 게 되나요?"
"그렇게 되나? 별로 좋은 게 아닌 것같아 미안한데.."
"괜찮아요. 행복한 밤이었으니까."
그는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머뭇, 처음으로 사람에게 닿는 것처럼 그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뺨을 가볍게 스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손가락은 조심스럽게 젖은 눈가를 닦아주었다. 눈을 떴을 때, 남자는 모로 누워 친근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여동생을 보는 듯한 다정한 시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그의 부드러운 위로가 고마웠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나는 그저 머뭇거리다가 그 손가락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뼈마디가 불거진 새하얀 손가락은 다정한 남자의 것이었다. 어깨를 움츠렸던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게도 쌍둥이 형제가 있어.
단지 그 것뿐이었다. 그 한마디를 입안에 품듯이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내리깐 시선으로 먼 곳을 떠올리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양 웃었다. 안타까워보이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것처럼도 보이는 미소였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있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 것도 눈물이 만든 착각일까. 아니면 그도 열을 냈었을까. 울었던 걸까. 그런데 왜 그렇게도 닿았던 그의 피부는 서늘했던 걸까. 문득 손을 뻗어 그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행에 옮길 용기는 없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 울음으로 달라올랐던 뺨 위에 닿은 그의 서늘한 손가락이 상냥했다. 그 감촉만을 기억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가 떠나갔다고 놀라거나 원망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납득하는 자신이 있었다. 몸을 일으켜 시트 아래에 떨어진 옷을 주워입었다. 그대로 시트 위에 주저앉아 창밖에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갠 하늘 아래에 남은 고풍스러운 과거의 거리는 어제의 생기를 잊을 듯이 침묵하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바래는 오래된 벽돌들은 안개가 스미는 날에만 그들이 품은 기억을 쏟아낸다고, 언젠가 앨리스가 즐거운 듯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고 떠난 것은 무슨 말이었을까. 애정어린 작별인사, 혹은 저주의 말.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그 목소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떠나간 나의 언니는 그렇게 영원히 입을 다문 채 돌아보지 않으리라.
그러니 나는, 아름다웠던 당신만을 기억할래.
기억 속의 언니는 내 거니까.
그렇지, 앨리스.
언니는 어차피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을 거잖아. 변명하듯 덧붙인 말에 기억 속의 언니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햇살 아래서 침묵한 이 거리처럼. 나는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와 이야기했던 어젯밤에 떠나간 나의 언니는 기억 속에 다시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문득 자신과 닮아있었던 어젯밤의 남자를 다시 떠올렸다. 아름답고 다정하고, 환상처럼 덧없는 상대였다. 허리에 남은 타박상과 어제의 흔적이 남은 침대가 아니라면 꿈이라고 생각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닐 디란디.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남자의 이름은 따스한 내음이 났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덜 가신 거리를 빠져나오자 예상했던 대로 그는 거기에 있었다. 표정변화가 적은 동료였지만 함께 해온 역사가 있으니 만큼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 저러니 귀여운 데도 있다니까.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상대는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샅샅히 쳐다보고서야 동료는 겨우 안심한 듯 이름을 불렀다.
"..록온 스트라토스."
"여어, 세츠나. 기다렸어?"
"어딜 갔었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책망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합류 시간을 다섯시간 정도 늦은 데다 내내 연락두절이었던 록온으로서는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나마 추궁조로 물으면서도 그래도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세츠나답다면 세츠나다웠다고 할까. 록온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여러가지로."
"무슨.."
"시간 엄수 못한 건 나중에 갚을 테니까 지금은 좀 봐주라, 세츠나."
"-록온."
손을 모으며 장난스럽게 웃어버리고, 세츠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록온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충동적인 하룻밤이었고, 거짓말같은 하룻밤이었다. 엄한 동정을 할 여유는 자신한테 없었을 텐데.생각에 꽉 찬 머리 때문에 무방비해진 탓에, 세츠나가 팔을 잡아챘을 때 록온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우왓! 세츠나! 위험하잖아."
"무슨 일이 있었나."
"별로."
"말해라."
가라앉아있지만 결코 물러날 기색이 없는 눈을 응시하다가, 록온은 졌다는 듯 쓰게 웃었다.
"-과거를 만나고 왔어."
"..과거?"
"응. 과거."
천천히 발음하는 단어가 생소했다. 세츠나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번지는 것을 록온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큰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감정표현이 적은 동료의 이런 반응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아마도 한참 전. 처음 만났을 때.
"-라일 디란디."
친구들과 어울려갔던 펍에서, 우유를 마시고 있던 그도 지금같은 얼굴을 했었다.
걱정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록온은- 라일 디란디는 설풋 웃음을 터트렸다.
"록온이라고 부르라니까."
장난스럽게 말하며 동료의 어깨를 쳤다. 한번도 그를 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감정표현에 서툰 그 얼굴을 바라보자니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갔다. 그가 좀 더 어릴 때였고, 좀 더 그를 아이취급할만한 나이에 만났더라면 자신도 짤없이 그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기사, 내가 형이 아닌 마당에 그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은 없겠지만.
안개의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입에 담았던 이름,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그의 몸짓. 자신 안에 남아있었던 '닐 디란디'를 전부 꺼내놓았다. 웃음. 몸짓. 목소리. 행동. 재대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지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그를 기억했다. 그 흐릿하게,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같은 젖은 공기 위로 숨을 토해내듯이, 그의 기억을 쏟아내었다. 옳은 건지, 그렇지 않은지도 알지 못한 채.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어쩌면 자신도 같이 울 수 있었다. 울음을 터트린 그녀의 모습 위로 겹쳐진 것은, 아마도 자신의 얼굴이었다. 연민에 차 안아줄 수 있을 만큼은 가까운, 그런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닐.
형은 어떤 심정으로.
어떤 심정으로, 나를.
..아니 묻지는 않을 거지만.
라일은 구태여 울음을 터트린 그녀의 너머로 보였던 물음을 자신에게 다시 던지지는 않았다. 한걸음 앞서 나간 거리는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라일 디란디는 엊저녁부터 온종일 자신을 메우고 있었던 그의 이름을 다시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