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여동생이 친구 집에 놀러간다며 들뜬 걸음으로 밖으로 나간 건 고작 한 시간 전이었다. 나갔을 때의 신난 얼굴은 간데없이 퉁퉁 부은 볼로 돌아온 여동생은 손윗형제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겠다는 양 입을 앙 다물고 소파에 웅크려 앉아있었다. 이건 무슨 시위냐며 라일은 좀 툴툴거렸고, 상대적으로 더 부드러운 편이던 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동생의 곁에 앉았다. 그러고도 닐의 말을 죄다 씹어삼키던 에이미 디란디가 입을 연 건 한참이나 후였다.
「오빠들, 나가버릴 거야?」
「뭔 소리야?」
「라일!」
라일은 즉각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되받아쳤고 닐은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처럼 눈을 치켜떴다. 같은 나이 또래라도 일단은 '형'인 탓에 라일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입이 댓발 튀어나와있음을 곁눈으로 흘리며 닐은 에이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에이미. 그게 무슨 뜻이야?」
「세실리아가 그랬어. 너네 오빠들도 나이 먹으면 다 나가버릴 거니까 자기랑 똑같아질 거라구.」
「하아?」
멍해진 닐 앞에서 에이미는 다시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고집 세보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해져있었다.
「세실리아면 그 맞은편 집에 사는 여자애지? 왜 그런 소리를 해?」
「..에밀리가 자기는 언니 있는데 세실리아는 혼자라고 그랬는데, 세실리아가 혼자가 좋다고 그래서, 나는 오빠들 있는게 좋다고 해갖구..」
띄엄띄엄말하는 어린아이의 말로 상황 파악하는 건 어른도 힘든 법이지만 닐과 라일은 진지한 얼굴로 주의깊게 듣고 캐어물어 정황을 파악했다. 상황인 즉슨 에이미의 새로 사귄 친구는 외동딸이었고, 다른 친구가 형제가 없어서 외롭겠네 투의 말을 했고, 발끈한 그 친구는 외동의 좋은 점에 대해 구구절절 토로했고, 가만히 듣고 있던 에이미는 그래도 오빠들이 있는게 좋다고 대꾸한 모양이었다. 이에 울컥한 그 애는 외친 모양이다. 독립하면 너도 어차피 혼자가 될 거라고. 거기까지 상황을 조합하는데는 반시간쯤 걸렸고, 어물어물 말하던 에이미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그 주근깨가..」
「라일! 뭐하려고?」
「그럼 가만 있으라고?」
「가만 있어.」
「닐은 왜..!」
「에이미가 먼저야.」
울컥해서 자리에서 뛰쳐나가려던 라일은 닐의 말에 짜증어린 얼굴로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소매자락으로 고개를 숙이려는 에이미의 눈가를 닦아주며 닐은 할 말을 찾느라 숨을 골랐다. 그 세실리아라는 아이의 굳이 말하면 틀린 것도 아니다. 자신이나 라일이나, 그리고 에이미도 나이가 들면 집을 나가게 될 거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엄마 아빠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닐은 엄마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에이미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팔로 에이미를 보듬어안은 채 닐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에이, 진짜.」
「라일? 어디 가!」
「안 가」
퉁퉁 부은 얼굴로 맞은 편에 앉아서 닐과 에이미를 번갈아가며 보던 라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일은 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방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일은 금방 방에서 튀어나왔다. 벙쪄서 바라보는 닐 앞에서 라일은 커다란 종이와 크레파스를 바닥에 떨구었다. 제 키만한 종이는 아버지가 일할 때 쓰는 전지였다. 저거 가지고 나오면 안될텐데.
「라일, 뭐하는 거야?」
「형은 보고 있어」
당황해서 뭐하냐고 물으려는 닐을 뿌리치고 바닥에 종이를 이불 펴듯이 탁탁 쳐서 펼친 라일은 크레파스를 쥐고 종이위를 기듯이 해서 커다란 선을 찍찍 그었다. 울음을 그친 에이미가 오빠가 하는 걸 눈을 크게 뜬 채 보고 있었다. 몇번 지나다니면서 뭔가 그린 라일은 신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됐다! 봐, 에이미」
「응?」
「이렇게 큰 집에서 살면 나나 형이 따로 안 나가도 되겠지?」
에이미는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까만 크레파스가 그려놓은 선은 영락없이 어린애 솜씨로 그려놓은 커다란 집이었다. 무릎이 얼룩덜룩해진 라일은 씨익 웃으며 에이미의 머리를 토닥였다.
「에이미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같이 있을 거야.」
종이 위에 그려진 집은 지붕 한쪽이 무너질 듯 하고 바닥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있지만 라일은 승리자라도 되는 양 의기양앙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토닥여준 오빠의 모습과 바닥의 종이를 번갈아가며 보던 에이미는 눈물 맺힌 눈으로 웃었다.
「라일 오빠, 그림 못 그리네」
「...불만있냐!」
「아니, 나도 좋아. 에이미도 여기서 살래.」
「그럼 니 방은 니가 그려, 이만큼 잘라줄게. 여기서 여기까지. 그리고 여기가 엄마아빠방. 여기가 닐방. 여기가 내 방.」
이어서 선을 그으면서 라일은 잘난척 중얼거렸다. 오빠가 내민 여분의 크레파스를 받아들고 에이미도 종이 위에 무릎을 웅크렸다. 그럼 난 레이스 달린 침대에서 잘 거야, 하고 기쁜 듯이 말한 에이미는 제 방을 분홍색 크레파스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럼 난 로봇 타워 만들 거다, 하며 그 옆에 앉던 라일은 아차 하고 닐을 올려다보았다.
「닐, 안 그려? 크레파스 줄게」
「...」
그거 아빠가 일할 때 쓰는 거잖아. 엄마가 아빠방에는 들어가지 말랬는데. 아니 너 지금 바지에 크레파스 다 묻었어. 이제 엄마한테 죽었다. 그리고 뭐야 저 집. 저렇게 찌그러진데서 어떻게 살아. 애초에 독립은 집 크기랑 상관없는 거 아냐? 머리 속을 맴도는 오만가지 말을 곱씹으며 닐은 눈 앞의 남동생을 바라보았다. 자기와 꼭 닮은 청록색의 빛나는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닐은 그만 피식 웃으며 크레파스를 받아들었다.
「..동생 주제에 니 방이 더 크다는 게 말이되냐, 선 다시 그어.」
「앗, 치사해! 형이면 다야?!」
「억울하면 늦게 나오든가」
라일과 자신의 방 사이에 선을 새로 긋자, 에이미가 옆에서 까르륵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부루퉁해진 동생의 항의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닐은 제 방에 들어갈 기관차세트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녹색 크레파스로 기관차를 칠하다가 닐은 슬며시 웃었다.
그 것도 좋겠다.
에이미랑 라일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같이 사는 거.
이따가 엄마아빠가 집에 오면 종이랑 크레파스를 보고 놀랄지도 모르고, 화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fin.
11. 寓話 (옛날 이야기) / 寓話
Cocco 30제를 하는 내내 우울한 글들만 써대는 것같아서 좀 호노보노하게 써봤습니다.
자폭하는 기분도 들긴 하지만 뭐..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