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이 떠났어요, 나인."
4가 다가와 침울하게 말했을 때, 나는 말의 의미를 얼른 알아듣지 못한 채 4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잔뜩 갈라져있는 4의 목소리는 그가 말한 내용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2만큼 기계 조정에 능숙하지 않았고, 4는 나만큼 쉽게 부품을 연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부서진 공장지대에서 집어온 부품들은 어딘가 부서져있거나 망가져있거나 했고, 한참 노력한 끝에 그는 3대신 목소리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멀리서 울리는 듯 지직거리는 합성음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나인?"
"어, 응. 응. 떠났다구. 잘됐네."
"나인."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나는 더듬더듬 단어를 주워섬겼다. 눈 앞에 4의 동그란 눈이 불쑥 들어와 덮었다. 그 시선이 걱정에 가득 차 있다는 걸 인지하기까지 조금 더 걸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은 것인지 깨닫는데에는 다시 또 얼마가 더 걸렸다. 간신히 떠올리고 나자 이번에는 울 것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4의 얼굴이 부옇게 흐려졌다. 빌어먹을. 나는 녹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럴리가 없다. 딸각대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천과 나무 손가락이 스치는 소리를 냈다. 걱정스러운 4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나인. 괜찮아요?"
"알아, 포. 내가 이상한 소리 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음. 신경쓰지마. 세븐은 잘 떠났어. 좋은 날씨잖아, 비도 오지 않는 날이었으니까, 아마.."
"나인!"
진정하고 말하려했던 말은 또다시 뒤섞이며 의미없는 문장이 되었다. 4가 반쯤 비명같이 소리쳤을 때서야-웅웅 울리는 소리는 진동관 내부에서 나오는 잡음같았다- 내가 또다시 실수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s,h,i,t. 부드럽게 꺾이는 T 발음이 혐오스러웠다. 언어기능은 멀쩡했다. 아마 두뇌기능도, 그리고 이 몸의 기계도. ...문제인 것은. 의식은 거기서 다시 한번 조각처럼 흩어졌다. 명확한 발음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해주지는 않았다. 허벅지 언저리에 새로 생긴 실밥자국 위에 달각거리며 떨리는 손가락을 쓱쓱 비볐다. 실밥자국위에 생긴 오일 얼룩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나는 줄어들 것같은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너도 알잖아, 포. 나는 세븐을 막을 수 없어. 세븐도 그렇고. ..우린 함께 있어도 별로 좋을 일이 없다고."
이번에는 재대로 말이 나왔다. 그게 정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진심이긴 했다. 끝으로 갈 수록 힘이 없어지던 목소리는 기어코 나를 내버려둔 채 멀리 기어들어가버렸고, 나는 어린아이를 상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야단맞은 어른이 된 심정이었다. 측은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4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린 함께 있어야죠."
4의 말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그와 3이 폐허 도서관에 살고 있었을 때만큼이나 오래되고 낡은 말이었다. 그 말이 아직 빛나고 있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쏟아지는 비를 기쁨에 차서 바라보았다. 그 말이 조금 의미를 잃었을 때 우리는 서로 끌어안는 것으로 온기를 되찾으려 노력했었다. 마침내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나자 우리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 말이 재가 되어 날아간 종이조각처럼 허무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그의 말을 소리내어 부인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할 때도 있는 거야."
"나인, 나는 대단한 걸 하라는 게 아니에요, -사과하세요. 세븐에게요."
"그걸로는 안돼."
"될 거에요."
"그녀와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뭐가요, 당신이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뿐이잖아요!!"
"그러는 너는! 네가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 그 천을 버릴 수 있냐고!"
저도 모르게 소리쳐놓고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로 얼룩진 4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사과의 말도 할 수 없었다. 10초 동안 내가 백만년 묵은 화석이 되어가는 동안에 4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서글픈 얼굴로 자신의 더러워진 푸른색 헝겊끝 자락을 잡아당겼다. 부스스하게 밝은 천은 금방 부스러질 것처럼 약해져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멀쩡했다. 두 장을 겹쳐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바느질한 그 두건은, 3의 유품이었다.
"미안해, 포. 그럴 생각이-"
"괜찮아요, 사실이니까."
어색한 사과의 말을 4는 굳은 얼굴로 잘라버렸다. 외관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세월은 그를 아이로 내버려두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세븐의 어깨 뒤에 숨었던 수줍은 많은 4였다면 이런 일을 하지 못했을 텐데. 혼자 남겨진 후에 그는 변했고, 자라버렸다. 먼 옛날 머리 위에 왕관을 눌러썼던 누군가가 그러했듯이. 고개를 돌리고 싶어져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덧붙였다.
"나와 세븐도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어."
"..."
"알고 있잖아?"
"...잠깐 나갔다올게요."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고 있었던 4는 그렇게만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마른 먼지가 뒤덮은 대리석 바닥에 선명하고 작은 발자국이 남았다. 그 발자국이 등 돌린 채 멀어져가는 것을 조금 슬픈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려다 렌즈를 움직여 시야를 차단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검은 공간 속에 보일리 없는 것들이 보였다. 강하고 사랑스러운 여전사였던 세븐. 그녀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탐구심과 용기, 그런 것들이 그녀의 것이었으리라. 떨어져내린 번개에 한쪽 발이 타버려 새로 구해온 천으로 몸을 기웠을 때도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반복. 또 반복. 그녀는 변함없는 이 곳을- 정확히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반복. 또 반복.
....영원히 반복.
기운 자국으로 가득찬 자신의 몸을 떠올렸다. 7을, 3을, 4를 떠올렸다. 영원히 죽은 채로 있을 것같은 회색 돌벽들과, 비바람에 풍화되는 거리 위의 모든 것들과, 마른 채 푸석푸석해지고 있는 거리의 시체들을 생각했다. 이 영원처럼 변하지 않는 공간을. 우리들을. 기우고 또 기워 원래 몸이었던 천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빈 공간에 실을 꿰어도, 무한처럼 이어지는 매일에서는 반드시 무언가가 부서져나가고 있었다. 지금 이 때처럼. 풍화되어 뼈만 남은 첫번째 방의 남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박사님, 인간의 흔적같은 건 남기지 말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우리는 조금 달랐을까요. 어둠 속에 내던진 질문에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렌즈를 좁혀 눈을 떴다. 어둑어둑해진 시야 속에서 손을 움직여 걸터앉은 성냥갑 밑을 더듬었다.
동상의 정원에서 현관 흙 속에 반쯤 파묻혀있던 그 것을 찾아온 것은 3이었다. 세븐은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었다. 반으로 부서진 말굽모양 자석. 무거운 그 것을 끌어올리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반만 남은 푸른 색 부분은 모서리가 거뭇거뭇하게 벗겨져있었다. 여기에도 시간이 배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고는, 움켜쥔 그 것을 머리에 갖다댔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행위였는데도 손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 앞에 비치는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화경같은 풍경만이 어지럽게 두뇌를 할퀴었다.
환희에 차 바라보았던 그 날의 비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fin.
어이 나인, 쟈마미로!
이건 좀 장난이고, 아마 반영구적으로 움직인-달랑 넷이서 살아남은 생명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걱정되서 쓱쓱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