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자신의 가상 시뮬레이션을 담당해주던 ‘교관’이 며칠 모습을 감추었을 때 라일 디란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함내서 바쁜 일이라도 생긴 거겠지 하고 있었던 라일이 그가 지상에 갔음을 알게 된 건 라그랑쥬 3 지역에서의 기체 정비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이였다.
"뭐라구?"
"네. 당분간 지상에 다녀오겠다고.. 못들으셨어요? 스메라기 씨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네. 괜찮은 거야?"
"마이스터 개인에게 추적이 따라붙은 건 아니니까요."
"뭐어..그럼 다행이지만. 그래도 없는 줄은 몰랐네."
그러고보면 록온은 지난번 회의에 안왔었죠, 그 때 말해서 몰랐나보네요, 하고 순진한 목소리로 말한 아리오스의 마이스터에게 고맙다는 말을 던지고 돌아서면서 라일은 괜스레 혀를 찼다. 이건 확신범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배제했을 것이다. 그 귀여운 교관은 처음부터 유일하게 ‘라일의 록온’을 부정했었던 녀석이니까. 뭐가 밉보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필요이상으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적당히 타인으로 있는 게 편하다. 거리는 적절히, 정보는 정확히. 하지만 ‘거리가 적절’해야한다는 건 문제였다. 너무 멀어져서야 정보로부터도 멀어지고 만다. 새삼 라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어- 왔어?"
[티에리아, 왔다! 왔다!]
3일 후에 그가 정확한 시간에 함내로 귀환했을 때 라일은 일부러 마중을 나갔다. ‘록온’과 그 옆을 데굴데굴 굴러 쫓아온 하로앞에서 천천히 세라비 건담의 콕핏이 열렸다. 세라비에서 내린 마이스터는 빙글빙글 웃는 라일의 얼굴을 무표정으로 정확히 3초쯤 바라본 뒤에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비껴서 스쳐지나갔다. 황급히 라일은 티에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냉랭하네- 인사했는-"
짝! 말하다말고 뺨에 날아온 충격에 라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티에리아가 엉겁결에 붙잡힌 팔을 거세게 뿌리친 반동이었다. 라일은 휘청거리며 두어걸음 물러섰다. AI가 귀를 파닥거리며 라일에게 달려왔다.
[록온! 록온!]
"아.."
당황한 것은 뺨을 맞은 라일보다도 오히려 티에리아 쪽이었다. 뺨에 전해오는 얼얼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라일은 한순간 그의 무표정이 무너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이런, 역으로 기회인가. 속이 씁쓸하건 말건 라일은 붙임성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우와, 아파라~. 인사 좀 하고 살자고 하려던 건데 의외로 손이 맵네."
"...미안하다."
너스레를 떨듯이 말한 라일의 말을 잇듯이 낮은 사과의 목소리가 물렸다. 사뭇 자의가 아닌 듯 티에리아는 고개를 반쯤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아직도 얼마간 곤란해하는 표정이 남아있었다. 이런 것쯤 아무 것도 아니야, 라는 표정으로 웃어보이고 라일은 티에리아에게 다가섰다.
너무 멀어지지 않게끔. 그러나 너무 가까워지지도 않게.
"내려갔다 왔다면서? 안보여서 놀랐다구. 학생을 내버려두고 가다니 야박하잖아~"
"시뮬레이션 모드에서는 하로가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로, 도와줘! 도와줘!]
"그래도 하로랑은 다르잖아."
귀를 파닥거리며 뛰어오른 AI을 한손으로 받으며 라일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티에리아는 대답없이 그를 응시했다. 속으로는 틈을 가늠하면서도 라일은 웃어보였다.
"빨리 익숙해져야 할 거 아니겠어. 너도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교관님. 학생을 버리고 가지 말라구~"
"..도울 의향이라면 있다."
"에?"
"...인정하지. CB에는 전력이 필요해. 너는 건담 마이스터다."
"그거 고마운데."
의외로 순순히 나온 말을 받으며 라일은 눈치를 살폈다. 나직나직하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보였다. 호의에 어린 말투가 아니라 싫은 것을 강요당한 어린아이같은 말투라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허용범위 내에서 엇나가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좀 쉽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일은 의구심반, 충동반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이번에야 말로 잘 부탁해, 교관님."
"..나도 잘 부탁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티에리아는 느릿느릿 라일이 내민 왼손에 자신의 왼손을 아주 살짝 겹쳤다. 라일은 그 손을 힘있게 잡았다가 놓았다. 티에리아는 빠르게 손을 빼냈다. 라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여전히 자의가 아니라는 표정이었지만 충분했다. ‘싫어도 인정한다’. 더 가까워질 필요는 당연히 없다. 앞으로는 적당히 틈을 봐서.. 그렇게 계산하는 사이, 라일과 잡았던 손을 다른 손으로 쓸던 티에리아가 문득 말했다.
"한가지, 주의해줬으면 한다."
조용한 말투에 적의는 없었다. 상황 판단은 빨랐다. 웃자. 라일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네네- 뭡니까?"
티에리아는 뜸을 들이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었고, 싫어하는 기색은 사라져있었다. 마치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는, 정말로 교관같은 얼굴로 티에리아는 툭 말을 내뱉었다.
"-배신하지마라."
..아. 라일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저기 그거 웃을 수 없는데요. 라일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꽉 얼어붙었다. 그 말을 내뱉는 티에리아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붉은 눈도 조용히 가라앉아 라일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위험하다.
어디서 엇나간 걸까. 마음 속에 스쳐가는 오만가지 생각들을 누르려 뻘뻘거리면서 라일은 티에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차..착한 학생이 되도록 하죠."
"얼버무릴 필요는 없어."
분위기 쇄신을 바라며 한 멘트에 티에리아는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그 것을 끝으로, 어딘가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티에리아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돌아섰다. 차마 말을 붙일 마음도 안들어 라일은 그만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거리는 적당히, 정보는 정확히. 얄밉기짝이없는 상사놈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 말을 했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라일은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상사에게 욕을 퍼붓고 싶어졌다. 클라우스 이 자식아, 니가 해보라고.
멀어지는 티에리아를 보면서 라일은 손에 들었던 하로를 살짝 내려주었다. 구체형 정보단말은 귀를 파닥였지만 그것을 돌보아줄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아, 실패구만.
따끔따끔, 얻어맞은 뺨이 쓰라렸다.
f in.
04. 凍える頬 (얼어붙은 볼) / うたかた。
중매는 잘 서면 술이 석잔, 못하면 뺨이 세대.
사람관계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힘내라 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