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친구와 마지막 열차를 탔다.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타고 있는 사람을 모두 내리게 했다. 이 마지막 열차를 놓치면 안되는데. 불안해하는 사이 플랫폼에서 다른 차가 미끄러져들어왔다. 사람들이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의 손을 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올라탄 차에는 사람이 많았다. 빈틈없이 채워진 자리를 보다가 나는 친구와 함께 뒤로뒤로 걸음을 옮겼다. 뒷 차량의 문을 열었을 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오케스트라가 열차의 좌석을 메우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친구의 손을 끌어당겼다. 가장 안쪽 칸으로 가자, 거기에는 앙상블을 맞추고 있는 이중주 연주자들이 있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역시 둘다 죽은 사람이었다. 망설이다가 친구와 나는 다시 앞칸으로 갔다. 덜컥, 친구의 몸이 굳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친구의 몸에는 친구가 아닌 사람의 영혼이 깃들였다. 다행히도 방법을 알고 있어서, 조심스레 친구의 입을 막았다가 악령을 뽑아냈다. 조금 어지러워하는 친구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죽은자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칸의 빈 좌석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친구와 나는 열차의 종착역에 대해 고심했다.
(26일)
수도원에 들어간 남자는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했다. 작은 어린 소녀가 정원을 관리하는 그의 곁에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거리다 가는 것이 남자의 기쁨이었다. 미실, 오늘은 무슨 일이니? 엄마랑 싸우고 왔어요. 나보고 정원의 사과를 따먹으면 안된대요. 백작 나리는 괜찮다고 했는데도요. 설익은 사과는 몸에 안좋잖니? 괜찮아요. 뭐. 아, 수도원장님과 비슷한 지위에 있으신 분이 있어요. 아세요? -- 수사님 말이니? 응, 아네요.
소녀가 밝은 어조로 거론한 남자는 수도원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회계담당이었고 왕궁의 고위직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따금씩 수도원의 예산을 배정받기 위해 나가는 일을 했다. 일개 정원사 일을 하고 있는 수도사에게도 알려졌을만큼 그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지만 저녁 기도시간에 따로 모습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수도원장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 것이 그가 기부했던 금액때문이라고 했다.
미실이 정원에 숨어들어오다가 그 수사와 마주친 것은 얼마 후였다. 퉁명스러운 얼굴로 소녀를 흝어보는 남자를 보며 젊은 수도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들키지 않게 해라. 여전히 무뚝뚝하고 까칠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버렸다. 미실은 정원수사에게 달려와 무릎에 매달렸다. 놀라라, 혼날 줄 알았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미실을 한번 끌어안아주고, 수사는 떠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수도원에 숨어드는 여자는 거꾸로 매달아 죽일 수도 있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수사는 아이로만 보았던 미실이 곧 소녀가, 여인이 된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미실이 죽었다. 수도원에 숨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돌림병은 쉽게 소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정원에 앉아 찾아올리 없는 그녀를 기다리다 남자는 섦게섦게 울었다. 어린 소녀는 그의 친구였고 가족이었으며 여동생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울던 남자는 어깨를 치는 손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이된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 회계담당 수사였다.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남자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식사에 초대하지. 짧은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섰다. 남자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를 따라갔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주방 뒤쪽의 다락방으로 비밀문이 있었다. 비싼 가구들이 채워진 그 비밀방에 청년은 잠시 슬퍼하는 것도 잊었다. 육중한 식탁에 놓인 고급스러운 의자에 청년을 앉히고 중년은 와인을 잔에 채워 건넸다. 슬플 때 금욕은 독이지. 짧게 말한 후 남자는 잔에 술을 채워 들이켰다. 그는 벽난로로 시선을 던졌다. 그 위에는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아름다운 여인과 근에게 안긴 두 아이. 내 가족이라네. 전염병으로 죽었지. 남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귀족가문의 맏이, 두려운 것이 없었던 영주. 정략결혼이었지만 사랑스러웠던 아내. 그리고 아이들. 모든 것을 앗아간 돌림병. 수도원에 은둔할 수 있게 주선해주신 건 전하였네. 그래서 이 곳에 몸을 의탁했지. 수도원장은 아내의 먼 친척뻘되는 사람이거든. ... 누군가를 잃는다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건 모두가 알지. 나도 그렇다네. 씁쓸하게 말하고 그는 다시 잔을 채웠다. 청년은 죽은 소녀를 떠올렸다. 그에게 그 어린 여자아이는 분명히 소중한 가족이었다. 어린 여동생을 생각하며 청년은 고개를 묻고 울었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던 나이든 남자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듯 그를 다독여주었다.
젊은 수도사가 저녁식사 이후 종종 그 비밀방을 찾게 된 것은 그 후 부터였다. 남자는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가 모르는 지식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채워지는 달처럼 둘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했다.
(28일)
창밖을 날아가는 하얀 새는 인간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새를 막아 다들 창문을 닫았다. 오빠, 왜 그래. 그녀는 애처롭게 말했다. 반 내의 아이들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애는 떨어져 죽을 것이다. 날개를 하얀 눈처럼 흩뿌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발치에 샛노란 색의 어린 강아지 두마리가 있었다. 안아올려 끌어안았다. 등 뒤 쪽에서 하얀 강아지가 나지막하게 울었다. 세마리 강아지를 데리고 그 곳을 나갔다. 하얀 새의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