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동생도 아니고 아래아래동생에게 때깔나는 자리 하나 꿰어차주고 본인은 한량이 되어 팔도를 유람다니며 기생을 벗하고 바랑속 엽전을 동무삼아 풍류를 즐긴 것도 어연 몇 년. 셋째 동생이 어엿하게 왕위를 이어받고 자리잡아 이러저러 일벌이는 것을 먼 곳에서 듣는 것이야 꽤나 흐뭇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한양까지 올라가줄 정도로의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자신이 왕위를 걷어차버린 건, 그 동생때문이아니었던가.
"마마."
"아아, 아우야. 날씨야 좋다만 좀 이르지 않누?"
"...무슨 말을 하시는 지 불초소생은 모르겠나이다. 부디 기침하옵소서."
닫혀있는 문이래봤자 한지를 덧바른 것뿐인 그 것은 보온이야 될망정 소리는 술술 잘만 통한다. 그 점을 이용한 절간 스님들의 인사법 그대로 단 아래서 손을 모아 고개숙이고 있는 녀석에게 끌끌 웃으면서 문을 드르륵 열었다.
"우리 아우님이 언제부터 불초소생이 되었나? 왕위한번 받아보겠다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녀석이."
"...그런 동생 두들겨 패서 쫓아내놓은 게 누군데!!"
"본성 나오는구나, 에끼. 아직도 목탁 천번은 더 두드려야겠다."
"칫, 누가 이팔청춘에 목탁두드리면서 살고 싶었는줄알아? 다 형때문이지. 내 천가지 만가지 번뇌는 다 잊어도 밤중에 찾아와서 두드려패던 형님 나무막대기는 못 잊겠더라."
"누가 왕위 물려받으려 들래?"
"나도 내가 바보짓 했던거 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팰 건 또 뭐야? 그래놓고 서기 속여가지고 말로 잘 타일렀다고 쓰라고 하지 않나. 여론 조작한 거지? 하여간 그런 거랑 기생끼고 노는데만 머리좋다니까."
-그 누가 알리오, 그 숨겨진 진실을.
술먹고 사냥해대서 쫓겨난 세자가 왕궁에 들어왔고 다음날 아마도 다음 왕이 될거라 생각했던 효령대군이 아버지께 조용히 상소를 올리고 왕궁을 떠났던 것도 벌써 몇 년전의 일. 그 아래 동생 충녕대군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 것도 이미 오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생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이 형님- 양녕대군의 야사는 사려깊은 첫째 왕자의 충고로 변질됬지만, 그 본내야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는 법이다.
좌우지간, 그 떄 앞마당에서 부러트려와서 죽어라 패댔던 양녕대군의 막대기는 본인이 수습하지 않았던가. 법당에서 잘 말린 그 것은 지금도 남아있어, 자신이 지금도 아침마다 북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거늘. 그 때 앞 마당의 부러진 나뭇가지마저 자신이 한 일이라고 덤탱이 씌워졌던 것을 생각하며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보다 형님, 왜 윗자리 걷어찬 거야?"
"슬슬 기어오르네. 넌 속세를 버린 몸이고 난 왕님의 형이야. 어따대고 반말이야?"
"흥, 아버님 수랏상에서 밤과자 빼먹고 부스러기로 나한테 덤태기 씌웠던 형한테는 존대해줄 생각 없수다."
"쳇, 봐줬다. 10년만 묵으면 땡중될 것같은 녀석이."
"시끄럽고. 난 주색잡기에 관심 없으니까 절간 들어간거다, 왜? 그보다, 왜 왕자리 떄려쳤냐니까."
양녕대군은 대답대신 어디선가 공수해온 술을 한잔 들이켰다. 절간에서 술마시는 행위는 싸리빗자루로 북어두들기듯 패서 쫓아버리는 게 예사였건만 뻑하면 왕의 형 거리면서 배쨰라 덤비는 형의 행위에는 익숙해진 터라 효령은 이맛살을 한번 찌푸리고는 말았다. 좌우간, 이 놈의 형은 왕의 형이 또 하나 이 곳에 있다는 것따위는 까먹기가 예사인 것이다.
"..난 역시 영감님이 했던 짓 싫더라."
"아버지가 왜?"
"외척 제거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하필 싸그리 죽일 건 뭐야? 마마님은 나 잡고 울고 불고하지, 저잣거리에 목을 건다 안 건다 난리지. 이제와 하는 말인데, 어머니 히스테리 장난 아니었다, 너? 아버지 오면 죽이려 들었지, 나도죽고 너도 죽겠다고해서 한동안은 비녀도 가까이 못댔다니까? 거기까지만 하면 또 말도 안해. 영감이 오죽했어야지? 자를 싹 다 자르고 땅에 거름주고 엎어놓고서 <나머지는 다음 왕에게>라니, 놀리는 거야 뭐야. 잘 깔린 대로 따라서 걸어가고 금잔에 따라놓고 치장해놓은 술 마시기만 하면 되는 건 내가 사양일세."
양녕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효령대군은 쯧 혀를 찼다. 원경황후 민씨. 어쩌다가 한 남자 사랑해서 그 남자의 아내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남자라는 놈이 오죽 바람둥이였으면 첩을 여섯이나 두고 자식을 셀 수도 없으니 어머니로서는 미칠 노릇이었을 게다. 거기에 외척제거라는 명분아래 친척이 다 죽었는데 멀쩡할 수야 없었겠지. 자신이야 다른 궁에서 지냈으니 몰랐다지만 왕의 적자라는 신분으로 하루종일 어머님과 아버님을 뵈러다녔을 형님에게야 지긋지긋 했을 터다. 잠깐 형이 불쌍해질려는 찰나에 머리 속에 의문이 스쳐가, 효령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 형님. 하나 물어도 돼우?"
"물어라, 동생아. 배개 물래, 술병 물래?"
"재미 없어. 대체 왜 충녕이를 왕위 못세워서 혈안이 됐던 거야? 왜 하필이면 충녕이였어? 도는 책 좋아하는 착한 동생이긴 했지만 특별히 잘난 건 없었잖아."
"응?"
꿀꺽. 형님이 또 술을 마셨다. 그러고보니 아직 미처 단정하게 정리하지도 않은 옷고름에 묶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인간 또 밤중에 씻었구만-이 왕의 형은 커녕 한량도 안되고, 기껏해야 봉두난발 노름꾼으로 보인다. 쯧쯧쯧, 저런 게 왕이 됐다간 정말 나라 망했겠지. 순간에 동정어렸던 마음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효령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보야."
"응?"
" 충녕이- 우리 도야는 말이지."
난데없이 진지했다했더니 순간에 분위기 박살내는 말을 던지는 형님의 모습에 효령은 일순간 얼어붙었다. 셋째 동생은 자는 원정, 이름은 도였을 터지만 저런 밑도 끝도 없는 이름따위없었을 터다. 당췌 누가 도야인데? 묻고 싶어지는 마음을 잡으며 효령은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여기, 2 각만 더 앉아있다가는 끝장-
"엄청----- 귀여웠거든--!!! 형아형아하다가 형님형님하면서 올망졸망 쫓아오는 커다란 큰 눈동자가 얼마나 예뻤는지 너는 평생 모를 거다! 좋아하는 책 갖다주면 얼굴 빨갛게 하고 헤헤 웃는 게 아주 그냥 최고였다니깐?! 오죽하면 도야 초상화가 궁녀들 사이에서 나돌았겠냐!"
"...."
"거기에 책에 푹 파묻혀가지고 있다가도 같이 사냥가자고하면 쪼르르 따라나서고 흙투성이 된 거 그대로 헤헤 웃는게, 한 살밖에 안어리답시고 나랑 맞먹으려들던 네 녀석이랑은 천지 차이였다는 거 아니냐. 아아, 보고 싶구나 우리 도야.. 영감도 삼촌들 다 죽이고 왕위 잡았는데 내가 도야를 어떻게 죽이냐!! 그러니까 아예 다 때려치고 내려온 거지!"
그리 충녕이- 아니, 이제는 전하지. 전하가 보고 싶으면 한양으로 갈 것이지 왜 원주 회암사 구석진데까지 와서 난리야? 남은 불교 수행한답시고 고생중이건만, 내가 댁생각하면서 북을 북어대신 두드려패는 건 모르느냐고요, 이 인간아.
효령스님- 태종의 둘째 왕자였던 효령대군은 목까지 넘어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어린 동생 생각에 푹 빠져서 헤실거리는 인간에게 한소리라도 했다간 자신에게도 무슨 소리가 날아올지 모른다. 애초에 공부해도 소용없다고 슬슬 꼬시더니, 나중에는 두드려패서 협박한 저 무뢰한 형님이니까.
"아, 물론 궁녀들사이에서 돌던 도야 초상화는 실제랑 제일 비슷한 거 열 장만 내 걸로 남기고 다 모아서 태워버렸지!!"
... 전하. 아니, 충녕아. 너한테 떠넘기려해서 미안.
자신 만만하게 말하는 양녕대군 앞에서 천년공을 도로아미타불한채 수만 번뇌를 다시 얻어버린 효령은, 이 바보형님이 한양의 궁궐에 가서 이와같은 깽판을 놓는대신 자신의 절로와서 꺵판 놓고 있는게 사실은 정말 다행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두손모아 조용히 합장했다.
FIN.
050416.
창제해주신 아름다운 한글로 이런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세종대왕님.
하지만 (픽션이건 날조건) 너무 모에로웠지 말입니다, 3형제+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