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으응... 생각 안나."
"아직까지 안주무시고 계신가요? 왕자님."
"우와아아앗, 사피! 놀랐잖아!"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쁘다고 한다면 바로 곁에 다가올 때까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알렉의 문제겠지만, 사피루스는 상냥한 성격답게 그 점을 꼬집는 대신 난처한 듯 웃었다. 조금 투덜투덜하던 알렉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나자, 사피루스는 알렉의 옆자리에 앉았다.
"달구경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만월(滿月)이 아니고서야, 나락의 달은 그다지 보는 의미가 없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며 사피루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초승달. 회색으로 탁해져 있는 밤하늘에 간신히 걸려있는 그 것은 스러질 것같은 빛을 뿜고 있었다. 분명히 활기왕성한 알렉의 시선을 끌 정도의 것은 아닌 것이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띄고 사피루스가 알렉을 보았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알렉이 평소와 달리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사피는, 나락이 아닌 곳에서 달을 본 적이 있는 거야?"
"..!!"
사피루스는 평정을 잃지 않기위해 한순간 왕자에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망토자락을 콱 틀어쥐어야했다. 그런 말을 하다니, 실수다. 어떻게 이 상황을 넘길까 고민하며, 사피루스는 슬그머리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린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당황해 있었다.
"..글쎄요... 그러니까.."
"으응, 말 해주지 않아도 돼."
적당히 답할 말을 찾고 있는 사피루스는 알렉의 의외의 말에 놀란 눈을 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고개를 살레살레 저은 왕자는 어딘가 슬퍼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을 함께하며 처음 본 얼굴에 사피루스가 당황하는 순간, 알렉의 얼굴에서 그 표정은 이내 싹 사라지고 없었다.
"에헤헷, 나, 달구경이 아니라, 카롤이 말해주었던 노래가사가 전혀 생각나지 않아서 그래. 뭐더라, 상자 속에- 상자 속에-하는 노래였는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알렉의 얼굴을 보며, 사피루스는 어딘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질문에 답해주었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새장속 새가 도망쳤다 학이랑 거북이가 미끄러져서 사로잡힌 것은 누구-?’말인가요?"
"아, 맞아!! 사피, 잘 아는구나~"
손뼉을 치며 기쁜 듯 폴짝폴짝 뛰는 왕자를 사피루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얼굴이 거짓말 같을 만큼 알렉은 평소와 다름 없었다. 입 속으로 사피루스가 말해준 가사를 몇 번 중얼거리더니, 기쁜 얼굴로 외쳤다.
"고마워, 사피!"
그리고 이내 팔짝거리던 왕자가 달려들 듯 안겨들었다. 품에 그대로 안겨버린 왕자를 아직도 약간은 멍한 기분으로 토닥토닥해주는데, 장난기를 가득띈 눈동자를 번쩍이더니 알렉이 품안에서 순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간에 감촉에, 사피루스는 잠시 정신이 나가는 것을 느꼈다. 1초, 2초, 3초. 얼굴이 새빨개진 사피루스가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그,그보다 누구에게 배운 거에요!! 로드입니까, 설마 베릴 님이?!"
"에, 사피가 가져다준 책이었는데."
사피의 과민반응에 놀랐는지 중얼중얼하는 알렉 앞에서 사피루스는 자신이 왕자에게 도색서적(..)을 가져다주었다는 착각에 빠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스스로를 속으로 몇만번이나 질타하는 사이, 알렉이 예의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 그러니까 이거 만병통치약 아니야?"
"무,무슨 소리이신 겁니까?!!"
"응? 그치만 자는 사람도 깨우고 죽은 사람도 살리고 기절한 사람도 깨우고..."
그리고 이게 왠 소린가하여 멍해진 사피루스는 한참 후에서야 알렉의 입에서 줄줄히 나오고 있는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인어공주> 따위의 제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장 알렉의 방에서 명작동화들을 치워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찰나, 알렉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거 맞지?"
순간에 굳어버린 사피루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이 그 무릎위에 머리를 기대며 길게 누웠다. 그리고 알렉은 다정하고 즐거운, 미소지은 얼굴로 말했다.
"제일 좋아해, 사피."
"아,아,아,알렉..님?"
"다정하고 상냥하고, 엄마 같아."
그리고 가여운 사피루스는 알렉의 마지막 말이 전해주는 충격에 이번에야말로 기절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우으으으, 한숨소리에 가까운 사피루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렉은 쿡쿡 웃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천천히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사피루스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제일 좋아해. 정말로.
가족이고 동료이고 친구이고.
그러니까, 그런 꿈의 일같은 건 잊고 있을래.
잊어버릴 거야.
너는 이렇게 여기 있는 걸.
...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괜찮지, 사피? ......괜찮을 거야, 분명.
분명...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