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좀 괜찮아?'
'전신에 둔통이 있고 머리가 아픕니다. 목도 아프고.'
'쌩쌩한 것같은데.'
'보면 알지 않습니까. 상태가 안 좋습니다.'
'허어.'
'분명 훈련 도중일텐데요? 당장 가시죠.'
'다 끝냈어.'
'안 믿습니다.'
'거야 세츠나 시뮬레이션 봐주는 거야 생략했지만, 좀 봐주라. 걱정되서 왔구만.'
'누워있는 것정도에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진 않습니다.'
'그거랑 별개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있다니까?'
'쓸모없는 소리를.'
'우와- 안 귀여워라 진짜.'
'당신한테 귀여움받을 생각따위 없습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누워있어.'
'누워있을 시간따위..'
'티에리아, 쉬는 것도 일이다?'
옅은 웃음을 띄우고는 손을 뻗어 어깨를 밀었다. 다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힘에 기가 막혔다. 항의를 일절 무시한 채 열을 품은 이마를 쓸어주던 손이 서늘해 기분 좋았던 것을 기억한다. 마음에 들지 않은 남자의 손이라는 것이 불쾌해서, 그렇다고 그 손을 쳐낼 정도의 기력은 남아있지 않아서. ..아니, 손을 쳐낼 마음이 들지 않아서. 기운이 없어 그렇다고 애써 자신을 속여버리고는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래도 이대로 져주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싫어서, 무언가 싸늘한 말을 한마디 해주자고 생각했었다.
'...당신이 싫습니다.'
그 말에 그는 생각했던 반응은 무엇하나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구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로 올려다본 얼굴이 너무도 평온해서 기가 찼다. 할 말을 잃고 쳐다보다가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눈을 감았다.
...머리를 쓸어주던 손은 여전히 다정했었다.
..아.
..에리아.
"티에리아!"
부르는 목소리에 불연듯 눈을 떴다. 뿌옇게 흐린 시야 너머로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동료가 보였다. 펠트 그레이스. 익숙해야할 그녀의 얼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티에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변함없는 눈동자와, 조금 달라진 이목구비와, 머리카락. ...아. 현실은 그 다음 순간에 밀려왔다. 씁쓸하게도. 고개를 한번 흔들어 남아있는 꿈의 잔재를 털어냈다.
"괜찮아?"
"미안하다, 잠시 졸았던 모양이야."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고 와."
"할일이 많으니까."
"..무리하면 안되잖아?"
서둘러서 될 일도 아니니까. 말을 삼킨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문득 가슴에 박혀있는 과거를 상기시켰다. 걱정이 배인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무심코 나올뻔했던 숫자들을 밀어 삼켰다. 프톨레마이오스2의 복구, 백업 팀과의 연계, 신 MS의 테스트 파일럿으로서의 직무들을 들이대며 쉴 틈이 없다고 그렇게 쏘아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그 수치들은 필요한 게 아니었다. 대신 티에리아는 웃어보였다.
"쓰러지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지."
"..티에리아도 참."
"너야말로 쉴 필요는 없나?"
"아직 멀쩡해. 피곤하면 쉴게."
"무리하지는 마라."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말에 펠트는 빙긋 웃으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부 컨테이너의 개폐기압조정 시뮬레이션은 다 끝났나?"
"아, 그거라면 아직. 밀레이나한테 맡겼었거든."
"그랬지. ..역시 좀 무리한 부탁이었나."
"그런 건 아니고 아픈 것같아."
"아파?"
"응. 가벼운 감기."
펠트의 말에 티에리아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한동안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던 티에리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에리아?"
"좀 보고 오겠다."
펠트는 짧은 말을 남기고 조종실에서 나가는 그를 애써 말리지는 않았다. 문 밖으로 멀어진 그의 모습에서 한동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펠트는 무의식 중에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핀이 손에 스쳤다.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 대신에 펠트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떠오른 말을 부드럽게 입에 담았다.
"..역시 많이 변했구나."
당신도, 나도.
밀레이나는 개인실에서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불에 덮힌 채 드러난 몸은 평소에 보던 것보다도 훨씬 작았다. 티에리아는 새삼스럽게 그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제 열 두 살. 세츠나가 막 배속되었을 때보다 훨씬 어린 나이다. ..예전이라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티에리아는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아데 씨?"
"밀레이나."
인기척 때문인지 밀레이나가 눈을 떴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크게 뜬 진한 눈동자가 유난히도 어려보였다. 뭐라 말을 걸어야할지 얼른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티에리아는 떨어지지 않는 밀레이나의 시선에 난처해하다가 서툴게 입을 열었다.
"몸이 안좋다길래 걱정돼서.. 괜찮나?"
"멀쩡해요, 파파가 누워있으라고 무리하게 몰아붙여서 누워있는 거에요."
"열이 있어보이는데."
"밀레이나는 이정도로는 끄떡도 안해요!"
밝게 말하는 어조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목소리는 살짝 쉬어있었다. 아이의 오기는 어른들의 그 것보다는 훨씬 알기 쉽다는 생각에 티에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뭘로 착각했는지 밀레이나는 투정부리는 체 뺨을 부풀렸다.
"아빠도 그렇고 아데 씨도 그렇고 안 믿어주네요, 진짜 멀쩡해요?"
"그래.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누워있어."
"혼자 누워있으면 심심해요, 파파랑 있는 편이 즐거워요."
"통신은 연결되어있지 않은 건가?"
"부우- 누워서 보고만 있는 건 재미없어요!"
"조금만 참아."
저도 모르게 타이르듯 말하자 밀레이나는 고개를 모로 홱 돌렸다. 주변의 누구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아이이기 때문일까. 밀레이나는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편이었지만 몸이 아플 때는 역시 다소 풀어지는 모양이었다. 볼멘소리를 하며 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 완연한 어린아이라 새삼스럽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기운이 있으면 곧 일어나도 되겠는데."
"지금 당장도 괜찮아요!"
"아직은 안돼. 어디, 열은 좀 내렸나?"
"엣."
손을 뻗어 이마를 짚자, 생각치도 못했는지 밀레이나는 조그맣게 어깨를 웅크렸다. 긴장한 상대를 눈치채지 못한 채 티에리아는 손의 감촉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작은 이마에는 열이 올라있었다. 티에리아는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고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역시 열이 있잖아. 아직은 누워있어."
"..애들은 원래 체온이 높잖아요."
"그래도 누워있어."
"우.."
"밀레이나, 쉬는 것도 일이야."
'티에리아, 쉬는 것도 일이다?'
말을 입에 담은 순간 떠오르는 목소리에 티에리아는 순간 멈칫했다. 미처 털어내지 못했던 기억이 어딘가에 배어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와, 다정한 웃음과, 핀잔주는 듯했던 여유로운 목소리. 눈 앞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여전히 조금은 납득하지 못한 것같은 얼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새삼스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 때의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보였던 걸까.
떠오르는 과거에, 기억에 무심코 쓴 웃음이 났다.
"아데 씨?"
"으응, 아무 것도 아냐."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밀레이나에게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석연치 않은 눈을 하고 있는 밀레이나에게 웃어보이고, 가만히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언젠가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긴장한 듯 몸을 굳히고 있던 밀레이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을 풀었다. 잠깐의 고요가 흐르고,밀레이나는 다소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데 씨, 참 좋아요."
어리광 부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이답게 솔직한 호의가 배어있었다.
의외의 말에 놀란 얼굴을 했던 티에리아는 곧 수줍은 밀레이나의 표정을 따라하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거 고마운데."
"에헤헤, 톨레미의 여러분도 모두 좋아요."
발갛게 상기된 뺨으로 웃는 천진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티에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웃은 아이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쓰다듬는 손에 몸을 맡기듯이 눈을 감았다. 그 평온한 얼굴에 과거의 자신이 겹쳐졌다.
'당신이 싫습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의 자신도, 아마 지금의 밀레이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당신은 그렇게 온화한 얼굴로 웃어줬던 걸까.
"..나름대로 정말 악의를 나타낼 생각이었는데."
한숨처럼 흘린 목소리에는 다소의 분함이 섞인 그리움이 배어있었다. 그 때는 정말 싫어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도저도 전부 파악하고 자신을 다독여주었던 남자는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어떤 얼굴을 할까. 많이 변했다고 놀란 얼굴을 하던가. 다소 놀리는 것같은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던가. 어느 쪽이든간에 그는 활짝 웃어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록온 스트라토스."
중얼거리는 이름에는 언제나처럼 그리움이 스며들었다. 어느새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밀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티에리아는 추억을 되새기듯 눈을 감았다.
fin.
본격 아이는 어른이 되고서 부모의 심정을 이해한다 편.
영원히 글쓰지 못할 것같던 슬럼프를 어거지로 떨쳐내고 쓱쓱쓱.
티에리아 안의 록온은 많이 미화되어있어, 결국은 굉장히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라해도 티에리아에게 록온은.. 록온이잖아요, 응.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