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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종.
다소 긴장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 얼굴에는 부드럽고 진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애잔한 기운역시도. 부드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한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여인이 먼저 들어가며 남자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여인의 부드러운 걸음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쇼류.
.... <試思>
「어이.」
「...쇼류.」
「아침 조회는 왜 빼먹은 거지? 덕분에 슈코우에게 잔소리를 두배로 들었다고, 바카.」
장난스럽게 기린의 호를 부르며 걸어오던 안의 왕은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왕과 기린- 나라의 재보와 주상이 궁정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이 안의 왕실에 있어서는 그다지 기이한 일도 되지 않는다. 이 것도 몇백년의 치세 속에서 힘써 정착시킨 제도다. 그렇기에 쇼류도 아침 일찍부터 조의를 비롯해 전부 빼먹고 운해 아래로 내려갔다가 오후즈음에서 돌아왔다. 슈코우로부터 '주종이 전부 책임감 결여입니다'라고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연했던 쇼류였다. 당연히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침 조회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기린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 기린의 거처를 찾은 것도 조금 놀려줄까하는 생각으로 찾아와보았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엔키는 이쪽은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로쿠타?」
「..나가줘.」
「..?」
최초에는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정도로 기린의 어조는 담담했다. 평소의 아이같은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처연함. 그 말을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서 있는 쇼류에게 엔키는 여전히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 싫으니까 나가.」
「..로쿠타!」
「..나가.」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벽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기린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엔키의 이름을 불렀지만 기린은 여전히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쇼류는 눈썹을 찌푸렸다. 한참만에야 엔키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똑바로 쇼류를 올려다보았다.
「..부탁이니까 나가줘.」
그 눈에는 한 치의 장난기도 묻어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있던, 엔키의 조용한, 하지만 단호한 거부.
잠시 서 있던 쇼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서 기린의 거처에서 나갔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유난히 세게 닫힌 문소리가 크게 울리고나서는 저벅저벅 멀어져가는 발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 왕의 걸음을 들으며, 엔키는 세워모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쇼류.」
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사령이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어두운 털과 세개의 꼬리. 이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것은 걱정스러운 듯 주인의 곁을 맴돌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한 사령을 제지하며, 엔키는 사령의 목을 쓰다듬었다.
「..리카크. ...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주겠어?」
기린의 명령에, 사령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5백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모르는, 그 변함없이 조용하고 강직한 회색빛의 이리를 바라보며 엔키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기린이 방에 틀어박혔다고?」
「그래. 벌써 열흘째라고, 여관장이 울며 달려왔어.」
기가 막히다는 어조의 이탄을 향해 슈코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린의 칩거(蟄居)라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왕이 집무를 피하는 일이 있어도, 그 재보인 기린만큼은 왕의 곁을 지키며 나라의 것을 돌보는 생물이 아니던가. 실도(失道)가 아니고서야. 상상도 하지 못한 상태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슈코우는 나름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실도가 아닙니까?」
「그 멍청한 짓을 해대는 왕이 한 495년 전에 실도했다면 당연한 일이 너무 늦었다고 하겠지만, 5백년이나 지나 실도하는 건 좀 무리가 있는 거 아냐?」
「..예, 실도하고도 남을 짓들만 저지르기는 했습니다만.」
「불행히도 왕자식도 기린놈도 멀쩡한 듯해. 사령도 썡쌩하게 부려대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듯하다.」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던진 슈코우의 말에 이탄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열흘 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기린- 그 거처로 들어서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면 사령들에게 부드럽게 밀려나버린다. '부드럽게'라는 표현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기린의 사령이고 곁에 주인이 있는 만큼 설마 피를 볼까싶어 안쪽으로 들어가보려던 경비병은 실재로 리카크의 공격에 피를 볼 뻔했다. 그 단호함은, 설령 원의 혈향이 배게 되더라도 침입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표시였다.
슈코우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 안의 주상과 재보가 별나다는 것은 타국까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설마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기린이라니, 묘한 일도 다보는군요. 자신의 몸을 제쳐두고라도 나라와 주상을 위해 움직이려하는 것이 기린 아닙니까.」
「녀석들 이상한 거야 다른 나라까지 퍼진 망신이지. 하지만 칩거라니, 이런 때에 생각이 있는 거냐, 그 꼬마녀석은!!」
「어떻게 못 끌어냅니까?」
「아아, 사령들이 거처의 입구를 지키고 있어, 식사를 챙겨주는 일조차 힘들다고 하더군. 그나마 거의 먹지도 않는 모양이고.」
떄아닌 시위를 하고 있는 기린에게 무슨 짓을 하는거냐고 호통치기 위해 찾아갔던 이탄은, 조용히 물러나도록 강요하는 사령들에게 둘러싸여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었다. . 자비의 기린인만큼 피의 독이 치명적이기에 직접적인 상처를 입힌다거나 하지는 않고, 왕궁의 중신인 만큼 심한 취급역시 당하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을 따르는 사령들의 기세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게 아니었던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던 슈코우가 불쑥 물었다.
「..주상은?」
「응?」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하였습니다. 비록 '그런 것'이나마 주상으로 모시는 분이니, 그의 반신인 기린을 달래는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 만큼의 능력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최근 왕과 기린이 모두 보기 힘든 터라 산더미처럼 밀려든 서류를 전부 개인의 역량으로 처리하고 있던 슈코우는 드러나지 않게 맺힌 게 많았는지 미소지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비록 몸은 힘들더라도 그 말투만은 전혀 변하지 않는 촌철살인의 독설을 전혀 개의치 않은 이탄은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험악하게 말했다.
「그 바보는 내버려두라고하더군.」
「..진심입니까?」
「그런 듯해. 왕주제에 책임감이 결여되어있어!!」
안의 국왕, 연왕 쇼류. 평소의 헤이한 태도로 지탄받고 구박받고 있지만, 아무리 헐렁한 태도를 하고 있다고해도 치세 500년이라는 거업을 이룩한 왕이다. 그가 왕의 얼굴을 하고 하는 이야기에는 아무리 왕을 대하기에 거침없는 신하들이라해도 일단은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에 분노하듯 화를 쏟아내는 이탄을 보며, 슈코우는 한숨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 두 분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방 안에서 나가지 않은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침상을 벗어나지 않은 채 움츠리고서 앉아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슈코우나 이탄, 세이쇼들도 접근하지 못한다. 사령들에게 내린 명은, 설령 상대를 상처입히더라도 좋으니 이 방안으로 들여놓지 말라는 의미였으니까, 아무리 선적을 받은 그들이라해도 들어올 수 없었겠지.
얼마나 지났을까. 등 하나 켜지 않아 그대로 밤의 고요에 가라앉은 방 안으로, 어두워진 밤하늘로부터 달빛이 쏟아져들어왔다. 몸 위에 떨어지는 빛의 파편들에, 엔키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워진 밤 하늘 위, 위태롭게 빛나고 있는 초승달이 하나.
지금의 자신같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울었다.
칩거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조의를 빠진 그 날, 자신은 현영궁에서 빠져나와있었다.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쇼류가 조의를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 성에 남아 잔소리를 혼자서 다 떠맡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술집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주상의 일을 멀찌감치 제쳐두고, 자신은 안의 거리를 구경하자고 생각했다.
치세 500년.
긴 시간동안 안은 녹음이 풍성해지고, 그리고 부유해졌다. 자신이 바랬던 것처럼, 녹음이 우거지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 사실이 행복해서, 리카크를 타고 거리 위의 허공을 돌며 번성한 안의 백성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그를 보았다.
이름을 부르려다 멈칫 다문 것은, 쇼류가 처음보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워보이는 듯한 표정. 그 태도에 순간 의아함이 들어 쇼류를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보았다.
그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부드러운 자태와 초라하지 않되 호화롭지 않은 고운 차림의, 여성이었다. 얼굴에 띈 미소는 상냥해보이고, 가냘프고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는. .
── 화류가의 여인이 아니다.
소박하되 우아한 차림과 기품이 어려있는 듯한 몸짓에서 언뜻 그 것을 읽어내고, 순간 경직했다.
주점에서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왕을 찾는 일정도는 몇번이나 있었다. 자취를 감춘 왕의 기척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기린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쇼류를 찾아내 몇번이나 핀잔을 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봉산의 여선같은 여자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녀석에게 어이없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그 여인은.
- 쇼류의 곁을 걷고 있던 여인.
화류가의 여인들과는 달리 화려한 꾸밈도 없이, 기품있는 여성이었다. 부드럽게 곁을 따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늘 알던 그 녀석은, 사석에서 민가의 여인을 만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주점을 뻔질나게 드나들지만, 결국 만나는 여성은 아무도 없는 그런 녀석인 거다. 그런, 그런 녀석이.
여인의 집인 것이 분명해보이는 저택까지 가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은, 도망쳤다.
그 장소로부터. 그 여인으로부터. 쇼류로부터.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침상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뺨에 와닿는 서늘한 감촉에 눈을 떴다.
- 엔키.
「..라크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여괴가 슬픈 눈으로 이 쪽을 보고 있었다. 눈물이 맺힐 것같은 눈동자를 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쟁반을 밀었다. 여관장이 입구에 놓아두고 간 것으로, 엔키를 위해서 들고 온 것이리라. 여괴의 이름을 부르며, 엔키는 힘없이 웃었다.
쟁반위에 놓인 것은 잘 만들어진 음식들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것을 재대로 넘길 수가 없어, 라크히의 권유대로 음식을 넘기던 엔키는 이내 수저를 놓고말았다. 호소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라크히에게 미안하는 듯 고개를 저어보이고, 쟁반을 멀치감치 밀어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감싸안았다.
- 돌이켜보면 아득할 정도로 긴 치세를, 쇼류와 보내왔다.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왕에게 나라를 주었고, 그 왕에 기대어 사는 인생을 택했다. -기린으로서의, 본인이 절대로 걷고 싶지 않았던 길을. 그리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왕을 찾아버렸기 떄문이다. 왕이, 서약을 받아들여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랬었기에, 그리고 이제와, 왕의 곁을 지키는 다른 사람이, 다른 존재가 생긴다는 것이.
...괴롭다고.
「..그런 이야기,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도 나지 않은 채 감정이 메말라버린 듯, 몸이 차가워졌다.
왕위에 올라서는, 비를 들일 수 없다. 물론 후손도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여관으로 들이고 선적을 내리는 식으로, 마음의 둔 이를 곁으로 두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아이는 생기지 않아도 야합은 가능하고, 한 왕조에는 후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선적에 들었다해도, 그로 인한 파벌싸움따위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인도(仁道)의 기린으로서의 자신이 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보...」
그 당연한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고, 급기야 칩거마저 선언해버린 자신. 스스로의 한심함을 나직하게 욕하며, 다시금 고개를 파묻었다. 내리쬐는 달빛에 얼어붙은 듯한 몸은, 재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날이 밝으면.
칩거한 기린따위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지난 5백년간의 긴 전례덕에, 왕과 기린이 조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일상화되어있다. 어쩌면 그 덕에 지금 껏 아무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길지 않으리라. 기린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혹여 실도를 한 것은 아닌가-따위의 목소리가 퍼져나오게되면, 곤란한 것은 신하들과, 쇼류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 날이 밝으면, 봉산으로 갈까.
거기서 지내면서 잠시 안을 멀리떠나있는 거다. 스스로의 이 가당치도 않은 기분이 정리되기까지.
밤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새벽인가.
또다시 얼핏 잠들었던 정신이 맑아졌을 떄, 하늘은 서서히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잠의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사물의 윤곽이나 내비쳐들어오는 하늘빛. 새벽의 내음이 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떠나지 않으면.
그 사실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서, 습관처럼 두건을 찾았다. 금빛의 머리를 감추기 위해 그 것을 머리에 감다가, 이내 힘없이 웃으며 그 것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기수를 탈 필요도, 안국에 걸음을 내려둘 필요도 없었다. 인간형으로서 기린임을 감추는 것은 쇼류와 여행할 때가 아니면 필요없다. 전변해서, 운해 위를 날아가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그 발로, 안의 누구에게도 눈에 띄이지 않게.
───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일어나려고 했을 떄였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엔 타이호.」
!!!
목소리에 흠칫 놀라서 돌아본 그 곳에는, 분명 사령이 지키고 있을 터인 문을 지나 걸어들어오는 남자의 무뚝뚝한 실루엣이 있었다. 할말을 잃어버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바짝 메마른 입에서 간신히 밀어내듯 소리를 짜냈다.
「... 쇼류.... 」
얼굴을 찌푸린 상태의 왕은, 침상 곁으로 와 앉았다.
- ..용서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크히가 깊게 고개를 숙여왔지만, 엔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재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사령은 기린에게 매여, 기린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그 기린은 왕을 위해 살고, 죽는다. 왕의 죽음은 기린의 죽음이며 기린의 죽음은 왕의 죽음. 리카크와 요크히를 비롯한 다른 사령들이 얼마나 강한들, 모시는 이의 목숨과 직결되는 자를 그 몸으로 해칠 수 있을리 없다. 더욱이, 사령역시 왕에게 봉사하도록 되어있는 존재. 강한 의지로 들어올 것을 천명하는 주상 앞에서, 사령들은 길을 터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없는 것과 다름없는 장벽이었나.
그런데도 줄곧 기다려주는 남자다. 쇼류. 자신이 선택한 왕은 그런 성격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얼굴에 쓴 웃음을 퍼트리며 엔키는 묵묵히 시야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쇼류가, 입을 열었다.
「대체 뭐가 마음에 안들어서 방에 처박혀있던 거냐, 로쿠타.」
「...」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연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새벽에 아스라한 빛에 잠겨있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서 긴 천을 발견해, 그 것을 주워올렸다. 머리에 감으려했던 천이었다. 쇼류도 익숙한 그 것을 못 알아보지는 않았었는지, 가벼운 손짓으로 그것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머리에 감는 듯한 몸짓을 해보였다. 엔키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어딜 가려고 했던 거지?」
연왕의 눈매는 무감정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려는 로쿠타를 향해, 연왕은 한숨같은 것을 내쉬었다.
「..칙령을 내려야 말을 하겠나?」
「...봉산에.」
「봉산?」
다소 강한 어조의 그 목소리가 괴로워 눈을 질끈 감았다.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기 위해, 엔키는 손으로 자신의 목새를 억눌렀다. 그래서 입 사이로 흘러나간 목소리는 새어나가는 바람소리처럼 작고 갸냘펐다. 느릿하고 조용한 목소리에 연왕은 눈썹께를 가볍게 찌푸렸다.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여전히 강하게 목 언저리를 누른 채 엔키는 여전히 작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 네 녀석이 그녀를 데려올 동안에는 거기에 가 있을테니까.」
「응?」
「마음대로 해, 쇼류.」
재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반문해오는 쇼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이야기한 엔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게 누른 목이 아팠지만 손을 떼지는 않았다. 욱신거리는 것은 눌려있는 목일까. 아니면 다른 곳일까. 생각을 하지 않기위해 빠른 걸음으로 창문께로 향해, 그대로 전변하려했다.
「로쿠타!!」
하지만 그 순간에, 몸이 휘청하고 쓰러졌다. 10일 간 극소량의 것만을 먹고 지낸 몸이 성했을리 없다. 창문께로 떨어지려는 몸을 잡아준 건 쇼류의 손이었다. 팔을 붙잡은 강인한 손덕에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찾을 수 있었던 엔키는 정신이 들자 흠칫하며 쇼류의 손을 쳐내려했다.
「놔..!!」
억누른 목에서부터 터져나간 것은 비명같은 외침이었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저 손길을, 지금은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저 손에, 주인의 손에 닿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몸부림치려는 엔키를 향해, 노호같은 목소리가 소리친 건 그 순간이었다.
「시끄러워!!」
강인함이 배어 엄청난 성량으로 빌려온 그 목소리에, 엔키는 한순간 몸을 비틀던 것도 멈추었다. 쇼류는 두 팔로 엔키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쇼류의 깊은 눈동자가 그 곳에 있었다.
「...놓지 않아...!!」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말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한 글자 한글짜 끊어 말하는 쇼류의 낮은 목소리는 열기를 누르고 있는 불꽃같았다. 그 눈의 안쪽에서부터 타오르고 있는 불꽃이 보이는 것같아, 엔키는 울 것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네가 아무리 놓지 않는다고 해줘도 소용없어.」
「떠나겠다는 거냐?」
「그런 게 아니잖아!! 난.. 난..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왜냐면.. 왜냐하면...」
쇼류에게 무엇이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울음이 치밀어올라와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세게 억누르고 있었던 목 언저리의 손은 이미 풀려있었다. 쇼류에게 강하게 붙잡힌 팔이 아팠다. 그래도 놓지 않아주었으면 했다. 붙잡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게 말도 안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격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엔키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기린이지만, 결코 자비의 생물따위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리라. 죽어가는 안의 백성을 안주에도 넣지않고, 자신은 봉산을 떠나 헤메었다. 이탄이 쇼류 앞에 내동댕이쳤던 8년 분의 호적을 괴로워하며 받아들고, 죽은 이의 흔적을 읽어야하는 건 자신이었다.
-왕을 피해서, 자신은 살았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머리 속 어딘가에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왕이라도 끝에는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한다. 그렇다면, 왕따위는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흥왕으로 일어서 멸제로서 죽어가는 한 왕조의 치세따위는 지켜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쇼류는, 원하던 것 이상을 주었다. 스스로가 강해질 수 있을 정도의, 긴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그 긴시간의 생동안, 기린이 완전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나라의 왕, 자신의 주상뿐.
기린은 왕을 따른다. 왕의 그림자를 따르고 왕의 주변을 지키며 왕의 명을 받드는 인도의 화신. 왕이 죽으면 기린도 죽는다. 기린이 죽으면, 왕또한 죽는다. 일생을 걸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단 하나뿐.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왕, 단 하나 뿐이다. 그 것을 깨닫는 순간에 기린이 왕의 것이듯 왕이 기린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 구속처럼 느꼈던 그 맹약들은 어느 새인가 왕은 기린없이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증표처럼 변해있었다.
5백년의 치세. 길고 긴 시간. 아득해질만큼 긴 시간을 하루처럼 보내왔다. 녹색으로 물들어가는 대지를 바라보고, 그 대지를 만들어준 왕의 뒤를 쫓아서 지내왔다. 언제나 앞에 서 있는 쇼류의 뒷모습을 봐왔다. 언제나 곁에. 곁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그 곁에.. 보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같은..흐윽...」
울음에 삼켜져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붙들린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결국 말해버린 자신이 또 한심해서 엔키는 다시금 울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왕의 곁에 그 가족이 있었더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5백년이라는 시간동안, 자신이 쇼류의 가족이었다. 가족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의 곁에 서 있었던 아름다운 여인. 그녀에게 빼앗겨버릴 것들이 두려워서. 무서워서. 하지만, 그래도 말할 수는 없어서.
..그래서 떠나있자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치미 떼지마, 민가의 여인을 만나고 있잖아!!!」
당혹한 것처럼 말하는 그 모습이 화가나서, 또 억울해서 엔키는 소리질렀다. 울음기가 아직도 배어있는 목소리가 칼칼하게 울려도 쇼류의 떨떠름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쇼류의 표정이 변했다. 당혹스러워하던 얼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윽고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리고...
「...바보냐, 너는!!!!」
...지나가던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할 만한 일갈.
5백년의 치세를 자랑하는 안의 현영궁. 비록 그 초기시절 연왕이 해체시켜버렸었다해도 5백년의 윤택함 속에서 현영궁은 조금씩 아름다워져갔고, 지금에 와서는 과거 이상의 위용을 자랑한다. 그리고 하나의 궁이 호화로움을 누리게될때까지 걸린 긴 5백년이라는 시간동안, 전혀 변하지 않은 안의 관리가 셋. 물론, 외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주상. 오늘도 직무태만의 죄를 저지르고 계시다는 걸 알고는 있는 겁니까. 모처럼 기린께서 정무에 복귀하셨는데도.」
책상 앞에서 졸고 있는 쇼류를 향해 서류를 안고들어오던 슈코우는 용서없는 독설을 쏘아댔다. 그 얼굴이 미소짓고 있다는 게 더 무섭다면 무서운 부분이었지만, 5백년동안 시달리면서도 변하지 않은 쇼류에게 그 미소는 이미 효과가 없어진 상태였다.
「뭐야, 불만이 있으면 기린에게 가서 하라고.」
「그야 당신들 두분께서는 언제나 함께 문제의 논점이 되곤하셨지만 왜 거기서 기린이 나오는 겁니까. 원흉은 주상이실텐데요. 대체 이 사건 이 전날에도 외박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봐줘. 이유가 있었다니까.」
「미리 말해두겠습니다만 주상, 술집과 여인은 외박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피로에 지친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들어보인 쇼류에게 여전히 꾸밈하나 없이 생긋거리는 미소를 띄고 슈코우가 무섭게 몰아세웠다. 금방이라도 극지방의 북풍이 칠 듯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쇼류는 못내 졸립다는 듯 하품을 하며 허리춤에 있는 것을 꺼내보였다.
「틀려틀려, 이 거 때문이라고.」
「..뭡니까?」
의문스러운 얼굴을 한 슈코우에게 쇼류는 허리춤에서 꺼낸 것을 던졌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비단 주머니였다. 눈썹을 찌푸리는 슈코우에게 쇼류는 말없이 풀어보라는 몸짓을 했다. 주머니 안에는 색이 많이 바랜 천으로 싸인 네모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슈코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천을 풀어헤쳤다.
「이 것은...」
「코즈카(小柄)라고 하는 거야.」
천 안에서 나온 것은 손목에서 손가락 마디 하나정도의 길이인 작고 가느다란 단도였다. 천과 마찬가지로 매우 오래된 것같은 느낌이었지만 날은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슈코우 앞에서 쇼류는 다시 하품을 해대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검에 붙이는 장신구..같은 거랄까.」
「어째서 이 것이..?」
「..아아. 봉래의... 물건이거든.」
쇼류는 살짝, 멋쩍은 듯이 웃었다.
술집을 나오다가 만난 민가의 여인을 도와주었을 때, 그녀는 기뻐하며 몇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사양하면서 그녀의 짐을 들어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봉래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인은 수줍은 듯 반갑게 웃었다.
<어머, 저희 집에도 봉래에서 온 물건이 있답니다.>
<헤에- 어떤 건데?>
<작은 단도같은 것인데.. 조상님께서 식이 일어난 다음 날 마당에 떨어져있는 것을 주웠다고 해요.>
<단도?>
<예에. 현 왕이 서실 무렵에 얻은 것이라고 하니 정말 오래된 물건이지요. 대대로 소중히 아껴왔어요.>
<...>
<보여드릴까요?>
여인이 집까지 데려가는 것을 순순히 따라간 것은 반쯤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여인이 들고나온 그 것을 보았을 떄, 그 것이 코즈카라는 것은 한눈에 알았다. 일본도의 검집에 붙는 장신구다. 과거에 자신도 그런 것을 갖고 있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머나먼 과거에 늘 들고다니던 검. 검에 붙어있는 장신구. 그러나 그 것은 오랜 옛날, 부러진 검과 함께 그 과거의 땅에 두고 왔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며 여인에게 그 것에 대해 설명해주려 집어든 순간에, 숨이 멈추는 기분을 맛보았다.
칼몸에 새겨져있는 두 글자. 小松코마츠.
영원히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과거의 물건이었다.
「그 게- 정말 여러가지로 억지를 써서 받아왔지. 」
「확실히 주상의 봉래 이름이 새겨져있군요.. 신기한 일입니다.」
코마츠의 두 글자를 확인하며 슈코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5백년 전의 물건이 흠집하나 없이 보관된 채 원 주인에게 돌아오게 되다니. 신비하다면 신비한 일이었다. 쇼류는 다시금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 쪽이라고해도 5백년씩이나 지니고 있던 물건이니 당혹해하는 눈치였지만- 몇번이나 찾아가고 설명하고 해도 받아들이질 않아서 애먹었어.」
「..호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만, 주상. ..어떻게 해서 받아오셨습니까?」
「아무리 애써도 납득해주지 않길래 결국 왕이라고 밝혔지 뭐. 내 거라고.」
「.....주상!!! 왕위를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크,하고 쇼류는 입을 다물었다. 슈코우는 무섭게 눈매를 찌푸렸다. 이런저런 곳에 팔랑거리며 뛰어다니는 이런 인간이 왕이어서야 국민이 실망한다는 내용의 설교라면 하루 이틀 들은 것이 아니었지만- 까지 생각했을 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쇼류!! 이 멍청한 놈이!!」
왕의 내처에 쳐들어오면서, 그 것도 저런 무례한 언행을 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이탄, 자는 쵸토츠. 이제와서는 그 폭언조차 익숙해지고, 더욱이 이런 순간에서는 더더욱 반가운 것이다. 쇼류는 두 손들어 이탄을 환영하려했다.
「야아, 이탄- 아침부터 어서..응?」
「이탄님-!! 먼저 가시깁니까!」
「이,이,이 멍청한 왕같으니!!」
얼굴이 시뻘개질정도로 열이올라 소리지르는 이탄의 모습이야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었지만, 오늘의 그는 조금 이상했다. 이탄은...
「바보를 안고있네?」
「시끄럽다!!!」
등 뒤에 금빛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 채 쌕쌕 자고 있는 기린을 업고 있었다. 엔키를 업은 채 세이쇼가 숨이 달린 채 쫓아올만한 속도로 뛰어오다니, 과연 무장이라고 할까, 그 이전에 분노의 힘이 더 컸던 것같지만. 이탄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업고 온 기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엔키는 쥐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기린께서 피곤한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하지만 이탄, 이건 대체..」
「이건이고 대체고 잘 봐라!!」
「어어, 나도나도-」
「닥쳐!!」
쇼류를 싹 무시한 채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로 엔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휘익, 하고 슈코우의 머리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 얼굴은 그답지 않은 당혹으로 물들어있었다.
「누구 짓입니까?」
「물어봤더니 딱 한마디 하더라, <어제 쇼류 때문에 잠을 못자서>!!!」
이탄은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쳤다. 그 것으로 사형선고는 내려진 것같았다. 얼음이 얼어붙은 듯 싸늘한 얼굴로 슈코우가 쇼류를 쏘아보았다. 신선이 아니라면 눈빛만으로도 죽일 수 있을 것같은 차가운 얼굴이었다.
「..주상.. 당신이라는 사람은..」
「뭐,뭐야?」
「엔키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당신 맞습니까?」
「응? 뭐가?」
「잠자고 있는 게 뭣때문이냐고 묻는 거다!!」
노기등등해서 외치는 이탄을 보고 위험하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거리낄 것이 없었던 쇼류는 한동안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엔키가 자고 있는 거라면, 그야 어제 여러가지 일도 있었고, 거기에 그 민가의 여인이랑 저 물건에 대해서 설명하고 달래느라-
「나 때문에 늦게까지 못 잔 건 맞을 텐데. 그게 왜-」
「죽어라!!!」
「죽어주시죠.」
「저도 동감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펄펄 뛰고 있는 이탄이 검을 뽑아들었다. 슈코우는 말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평소라면 두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이었을 세이쇼도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쇼류는 식은 땀을 흘렸다.
「대,대체 뭣 때문에...」
「이제와서 발뺌하는 겁니까, 주상.」
「슈코우! 이런 바보같은 놈에게 일일히 경어를 써줄 필요는 없어, 당장 매달아, 매달아!」
「기린도 왕도 정말 문제많은 주종이군요..」
「그러니까, 나는-」
「도대체가 당신은 왕이라는 자각도 없는 겁니까!!」
아직까지도 쇼류를 명민한 왕이라 여기고 있는 총재 하쿠타쿠는 때로 이 방약무인한 행태에 기겁을 하는 듯하지만, 조의 빼먹기 일쑤인 왕을 무시로 일관하며 나라를 꾸려온 세 사람에게 이 헐랭한 왕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두통거리정도의 사고뭉치다. 따라서 존경도 예우도 없이 몰아세우는 이 세 관리의 빼도박도 못하게 확실한 3박자에는 제 아무리 나라의 국왕이라도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이 세사람이 화내는 이유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반론 한 번 할 새도 없이 무섭게 쏟아진 세 사람의 잔소리에 두통이 밀려와 이마를 짚고있는 쇼류로부터 마침내 기가막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체 뭐야?!;;」
그 말과 동시에 이탄의 얼굴이 무섭게 부풀었다. 일순 세이쇼가 말리려한 것같았으나 때는 이미 늦어, 이탄이 시뻘개진 얼굴로 외친 말은 쩌렁쩌렁 울렸다.
「저런 땅꼬마 기린에게까지 손을 뻗치다니, 왕은 고사하고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하?」
무슨 소리야-- 설마! 뇌가 이탄 분노의 외침을 해석하는 것과 동시에 쇼류는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로쿠타의 앞섶이 비스듬하게 열려있었다. 죽음을 앞둔 무시무시한 순간인 자신에게조차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로쿠타의 목 언저리를 둘러싼 몇개의 붉고 푸른 멍자국.
위험하다. 너무나도 오해하기 딱 좋다. 아니, 오해당하고 있다. 쇼류는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필시, 어젯밤에 생긴 것이리라. 그러고보면 울음을 참으며 목 언저리를 누르고 있었던 로쿠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명해야한다. 해명해야한다, 이건----
「자,잠깐만, 그러니까 이건 이유가 있어서!!」
「문답무용!!!」
우..우와아아아악-----------!!!!!
그 날, 왕의 비명은 모처럼만에 완연한 분노 모드로 돌아선 세사람의 합동공격에 현영궁 창을 지나 운해 넘어까지 멀리멀리 울려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비명소리에 놀라 일어선 금빛 머리칼의 기린은, 눈앞의 풍경에 어리둥절한 탓에 왕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 안국 5백년 치세에 처음으로 있었던 기린의 칩거사건은, 이렇게 해서 끝났다고 한다.
fin.
"우하하하하!!! 푸하하하!! 하,하,아하하...!!"
"...그만 웃어, 로쿠타"
"우하하하,하,하지만, 너,너... 푸하하하!!"
"그만 웃어, 칙명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모든 상황을 깨달은 기린이 한참동안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이제는 안국의 서기관조차 세는 것을 포기한 국왕의 대(對)기린용 칙명이 또 한번 발령되었다는 후일담이 하나.
블로그에도 좀 풀어놔야지 싶어서 아무거나 골라잡았는데 고리짝 시대의 연성이네요.
손보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올립니다. 이게 아마 화서지몽이 나오기 전에 쓴 거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