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아만다, 에밀리, 에스더, 이름 기억 안나는 남자가 3~4명정도.

여인은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휴게소의 내부를 구석구석 뛰어다니며 놀았다. 함께 있는 것은 검은 머리의 소년. 소녀는 소년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두 사람의 술래잡기는 천진만난했고 시끄러웠고 풋풋한 향내가 배어있었다. 검은 마루 위를 딛는 소녀의 발걸음이 어지럽게 춤추었고, 소년의 발걸음도 그 걸음걸이에 따라 섞여들어갔다.

소년은 순수종 흡혈귀였고 소녀는 흡혈귀의 권족의 피를 이어 태어난 소녀였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아꼈고, 함께 성장했다. 다를 것은 무엇하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순수종의 피를 잇는 아이답게 빠르게 성장했다. 여인과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과거 그들이 함께 곧잘 놀았던 휴게소로 향했다. 키큰 거목에 둘러싸인 그 곳은 인간들에게도 개방된 장소였다. 여인도 남자도, 그리고 아이도 별로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평화로웠다. 처음 만났던 순간의 이야기를 거닐며 장소에 배인 추억을 들이마시던 그들의 시야에 비틀거리는 여자가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술에 취한 여자는 은색 탄환이 든 총을 들고 날뛰다가 아이를 겨누었다. 여인은 몸을 날려 자신의 아이를 감쌌다. 술취한 여자의 총은 여인을 꿰뚫었다. 남자는 울부짖었고 여인은 얼마 가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여인의 남동생은 그네에 앉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네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아이는 표정없이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청년은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무릎에 앉힌 아니는 무겁고 따뜻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상심해서 떠난 후에 아이는 모계혈족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여인의 남동생은 발랄한 성격으로 인간들과 섞이는 것을 좋아했다. 피가 이어진 몇명의 가족들은 함께 어린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쾌활한 린다는 아이앞에서 자신이 놀려준 인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아만다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런 그녀를 나무랐다. 린다는 대학의 여자 기숙사에 있었으며 아만다는 혈족들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린다의 기숙사에 은색 총을 든 강도가 든 것은 아만다와 린다, 빌리를 비롯한 일곱명의 혈족들이 자신들의 틀 안에 들어온 어린 조카-5촌-6촌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인간들을 놀리기 좋아하는 린다는 소악마같은 성격이었고 강도를 자극하지 않고 일을 마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는 일을 무사히 끝내야할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은색의 총과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여자 강도. 린다는 사랑하는 사촌언니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식, 옆모습, 미소, 장례식, 그리고 사촌언니를 저격한 증오스러운 여자에 대한 것까지도. 린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폭발시켰다. 흡혈행위보다는 상대의 죽음을 우선시한 그녀의 행동은 혈족의 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상대를 갈갈히 찢어놓았다.

'나쁘다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이사는 해야겠어.' 빌리는 조카를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여덟명의 흡혈귀는 그날저녁 즉시 그 곳을 뜨기로 결정했다. 자택의 짐을 정리하던 아만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장 하나가 통째로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다, 내 책은?' '미안, 기숙사에 놔둔 채야.' 아만다는 혀를 찼다. '놓고 가지 그래?' '그럴 수 있을리가 없잖아.' 아만다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날 저녁, 아만다는 떠나는 동족들과는 반대길로 해서 린다의 기숙사로 향했다. 사건이 있었던 5층에는 현장을 지키는 경찰과 남자 기숙사의 학생들이 어지럽게 섞여있었다. 그중 한명은 추춤하는 아만다에게 다가왔다. 있는대로 신경을 곤두세운 아만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친한 척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위험하니까 바래다 줄게.' 아만다는 남자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머리 속으로 린다의 방번호를 더듬으며 함께 걸음을 옮겼다. 린다의 방을 따고 들어갔을 때 익숙한 책들이 보였다. 아만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책들을 집어넣었다. 남자는 뒤에서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5층으로 왔어? 4층의 직행 엘레베이터가 따로 있는데.' 아만다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만다가 뭐라고 하기도 전, 남자는 웃으며 그녀의 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좀도둑질이지? 요새 기승을 부리니까. -가만히 있으면 너나 나나 좋게 끝날 거야.' 아만다는 책을 집어넣은 가방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미안, 린다.' 아만다는 작게 중얼거리고 덮치려는 남자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남자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는 동안 아만다는 그의 몸에 자신의 혈액을 밀어넣었다. 경악으로 크게 떠진 남자의 눈을 응시하고 아만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린다의 기분을 싫을 정도로 알겠어. 쓰레기는 살려놓기 싫은 법이지.' 그와 동시에 아만다는 남자의 목을 쳤다. 이어 아만다는 차례차례 남자의 두 팔과 두 다리를 꺾어놓았다.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사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경악에 찬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아만다는 마지막 금주를 걸었다. '나에 대한 걸 떠올리면 너는 죽어.' 남자의 눈은 급격히 빛을 잃었다. 아만다는 그를 린다의 침대 밑에 밀어넣었다. 책을 가득 담은 가방을 둘러메면서 아만다는 '그 것'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마취와 약간의 치료제를 겸해 집어넣은 혈족의 피는 얼마 후면 그의 몸 속에서 용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책이 잔뜩 든 가방을 멘 채 아만다는 가벼운 걸음으로 혈족의 뒤를 따랐다.


인간을 정말 별 것 아닌 걸로 취급하는 다른 종의 기분이 느껴져서 즐거웠던 꿈.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휴게소, 그 곳의 화장실, 은색 총을 든 여승차림의 강도, 그네, 아이의 귀밑머리, 살인, 린다의 책, 여자기숙사, 경비를 서던 남학생, 아만다의 기숙사, 검고 큰 가방, 분노, 살인.

에스더의 어린아이 레일리, 흡혈귀 일족의 진혈. 에스더의 사망, 두 사람의 위로, 린다의 폭주,
Posted by 네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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