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시 한복 판을 가로지르는 열차는 한참을 올려다봐야하는 고가도로를 건너가곤 했다. 덜컹, 덜컹, 덜컹. 지금으로부터 20년전쯤 내 할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만나기 위해 그 고가교 한복판에서 열차를 세웠다. 뭐가뭔지 알 수 없는 조직의 두목이었던 할아버지는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엄마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를 태우지 않은 열차는 덜컹거리며 목적지로 출발했고 임시 정차때에 몸을 빼낸 할아버지는 고가교의 위태로운 사다리를 한단한단 밟고 내려갔다. 이미 고령이었던 할아버지가 그 고가교를 무사히 내려온 것은 전적으로 열차에서 따라내린 한 청년의 공이었다. 발 닿는대로 여행중이라던 청년은 할아버지를 바치며 함께 내려와주었다. 새벽녘의 인적 드문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온 아버지는 딸과 만났고,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함께 온 청년은 한 늙은 노인의 회한을 보았고, 평생을 사랑할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흔한 이야기라면 흔한 이야기.
2. 아버지는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한 주에 한번, 새벽이 되면 반드시 베란다에서 서성이다가 들어왔다. 담배도 술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나는 여러번 궁금해했지만 커튼너머를 쳐다본 적은 한번도 없었고, 엄마도 가볍게 흘려넘겼다. 베란다에서의 그 행동은 아버지의 이상성의 정점같은 것으로, 아버지는 평소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고는 했다. 방 한켠에 물잔을 놓아둔다던가, 허공을 쳐다보다가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던가.
그 상자가 우리집에 날아든 것은 우연이었다. 벨을 눌러 나간 밖에는 술주정뱅이가 서 있었다. 큰 돈이 될 것이라고, 돈을 벌었다며 그는 상자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미친듯이 웃어재끼던 주정뱅이는 거실로 들어와 물 한잔을 얻어마셨다. 그리고 그는 그 소중하다던 상자를 놓고 갔다. 상자를 집에 둔 날에, 나는 창문 밖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기척을 눈치챘다. 커다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그 것을 나는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다. '이 곳의 시우들이 아니구나.' 딱 한마디, 꿈결에 들은 것같은 목소리는 그림자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가늘었다.
돈을 벌었다며 술에 취해 들떠 있었던 남자는 그 상자를 우리집에 맡긴 다음 날 뉴스에 나왔다. 전신이 시커멓게 멍들어 죽어있다는 뉴스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놀라움 외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커다란 검은 물체와, 그가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이 곳의 --이 아니라면, 그는. 하루가 지나기 전에 나는 마을에서 울며 달려가는 여자아이와 부딪혔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랗고 시커먼 멍이 있었다. 우는 소녀는 같은 병으로 쓰러진 어머니와 언니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는 어제 죽은 남자의 딸이었다.
집에 달려왔을 때, 나는 지금껏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전신에 살아있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에 이끌리듯이 뛰어갔다. 어머니는 그 상자를 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아서.'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풀과 짚덩어리 네 개였고, 어머니는 그 중의 세개를 싱크대에 버린 참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그 것들을 낚아챘다. 나는 상자째로 안고 베란다로 뛰어갔다. 밤이 내려앉은 그 곳이 아빠에게 어떤 곳이었는지,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상자를 내려놓고 나는 가스버너를 꺼내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젖은 세 개의 짚덩어리를 불 위에 올렸다. 창 밖에서 무섭게 빗소리가 났다. 아니, 그 것은 웃음소리였다. 허공을 맴도는 무언가들의. 베란다에서 나오던 나는 거실로 들어오던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내 등 뒤에서 불 소리가 났다. 젖어있던 프라이팬 속의 짚덩어리가 타고 있었다. 나는 ㅡ 프라이팬을 들어 상자 위에 집어 던졌다. 타는 소리가 울렸다. 강한 바람에 밀려 불은 퍼질 듯 말 듯 타올랐다. 상자의 불은 안간힘을 쓰듯이 우리집의 커튼을 붙잡으려고 애쓰며 타들어갔다. 불로 태워서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상자를 낚아채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죽은 것은 그의 죄였다. 놓여있던 상자를, 금은보화를 그리며 훔친 그의 죄가 그를 죽였고, 저주의 매개물이던 짚덩어리들은 나눠진 숫자대로 그의 관련자를 죽였다. 그와 그의 가족, 모두 합쳐서 4명을.
그 날 밤에 커다란 그림자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 나는 그 것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네가 상자를 태웠구나?' 커다란 덩어리는 형체가 없었다. 녹아 흐르는 거대한 흙더미. 그 것이 내가 그 형체를 보고 처음 떠올린 이름이었다. 그 것의 내부에서는 검은 색이 뭉글뭉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가느다란 목소리를 가진 그 것은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부정을 처음 만졌을 때부터 소용이 없던 거야.' 나는 발끈해서 그 것을 쏘아보았다. 거대한 덩어리는 굼처럼 안쪽으로 밀려들어와 무너져내릴 것처럼 빛나고 있는 갈색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덩어리에서 비어져나온 산같은 것이 내 손을 움켜주었다. 뜨거운 물에 잠겨있던 손을 갑자기 찬 물 속에 집어넣은 것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그 검은 것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잘 가. 시우.' 덩어리의 가운데가 좍 찢어지며 그 것은 소름끼치게 웃었다. 그리고 그 것은 몸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내 손에서는 시커먼 멍이 남아있었다. 그 것은 내가 봤던 소녀의 것과는 다르게, '살아있었다'. 무언가에 닿으면 저 속은 금새 나를 침식 시킬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식으로 죽여가는 것이다. 그 검은 것의 독은. 베란다로 나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공속에는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것들이 얽히고 섥히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게 아빠가 봐왔던 풍경이다. 그걸 알게되는 순간 죽음이 눈 앞에 왔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어두워지고 나자, 베란다에 나가있던 나는 허공에서 거꾸로 떨어진 여자아이의 그림자에 흠칫 놀랐다. '---. 언제나처럼 키스해줘!'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나는 그 것의 정체를 알았다. 물에 빠져죽은 여자아이의 유령이다. 한 주에 한번 베란다를 서성이는 아버지의 버릇은 이 아이를 위해서였다. 가족과의 스킨십을 떠올려 흉내내는 것만이 이 아이의 유일한 위로였다. '어라, ---가 아니네.' 가벼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불빛 아래서 보는 아이의 얼굴은 장난기 어린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다. '썩어서 일그러져있을 줄 알았어?'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그녀는 내게 왔다. 나는 손을 들어보였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다. '모아스그란테의 저주네.' '그게 뭐야?' '썩어들어가 죽게될 거야. 그 부분만.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 닿은 대상도 부정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그 저주밖에 없어.' '그럼 너는 나에게 닿으면 안돼.' '그 손으로 만진 것이 무엇이건 함께 썩어들어갈테지만, 손이 아니면 괜찮아. 내게 필요한 건 입술이면 되니까.' 소녀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웃었다. '물풀 사이에 드러누워서 자신이 녹아흘러내리는 감촉, 느껴본 적 없지? 축축하고 차가운 물이 전부야. 그 속에서 딱 하나, 입술께에 느껴지는 체온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알겠어? 당신이 위험한 인종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소녀는 새가 입술을쪼는 것같은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녀가 세번째로 찾아왔을 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대신해서 베란다에 서 있었다. 팔 전체를 점령한 검은 멍을 신기한 듯 쳐다보던 그녀는 키스의 마지막 순간에 내 손에 자신의 팔을 가져다댔다. 놀라서 뿌리쳤지만 때는 늦어있었다. '과연, 일그러진 자의 저주는 죽은 자에게도 닿는 거구나.' 팔에 남은 검은 자국을 보며 즐거운 듯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시우의 저주를 나눠받는 거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검고 커다란 덩어리는 신기한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주받은 시우에게 닿겠다는 게 있네. 원한다면 너에게도나눠줄 수 있어.' 덩어리는 그녀쪽으로 몸을 뻗었다. 나는 그 앞을 막아섰다. 돌진하듯이 덤벼들어 그 것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손에 닿는 딱딱한 덩어리를 비틀어 끊었다. 그 것은 비명을 질렀다. 진흙덩어리들이 뚝뚝 바닥에 떨여졌다가 사라졌다. 그 것이 지독한 소음을 내며 나를 덮쳤다. '날 때부터 일그러지게 태어난 기분을, 네가 알아?' 그 것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흙 한덩어리가 내 옆구리에떨어졌다. 생 살을 뜯어먹히는 듯한 고통에 나는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나는 그 것의 정체를 알았다. 벤시를 처음보았을 때 그녀의 유래를 알았듯이. 그 것은 그의 말대로 일그러진 채 태어난 생물이었다. 이름조차 붙여질 수 없는 부정의 덩어리. 조그맣고 사랑스럽던 아기에게는 세번째 팔이 있었다. 그 기형을 괴로워하며 부모는 아이를 버렸다. 그 일그러진 팔은 부정의 집합체로, 생명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기는 그 팔을 갖고 있었으며, 하물며 그 팔은 아기의 일부였다. 자라나면서 팔의 뒤틀림은 심해졌고, 기형과 부정은 아이를 뒤덮었다. 그 즈음에서 아이에게 본디 갖고 태어난 정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는 부정에 잡하먹혔다. 일그러짐이 형체를띄고 살아있는 괴물이 되어 헤매게 되었다. 의식을 잃을까싶은 순간에 작은 새가 그 것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 것은 멍하니 새를 바라보았다. 새의 부리에서부터 새카만 것이 퍼져나갔다. 그 것은 옅게 웃었다. '그래, 너도.' 동이 터올 때가 되어 그 것은 나를 내버려두고 사라졌다. 작은 새도 뒤를 따르듯 창가에서 날개를 폈다. 그 날개에는 검은 손자국같은 멍이 들어있었다. 나는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소리는 아무 것도 나지 않았지만 나를 돌아본 새는 짧게 우짖었다. '이제 내 얼굴은 보여주지 않을래. 엉망이 되어버렸거든.' 울음소리는 소녀의 목소리로 들렸다.
고통 속에 정신을 잃었다가 깼을 때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는 나를 안은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규정따위는 닥치라고 해, 내 아들이 죽게 생겼어.' 나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몸에 멍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나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과거 몇 차례나있었던 감각과 마찬가지로, 벤시와 그 것의 과거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아버지의 과거를 보았다. 인간에게는 그럴리가 없는데. 정보를 받아들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아버지도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 나를 낳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전화 걸고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채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라우, 나 왔어.' 덩어리는 스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 왔냐.' 남자는 손을 들어 그 것을 향해 내밀었다. 진흙같은 것이 뒤로 물리며 얼굴이 나타났다. 눈동자를 뒤덮고 있던 갈색 진흙이 뒤로 빠져나가자 거기에는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진흙같은 덩어리 속에서 나타난 소녀의 얼굴을 보여 남자는 얼굴 색하나 변하지 않은 채 웃었다. 그를 라우라고 부른 그 것도 웃었다. '오늘 신을 봤어.' '엥?' '지상에 있었어.' '허어..' '놀라지 않아?' '너를 만났을 때부터 왠간한 건 내성이 생겨서. 그나저나 신이라니 오래 살겠지? 부럽네.' '응?' '거 뭐냐, 난 인간이니까 금방 죽잖아. 너를 두고 간다는 게 아무래도 맘에 걸려서.' '..괜찮아, 내 라우는 당신뿐이니까.' 부정의 집합체는 웃었다. 남자도 멋쩍게 웃었다. 이 인간남자의, '라우'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이따금씩 넘쳐흐르는 부정을 뽑아내 버리는 것은-다른 인간을, 아무 가치도 없는 시우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