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은 오후 수업시간이었다. 커튼을 쳐서 어둑어둑한 교실 안에는 여름철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고, 나직하게 울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음악처럼 지루했다.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그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비꼬는 듯한 말을 던졌다. 12년 평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당황했고 그게 나라는 걸 알고서는 출석부를 곁눈질로 보았다. 우리 반에는 나와 이름이 같은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평생 규격에서 벗어난 적이 없을 법한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무슨 일에서도 자신이 최선인 아이였다. 학교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경제선생님은 이 당혹스러운 순간을 빠르게 현실적인 것으로 치환했고, 그녀는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아이로 취급했다. '너 xxx구나? 다른 애는 착한데 말이지, 정말.' 혀를 차는 그녀의 말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졌고, 나는 가방을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다음 날 다시 나간 학교의 분위기는 달랐다. 교무실에서 호출이 있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굴에 상처가 남은 여자는 울면서 나를 손가락질 했다. 아무래도 좋아요. 여기는 이제 내게 의미가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주 앉아있었던 선생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12년 동안 참아왔어요. 삐뚤어지지 않게. 옳게. 그게 편한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러면 언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거죠?
내 복역기간이 이제야 끝났어요. 그러니까 내버려두세요. 내버려두세요.
2. 아버지는 친구들을 데려온다는 사실에 염려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치즈케이크를 사들고 다같이 별장으로 놀러갔다. 크림치즈를 많이 넣어 구운 케이크에 피칸파이의 층을 겹겹히 쌓은 맛있는 케이크였다. 우리는 다같이 케익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아버지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창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조금 창백한 얼굴에 양복을 빼입은 아버지는 여느 때보다 젊어보였다. 턱에 듬성듬성 나있는 수염이 어색해보일만큼. 그 수염만 없었더라면 아버지는 내 동생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잔을 손에 들고 건배를 한다음 커다란 병에 음료수를 넘치도록 붓고 그 안에 작은 방울토마토를 하나 넣었다. '게임을 하지요, 한분은 이 방울토마토를 음료와 함께 드시게 될 겁니다.' 웃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피폐한 것에 걱정하며 나는 순서를 기다렸다. 앞사람부터 차례차례 나가서 커다란 병의 밑부분에 달린 주둥이를 돌려 음료를 따랐다. 내 차례가 되어 음료를 따랐을 때 내 잔에는 음료만 가득 채워져있었다. 뭐 이렇지. 그렇게 생각하며 음료를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내 옆자리의 친구가 미안하다는 듯 자기 잔을 건넸다. '저기, 나 토마토가 걸렸는데.. 나랑 바꿔주면 안될까? 나 못먹거든.' 그래 뭐. 나는 별 생각없이 그녀와 나의 잔을 바꾸었다. 음료를 들이키자 입안에 방울토마토가 들어왔다. 혀끝으로 굴리다가 그 것을 삼켰다. 즐거운 연회가 끝나고 아버지는 토마토의 주인을 찾았다. 내가 손을 들자, 아버지는 창백한 안색에 웃음을 띄우며 나를 다른 방으로 불렀다.
내가 너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했었니? 아름다운 사람이었단다. 그리고 그녀는 굉장히 꿈꾸는 사람이었어.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몸이 안좋았단다. 오래살지 못할 거라고 했지. 그녀는 그걸 견딜 수 없어했어. 그리고 그녀는 연구를 거듭해서 내게 약을 만들어주었단다. ..그녀도 먹었고. 나는 더이상 아프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오래오래 살았지.
오래오래.
약효가 먼저 떨어진 것은 그녀 쪽이었어. 그녀가 나보다 연상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자신이 조금씩 늙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너를 낳았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죽었어. 너는 굉장히 천천히 자랐지만 상관없었어. 내 세계에는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남은 힘을 모아 약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단다. 나한테는 아마 효과가 없을 거야. 이미 내성이 생겼을 테니까. 나는 차마 네게 그걸 먹으라고 할 수가 없었단다. 너는 혼자가 될테니까. 그래서 그 파티장에서 토마토를 음료에 넣었지. ..그리고 너는 그걸 먹었더구나.
..아버지?
그 토마토에 '약'이 들어있었단다. 지금쯤 네 안에 다 녹았겠지. 미안하다, 얘야. 미안해.
단 한가지 부탁이 있단다. 약을 먹은 사람이 누구든 간에 부탁하려고 했었어. 나를 죽여주렴. 나는 네 엄마의 곁으로 가고 싶어서 계속, 계속 견딜 수가 없었단다. 미안하다, 얘야. 정말 미안해.
3. 오늘도 꿈을 꾸다가 깨었다. 꿈 속에서 나는 아름다운 여인을 안은 채 가파른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몇번이나 몇번이나 내게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피를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말했다. 여자의 팔에 흉측한 개구리가 달라붙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떼어내려했지만 나는 그러지 말라고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면 견딜 수가 없는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옷깃 위에 달라붙은 개구리로부터 눈을 돌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올라가 그녀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이제 살았네요, 하고 웃으려는데 갑자기 내 발밑이 무너졌다.
꿈에서 깬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꿈속의 그녀를 꼭닮았다. 악몽을 꿨어요? 걱정스럽게 묻는 그녀에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마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니었나해요. 내가 쑥스럽게 웃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고 신비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무리해도 일이 풀리지 않아 절망하고 있을 때 그녀가 뭔가 속삭여주기만하면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었다. 그게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기묘한 방법이라 해도. 당신은 선녀인가봐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 것조차 귀여웠다. 꿈 속에서 나는 당신을 업고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요. 그리고 당신을 구하고 나는 죽죠.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저도 그 꿈을 기억해요. 정말이요? 정말 전생일까. 나는 당신을 구하려고 필사적이었어요. 고마워요. 정말.. 뭘요. 당신도 개구리를 참았잖아요. ..개구리..요? 네, 당신 팔에 달라붙은 흉측한 개구리. 떼어내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당신은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고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미안, 화났어요?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걱정되어 뒤쫓아갔다. 부엌으로 간 그녀는 칼을 집어들고 하다만 요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화났어요?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당황할 만큼 필사적이 되어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푸욱- 차가운 것이 뱃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철철 흘러나오는 빨간피가 부엌을 뒤덮었고, 시야가 까맣게 되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부엌 한 가운데서 피로 물든 칼을 취고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개구리였어요. 당신이 말한 흉측한 개구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