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익숙한 그 아파트 단지의 길이었다. 학교가 끝난 걸까. 친구와 나란히 걸어가다가 새카만 길을 멀리 바라보며 무심코 말했다. '알고 있어? 괴물이 나온대.' 무슨 뜻이야? 친구가 천진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무튼 괴물이 나와서 습격한다나봐. 인간도 동물도 아닌 그런게. 그런게 어딨어. 웃는 친구의 눈가가 가볍게 떨리고 있다. 너무 겁을 주젔나 싶어 그냥 아니라고 고개를 도리질쳤다. 다음 날, 학교에 온 친구는 일찍 조퇴했다. 언제나 있는 일이지 뭐. 머리를 긁적이고 그날은 혼자 집에 돌아갔다. "살려줘, 살려줘!!" 어린 하급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이.. 괴물이 있어!!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울고 있다. 뭐지? 뭐야? 전화를 들어 신고하고 사람들과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비틀비틀 걸어나온, 손끝에 피를 뭍힌 괴물. 머리는 작은 족제비처럼 구겨져있고, 치켜든 팔에는 낫처럼 길게 휘어진 손이 붙어있다. 사람들은 괴물에게 달려가 붙잡아서 자루 안으로 집어넣는다. 꽥꽥 울며 저항하는 괴물의 낫처럼 생긴 손끝이 스쳐 피가 났다. 문득 깨달았다. 너..너는..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그 괴물이 자루를 찢고 도망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아침을 마저 먹었다. 학교로 가자,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 안녕. 어제 괜찮았어? 아, 응. 조퇴했다길래 걱정했잖아- 미안미안, 열이 좀 나서. 지금은 괜찮아. 쑥스러운 듯 웃는 그녀의 손가락에는 밴드가 감겨있다. 다쳤어? 응, 그런 것같아. 어디서 긁혔나.. 다른 손으로 손을 감싸며 웃는 그녀에게, 나는 다만 그래, 하고 웃고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학교 앞 벚꽃나무 풀빵장수
비탈길의 중고옷
육교를 건너 걸어가면 보이는 숲 속 광장. 노래하는 사람들. 돌아오는 길. 물.
도로. 잃어버린 길. 교차로.
자전거와 마을.
2. 마법사 가문인 우리집은 대부호였다. 어느 날에, 정원 한구석에 사람 모양의 조각상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온다. 이게 뭐지? 어머니도 나도 당황해서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다양한 사람들의 형상에는 반짝이는 스팽글로 아로새겨진 무늬같은 것들이 새겨져있다. 어머니와 함께 밑으로 내려가자, 아무 것도 없던 천장에는 화려한 벽화가 새겨져있다. 위 쪽에 조각상이 들어선 것과 같은 느낌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반쯤 당혹스러워하는 어머니의 말에 나도 벽화를 올려다보았다. 비늘같은 금속 무늬가 이따금씩 노란색으로 반짝인다. 저건 대체 뭘까. 문득 중얼거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러게, 샛노란색이구나. 어머니의 눈에 금속같은 이물감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위로 올라가자 사람들이 정원에 내려앉은 조각상을 치우고 있었다. 저 금속같은 건 뭐야? 그냥 노란색인데요, 아가씨. 문득 그게 무엇인지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정원에 내려앉은 조각상이나 벽화로 부터 연한 흰색 안개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방사능입니다. 마을이 오염되고 있어요. 안개에 뒤덮히는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대피소로 향했다. 먹을 것도 음식도 충분히 있다. 몇 명인가의 친척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서 우리는 창밖으로 하얗게 내리는 안개같은 방사능을 바라본다. 십여명의 사람들이 대피소로 들어왔다. 별로 연관도 없고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받아들인 이후 대피소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입구에 마법을 건다. 열리지 않을 때는 무너져가는 반지하의 창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피소의 문에서 보이는 빨간 우체통. 오염된 마을에서 사람들은 우울하게 살아간다. 크리스마스의 아침날, 성대한 식사가 차려진다. 부럽군요. 다른 대피소의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즉석에서 식탁 위의 음식중 몇 접시인가를 그에게 건넨다. 기뻐하는 그를 보고 웃고 있는데, 한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식탁 위를 갈랐다. 내가 왜 내 음식을 저런 남자에게 줘야되는 거에요?! 살찐 여인의 옆에는 겁먹은 듯한 어린 딸이 붙어있다. 내 음식이라니. 이 대피소에서 당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어머니는 즉석에서 그녀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여자는 화를 내다가 이내 순응한다. 딸아이는 두고 가겠어요. 오염된 거리로 나서는 그녀의 뒤로 흰 눈이 내린다. 문을 얼른 닫으력 ㅗ노력하는 내 옆에서 그녀의 어린딸이 훌쩍훌쩍 울고 있다. 엄마랑 가고싶어? 응.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나는 다시 대피소의 문을 살짝 열었다. 아이가 머뭇거리다가 거리로 달려나간다.
3. 흰 눈 위의 자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