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은 좁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었다. 침대 밖으로 나온 새하얀 팔이 무심코 레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조각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도 그랬다.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고 고운 피부, 섬세한 체형. 우아한 시선. 그런 것들을 멍하니 떠올리는 사이에 시선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그는 웃어주었다. 침대 위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드러난 그 것이 일순간 하얀 깃털처럼 보였다. 엉겁결에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스치듯 닿은 손가락이 망설이듯 멈췄다가, 이내 부드럽게 얽혔다.
'좋아해, 신지군.'
손가락을 타고 전해오는 것처럼 나즈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정한 목소리에는 웃음이 배어있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열을 내었다. 어지러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만큼 머리가 뱅뱅 돌았다. 거짓말 같은 말을 들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붙잡은 손가락은 여전히 힘을 주어 그를 잡고 있었다. 그에게 잡혀있었다.
최초의 이해자.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
영원히 혼자라 생각했던 순간에 그는 곁에 와주었다. 무리해서 손을 뻗지 않았다. 나를 알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들이대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영원히 혼자라고 생각한 순간 나타나 조용히 곁에 있어주었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고, 그렇게 알려주었다. 단어로 정리하지 못한 말이 어지럽게 머리 속을 맴돌았다. 자신에 대한 방황, 아버지에 대한 미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 자신에 대한 증오, 갈 곳을 모르는 방황. 그리고 그를 향한 동경. 애정. 신뢰. 의심. 무엇하나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조용히 웃어주었다. 상냥하게 이해해주었다.
나는, 너를.
이카리 신지는, 나기사 카오루를.
...아마도 나기사 카오루가 이카리 신지를 그렇게 생각하듯이.
붙잡은 팔이 차가웠다. 다독이듯 끌어안아준 손은 한없이 따스했다. 시선이 교차했다.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한없이 다정했다. 부드러운 시선이 들리지 않은 목소리를 대신했다. 고요한 가운데 머리 속에서는 음악처럼 그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도리질치며 물러나려는 자신을 그가 가만히 북돋아주었다.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는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뜻이야, 신지군.'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영원처럼 흐른 침묵의 끝을 고하듯이. 돌처럼 굳어버린 무거운 손가락이 그제야 움직였다. 싸늘한 손끝이 그의 목을 감았다. 서늘한 피부에서 그의 고동이 전해져왔다. 그 자신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뛰고 있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쳐 그의 뺨으로 떨어졌다.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음악처럼 울렸다. 좋아해. 너는 행복해지길. 네가 살아남기를 바래, 그녀가 선택할 존재가 있다면 그건, 신지군, 너는-
..그의 음악에 감싸여,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눈물로 깬 꿈의 끝은 여전히 밤의 어둠 속에 감싸여있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변함없는 현실이었다. 꿈 속의 다정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남아있었다. 순백의 세계 속에서 그는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처음과 무엇하나 변하지 않은, 여전히 상냥한 얼굴로.
'좋아해, 신지군.'
떨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자국으로 엉망이 된 뺨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려진 시야 속에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치듯이 닿았던 손가락, 작은 방을 가득 채우던 목소리. '이카리 신지'를 이해해주던 그의 목소리. 나를 부정하지 않았던 최초의 사람. 기억 속의 그가 웃었다.
"..카오..루..군.."
두 손으로 얼굴을 눌렀다. 흐려지지 않는 기억 속의 얼굴과, 그만큼 흐려지지 않은 손에 남은 감각. 기억 속의 너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나를 응시한다. 그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는 또다시 너의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을 준다. 몇번이고, 몇십번이고, 몇백번이고. 아름다운 하얀 새를 죽이듯이, 저항없는 고동을 눌러죽인다.
"..카오루..군...."
흐느끼는 목소리에 대답은 없었다.
눈물로 젖은 손끝에는, 여전히 그의 감촉이 남아있었다.
fin.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