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터시아 국립공원은 도시 한가운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한 자연의 보고였다. 여기에 따라 달리면 국립공원 내의 호수와 거대한 나무들이 펼치는 절경을 볼 수 있게끔 되어있는 약 25km구간의 자전거 도로는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국립공원의 간판이었다. 알렐루야가 처음 그 곳에 가자고 관광지 홍보내용이 담긴 디스크를 내밀었을 때 록온-닐 디란디-은 썩 내키지 않아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지정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몸을 실었을 때는 그조차도 압도될 것같은 경치에 감탄하고말았다. 몇백년 이상 살아온 거대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완만한 산길 앞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과 새파란 호수가 펼쳐졌다. 도시에서는 맡을 수 없는 상쾌한 향기와 풀냄새, 페달을 밟을 때마다 쓱쓱 뒤로 스쳐가는 녹음진 풍경들과 다리 사이로 휘감기는 바람. 기분이 좋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딱 하나의 문제점만 빼고.
앞서가던 연분홍색 자전거가 페달을 멈추더니 차체를 빙글 돌려서 접근해왔다. 점만하게 보이던 자전거가 커질 수록 자전거 주인의 얼굴도 시야에 들어왔다. 얼핏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록온은 그 미간에 주름이 콱 잡혀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티에리아, 너 그 자전거 니 거라고 해도 되겠다. 잘 어울려.. 울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느라 본인이 들으면 한대 얻어맞지 싶은 생각을 하며, 록온-닐 디란디-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또 늦어졌습니까."
"...잠깐 타임."
"이번이 다섯번째입니다? 알렐루야는 벌써 한참 앞에 가 있다고요."
솜씨좋게 달려와 멈춰선 티에리아는 숨 하나 고르지 않고 단숨에 내뱉은 후 못마땅한 눈초리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한심하다는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한 목소리에 록온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에스터시아 국립공원의 자전거 도로는 관광객들 사이에 이름 높을만한 명소였다. ..25km 구간을 달리는 게 좀 지친다는 문제점만 없었더라도 최고였을 것이다. 땀도 흐르지 않았지 싶은 상대가 지친 다리와 안장에 쓸린 허벅지의 고통을 알아줄 것같지도 않아서, 록온은 한껏 정중히 항의했다.
"나도 꾀부리는 건 아니다, 티에리아."
"생각보다 체력이 없군요, 록온."
"좀 봐주세요, 나도 이제 30대가 눈 앞이잖아."
"..."
티에리아는 뭐라 대꾸하는 대신 자신이 앞서가다가 돌아온 길을 쳐다보았다. 흑녹색 MTB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으며 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사람이 보였다. ..라일 디란디, 임마.. 닐은 시선을 회피해 허허로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형이 탈색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라일 디란디는 이마는 땀에 젖어있을망정 지친 기색 하나 내비치지않고 쓱쓱 달려와 티에리아 옆에 자전거를 세웠다. 현명하게도 티에리아는 지금 앞서가다 돌아온 인간이 댁이랑 동갑이라고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다만 보란듯이 푸우우우욱 한숨을 쉬었다.
"형, 왜 늦-"
"..라일, 만고에 도움 안되는 놈."
"내가 왜?!"
형의 난데없는 반응에 토끼눈이 된 라일을 돌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닐은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을 맛봤다. 티에리아의 연분홍색 자전거와 라일의 진녹색 자전거를 번갈아 쳐다보며 저 자전거에는 부스터라도 달린게 아닐까하고 애도 안먹을 공상을 진지하게 하던 닐은 이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현역하고 예비역이면 차이가 있잖아. 안 그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형."
"그러십니까. 어쨌든 가시죠."
"애초에 말이야, 티에리아, 너 자전거 처음 타는 거 아니었어?"
"처음입니다만?"
"뭐냐, 처음 타는 거면 좀 넘어진다던가 그런 것도 없어?"
"무슨 생트집입니까."
어이없어하는 티에리아의 시선에 록온은 핸들 위에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지구에 내려오는 것조차 기피하던 티에리아가 척척 요리를 만들어 내밀었을 때 많이 변했다는 것은 깨달았다. 뭉클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데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서투르지 않을까하는 예상을 훌륭하게 깨고 티에리아는 자전거에 몸을 맡긴지 3분만에 균형감각을 잡았고, 달리는 속도는 더 나았다. 젊음이 다르구나, 하는 애늙은이같은 소리를 푸념처럼 중얼거리는 형을 보고 라일은 피식 웃으며 뒤쪽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형,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한 명 있잖아. 그 걸로 만족하지 그래?"
"아?"
닐은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아. 멍하니 흘린 목소리는 곧 고개를 끄덕거리는 납득으로 바뀌었다. 옆에 있는 티에리아가 그제서야 눈치챈 듯 고개를 들었다. 닐보다 한참 뒤쳐져있는 청색 자전거가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오고있었다. 주인공은 뻔했다. 세츠나는 티에리아만큼도 자전거에 타본 경험이 없다고 했다. ..세츠나. 록온은 저도 모르게 자전거 페달을 돌려 밟으려고 했다. 티에리아의 자전거가 그 앞을 막았다.
"록온."
"도와줘야지, 넘어지잖아."
"어린 애가 아닙니다."
닐이 저도 모르게 당연한 듯 내뱉은 말에 티에리아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반쯤 농담인 듯한 어조였지만 부드럽게 밀어내진 느낌이 들어 닐은 멍하니 티에리아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티에리아는 페달을 밟아 세츠나에게 다가갔다. 저 멀리서 세츠나의 자전거가 비틀 하더니 기어코 한쪽으로 넘어졌다. 그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티에리아가 세츠나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바닥에 주저앉은 세츠나가 뭐라고 대꾸했다. 티에리아가 손을 뻗었다. 붙잡고 일어난 세츠나가 다시 자기 자전거에 올라탔다. 비틀거리며 달리는 그의 자전거와 나란히 서서 티에리아가 뭐라뭐라 조언을 던졌다. 빠르게 밟아. 입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록온은 핸들에 턱을 괴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라일."
"응?"
"아니. 애들은 참 빨리 크는구나, 싶어서."
"형이 저 두 사람을 애취급 했었어? 금시초문인데."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 그랬었나."
아이취급하며 돌볼 대상은 아니었다. 미션에 있어서는 늘 대등한 동료였다. 기준 수치를 클리어한 시점에서 나이는 상관없었다. 함께 싸우는 CB의 소속원이었다. 다만 미션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는 어느 새 그들을 보호대상으로 보는 자신이 있었다. 또래보다도 작은 키, 한없이 서투른 감정표현, 아직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눈동자 같은 것이. 생각에 잠겨 고개를 파묻은 형을 가만히 보다가 라일이 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위로하듯이.
"지금 모습 딱 다 큰 애들을 보는 아버지같은 얼굴인 거 알아?"
"저렇게 큰 애들 둔 거 봤냐. 그냥. 세츠나도 티에리아도 많이 변했구나 싶어서. 뭔가 감개무량하네."
"애가 빨리 크는 거 알면 슬슬 동생도 성인 취급좀 해주지?"
"너랑 같냐."
"뭐가 달라, 나이는 내가 더 많다고."
"넌 내 동생이잖냐, 라일."
단호하게 대꾸하고 닐은 다시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분명히 말해서 한심했다- 나란히 달려오는 세츠나와 티에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무슨 바보같은 판단기준이냐 싶어 말도 못하고 입만 뻥긋거리는 라일을 싹 무시한 채.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지도 못한 라일이 기어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알았으니까 체력이나 기르시죠, 형님."
"재활치료하는 동안 체력 다 죽었다 왜."
"그니까 체력 키우라는 거잖아, 세츠나가 조금만 더 능숙했으면 형이 최하위였을 걸."
"우울해지는 소리 하지마.."
우울하게 대꾸하는 닐의 얼굴이 드물게 어린애같아서, 라일은 조금 의기양양해져 웃었다. 꾸물꾸물 닐이 안장에 재대로 몸을 실었을 즈음해서야 티에리아와 세츠나가 도착해다. 드문드문 상처난 얼굴이었지만 세츠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게 했다."
"괜찮아, 형도 만만치 않았거든."
"라-일-"
"농담, 농담."
"어서 와, 세츠나. 요령은 알겠어?"
"아아."
한번 노려보자 라일은 찔끔해서는 시선을 피했다. 이어 세츠나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번을 나뒹굴었는지 세츠나의 옷에는 드문드문 덜 털어낸 먼지가 붙어있었다. 저도 모르게 상채기 난 얼굴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다가 닐은 몸을 움츠렸다.
'아이가 아닙니다.'
티에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닐은 입술 끝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는 세츠나의 시선에 닐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츠나는 여전히 자신보다 한뼘만큼 작은 키였다. 하지만 작은 소년의 얼굴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고, 닐은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의문이 덜 풀린 눈으로 보는 세츠나에게 씩 웃어주고, 닐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시 갈까!"
"너무 늦지 마세요."
"동감."
티에리아와 라일의 핀잔이 한마디씩 이어지고, 세츠나는 묵묵히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양옆에서 한 대씩, 거기에 세츠나의 무심한 동의가 한 대 더. 페달을 밟으려다 말고 닐은 넘어질 뻔했다. 초치냐며 투덜투덜대던 닐은 곁눈질로 세츠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완연히 커버린 그 얼굴이 새삼 감개무량하면서도 자꾸 어린 얼굴이 겹쳐지는 것같아, 닐은 피식 웃고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페달 위에 체중을 실어 밟자, 풍경은 다시금 시간처럼 옆을 스쳐지나갔다.
fin.
알렐루야는 이미 한바퀴 다 돌고 뒤에서 재출발하고 있습니다. 초병이니카요. 티에리아는 처음 타는 건 맞지만 전날 자기 스케줄을 싸그리 무시하고 베다에 링크해 시뮬레이션으로 자전거 타는 법을 마스터하고 왔습니다. 싸나이니까요(..) 디란디즈 자전거는 진녹색 프레임. 알렐이 자전거는 연노랑색, 세츠나는 진청색, 티에리아는 연분홍색(대여소 직원이 착각하고 건네젔습니다만 티에리아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그걸로 대여했습니다, 싸나이니까요!)
걍 여름이고 자전거를 탔더니 마이스터들은 어쩔까나 싶어져서 쓱쓱 써봤습니다. 닐이 좀 한심해지고 시간축도 뒤틀렸습니다만 아무래도 좋아요! 나란히 타면 즐겁겠죠, 자전거.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