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형은 어린 시절 몸이 약했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형은 성홍열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 아이를 낫게 해주시면 뱃속에 있는 이 아이는 신께 바치겠다고 기도했고, 내 형은 나았다. 그리고 나는 성당에 맡겨졌다. 진부한 이야기다. 
내가 맡겨진 성당은 교황청 직속의 신학교였다. 언젠가 영지로 돌아가 영주가 될 아이들과 어울려 사제로서 신에게 바쳐질 어린 신학생으로 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 곳은 신의 거룩한 장소라기보다는 10대 남자아이들이 모여있는 공동체였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신의 어린 양이 되기보다는 날렵한 늑대가 되기를 원했다. 어린 양이 되어야했던 나에게는 조금 불편한 장소였다. 
한달에 한번, 교황님과 함께 하는 식사는 특히나 불편했다. 나란히 늘어선 추기경과 사제들, 그 끄트머리에 앉은 학생들, 그리고 같은 상에는 앉지 못하는 일반생들. 성당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신앙은 내 피부나 눈동자처럼 내 안에 배어있는 것들이었고, 나는 교황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이든 교황님은 평생 신만을 바라본 사람처럼 조용하고 말이 없었고, 다 타버려 재만 남은 듯한 늙은 육신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아마 나는 그 분을 할아버지나 더 친숙한 다른 사람들처럼 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몸을 휘감은 휘황찬란한 붉은 옷만 아니었더라도. 날 때부터 자신의 것인 것처럼 두르고 있는 위엄에 찬 관만 아니었더라도.  나는 결코 그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고, 무슨 맛인지도 모를 식사의 대가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긴 행렬에서 계속 눈총을 받아야하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성당의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 때당시 우리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달이 없는 늦은 밤에는 성당에 긴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의 유령이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사제들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지만 우리들에게는 그것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이 많은 상급생은 그런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성당에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귀부인은 머리를 늘어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흐지부지 될 것처럼 보이던 유령 이야기가 나에게 화살을 돌린 것은 어느 날의 식사 후였다. 기도문을 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제님은 나를 불러내어 칭찬했고, 나는 성당에 갇혔다. 울고 겁을 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날 때부터 신에게 바쳐진 나에게 성당은 신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어쩌면 공포를 느낄 정도의 생기도 나에게는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제단 뒤에서 긴 머리를 늘어트린 소녀가 나타났을 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그녀 쪽이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나에게 그녀는 볼멘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이름은 시스티나. 푸른 눈을 반짝이며 웃는 소녀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생기어린 빛을 띄고 있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 내 아버지야' '뭔가 잘 못 안 것같은데, 여긴 성당이야' '나도 알아!' 그녀와의 이야기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아버지를 찾아 이 곳에 왔다는 것, 성당 제단 아래에 비밀 방이 있어서 자신은 그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 그녀를 따라 내려간 비밀 방은 금욕적인 사제가 지냈을 법한 오래된 물품들이 놓여있었다. 교황청의 마크가 붙어있는 낡디 낡은 성서책은 시스티나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긴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성당의 사람일 것이라는 것. 어머니는 사생아인 자신을 낳고 죽었다는 것. 자신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이라는 것.. 날이 밝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 내게 주었다. '내일 만날 때 돌려줘.'
다음 날 그녀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3일 후에 시스티나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름다운 푸른눈을 멍하니 뜨고, 기둥에 기대어 조용히 침묵해있었다. 성당은 발칵 뒤집혔다. 그녀의 이름도, 사건의 개요도 무엇하나 밝혀지지 않은 채 어린 소녀의 시체는 교황청 구석에 묻혔다.
나는 비밀방으로 내려가 그 낡은 성경책을 꺼내왔다. 시스티나는 그 것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에게 그것은 그녀의 유품처럼 느껴졌다.
교황청에 미증유의 대지진이 닥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나이든 교황님은 내 팔에 기대어 피난소로 향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신의 아들인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가 감정을 내보인 것은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서였다. 뭐라 말하며 그는 내게로 달려들었다. 놀라서 두어걸음 물러섰을 때, 지진으로 무너진 빈 공간에 그는 발을 헛딛었다. 그의 입이 달싹였다. '-티나.' 나는 놀라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 힘은 너무 약했다.
재해가 물러갔을 때 노인의 늙은 심장은 버티지 못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던 나는 그의 품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낡은 천을 보았다. 그 천을 풀었을 때, 그 안에는 장난감처럼 싸구려 빛을 내는 작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시스티나가 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혼란 속에서 낡은 성경책은 구겨지고 물에 젖어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찢겨진 표지 안쪽에서 나는 젊은이가 했을 법한 꿈꾸는 필체로 적힌 두 개의 이름을 발견했다. 시스티나-로워드, 영원히. 성인의 낡은 성경책에 이름을 새기며 천진하게 웃는 젊은 두 연인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신의 품 속에 파묻혀 영원히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을 것같던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생기로 넘쳐 순간순간이 모두 빛났던 때가.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이름을 떠올렸다. 시스티나. 아마도 그가 불렀던 것은, 내가 사랑했던 소녀의 이름은 아니었다.
그가 사랑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Posted by 네츠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