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인생에서 무릎배개를 해준 여성들은 수두룩하게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정말 좋아했던 미스 펜서, 하이 스쿨에서 사귀었던 일곱살 연상의 레이디 해밀턴, 갈색머리가 귀여웠던 레보트 양. 아, 물론 가장 처음은 어머니였다. 린제이 디란디, 아버지의 더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나와 라일, 에이미에게는 둘도 없는 어머니.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와, 가장 평온한 시절의 모든 것들.
반면에 무릎배개를 해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이야 그렇게 휙 지나가버렸고, 180센티가 넘어가는 청년으로 자랐을 즈음에 내게 다가오는 연인들은 대부분 무릎배개의 단계는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을 바랬다. 다음 단계의 것을 건네주는 데에 익숙했던 내가 굳이 그 전 단계를 권유할 리도 없어 그녀들과의 관계는 비슷한 수순을 밟아 비슷하게 끝나곤 했다. 그러니까 딱 열 한 살의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를 보기 전까지는 자지 않겠다며 투정부리는 에이미에게 무릎배개를 해줬던 것이 내 인생의 최초이자 최후였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떫으면 치우지?"
금빛 눈동자 가득히 불쾌감을 담고 쏘아보는 시선이 평소의 그와는 너무 달라서, 그냥 너털 웃어버렸다.
"싫으면 싫다고 하던가, 나도 굳이 네놈 허벅지 배고 있을 필요는 없거든?"
"보기보다 꼬였구나, 할렐루야."
"보이는 그대로 꼬였다고 하지 왜, 그래도 네놈보단 아니거든. 잘난 형씨."
"생트집잡는 거야? 너무하네."
"하아?"
"농담이야, 농담."
험악한 어투에도 화낼 기분은 들지 않아 록온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거친 말에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될정도로, 그는 이 거친 남자에게 익숙해져있었다.
처음 만난 것은 알렐루야와의 MS 시뮬레이션을 맞춰보던 어느 날이었다. 적당히 조율을 끝내고 콕핏에서 내려와 잡담을 나누던 사이에 알렐루야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쥐었을 때는 정말 당황했다. 하물며 그 직후에 그가 자신을 밀치고 욕설을 내뱉었을 때는 더더욱.
"..그러고보면 할렐루야와도 오래됐구나. 첫 마디가 '죽여버린다'였는데."
"좀 틀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별 변화없어."
"우와, 너무해."
"가증스럽게 귀염 떠는 건 알렐루야한테나 하지? 내가 그 병신이랑 똑같은 줄 알면 오산이야."
"...예리하네?"
"알면 짜지던가, 병신아."
장난스레 말한 어투에 즉각 폭언이 돌아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가 말한 첫마디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알렐루야에게 접근하지마 개자식아, 죽여버린다'.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와 위협적으로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두려움을 넘어 신선하기까지 했었다. 이제와서는 살의보다는 불쾌함쪽에 더 가까운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록온은 장난스레 물었다.
"..새삼스럽지만 할렐루야 군, 저 싫어하세요?"
"좋아한다고 착각이라도 했냐? 구제불능이네 이거."
"우와.. 별로 남한테 미움받은 기억은 없었는데 새삼스레 상처받네."
"칼 맞을 짓 존나 하고 다녔으면 이 정도는 귀여운 거 아니야?"
"아."
"찔리는 게 있으면 입좀 닥쳐. 내가 알렐루야였으면 지금쯤 널 죽여도 백번은 더 죽였어."
"나 알렐루야한테는 성의껏하고 있는데?"
"대놓고 속여먹지 않으면 다 통하는 줄 알아? 은근슬쩍 그 둔탱이한테 다 떠넘기지마. 적당히 짜질 타이밍은 알아야할 거 아냐."
할렐루야의 대답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그의 말대로 상냥하고 다정한 동료는 언제나 자신을 걱정해주었다. 기댔다면 기댄 편인 것같기도 하다. 손이 많이 가는 동생같은 두 마이스터가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알렐루야는 언제나 자기를 걱정해주는 동료였다. 편안한 그에게 곧잘 기댔었아. 지금 자신을 노려보는 그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지도 못하게 즐거운 기분이 들어 록온은 너털 웃어버렸다. 알렐루야 못지 않게 그와 보낸 시간도 제법 길었다. 소금결정처럼 거친 진심 위로 퍼부어진 시간의 물은 어느 정도 그 격한 감정을 희석시켜줄 수 있게끔 되었다. 관계는 적어도 험한 말을 웃어넘길 수 있게 되고, 살기가 짜증으로 변하는 정도로는 부드러워졌다.
"으음- 미안, 그게, 알렐루야가 편하다보니까. 하하하."
"개새끼."
"욕도 참 상큼하게 하네.."
"먹을 만하잖아."
"나 룰은 어긴 적 없어? 사생활 수비 엄무나 친교 한정선이나."
"그래 너는 안 넘고 안 실토했겠지. 그냥 딴 놈들은 뱉어보라고 죽어라 웃으면서 찔러주고 있으면 그 건 죄가 아니라 이거냐?"
"그렇게도 되려나.."
여전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굳이 강하게 부정할 생각도 들지 않아 록온은 그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록온을 노려보다가 할렐루야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납득이나 긍정이 아니라, 그저 포기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상냥한 그는 자신을 싫어할만큼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것도. 손을 뻗어 고개 돌린 야수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에게, 록온은 저도 모르게 다정히 웃었다.
"난 네가 좋아, 할렐루야."
"..하아?"
"편하거든, 정말로."
시간이 희석해주었던 그의 감정이 녹지 않은 결정처럼 치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자신의 목을 조를 뻔한 그의 손에 록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혐오와 살의로 일그러진 시선을 보며, 록온은 또 조금 즐거워졌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살기로 가득찬 그 시선을, 그 경멸하는 말투를 편하고 상냥한 알렐루야와는 다른 의미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굳이 입밖으로 낸 적은 없었지만. 록온은 손을 뻗어 금빛 야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스스로도 갈피를 못잡고 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번도 입밖에 낸 적 없었던 본심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는 절대 나를 믿지 않을 거잖아."
할렐루야. 믿지도 않고 기대지도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너는, 내가 이 곳을 떠나도 전혀 신경쓰지 않겠지. 괴로워하지 않겠지. 그러니까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아도 돼. 너는 처음부터 나를 믿지 않았으니.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록온은 기쁘게 할렐루야에게 진심을 고했다.
"조건없는 관계라는 게 편하더라고, 생각보다."
웃음기 어린 눈동자를 올려다보던 할렐루야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야수에게 무릎을 내준 이 남자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을 마음 속으로부터 혐오하고 있는 이 야수가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을리 없다는 사실을.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은 이 곳의 사람들을 버릴 수 있음을 실토하듯이.
"..미친 마조히스트같으니."
"제정신으로 테러리스트같은 걸 할 것같냐."
웃으며 대꾸하고, 제 할말을 다 토한 록온은 몸을 길게 펴고 벽에 기대었다. 그런 그에게 뭐라 반문할 기운도 없어 할렐루야는 말없이 그의 목을 조를 뻔했던 팔로 두 눈을 가렸다. 소중하고 병신같은 반신의 마음 속에 훌륭히 자리잡고 들어온 이 미친놈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도. ..진작 없애버렸었으면 좋았을 것을. 진작에. 목 안쪽에서 쓴맛이 올라와 입안에 퍼졌다. 낮게 욕설을 퍼붓고, 할렐루야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도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은 그의 잔상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렇게 끈질겼다.
그렇게, 가슴 속 어딘가에 엉겨붙어 남아있었다.
fin.
다메록온의 궁극판.
소중하고 소중한 아이들에게 퍼주고 퍼주고 퍼주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는 그 애들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먹을 수 있음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같은 사람. 할렐루야는 분명 싫어했을 거에요, 응.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었으려나.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