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백 선생, 생일이 언제지?"
햇살 좋은 남쪽 리조트의 해변가에서 한껏 햇살을 받고 늘어져있던 안현민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말은 분명 악의는 없었다. 회색 머리칼이 말쑥하게 신사답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의가 바르다고 지역주민들에게 인기가 좋은 백성찬- 통칭 백 선생님은 즉각 씨익 웃으며 옆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것을 집어들었다.
탕탕탕!!!
깔끔하게도 세발이 날아간 GLOOK 26은 다행히도 머리통을 꿰뚫는 대신 현민이 드러누운 벤치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첨언하면, 개인 해변인 덕에 암만 총기소유가 자유화된 나라였더래도 깜짝 놀랐을 다른 손님들이 없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순식간에 수명 5년쯤은 짧아졌을 법한데도 침묵을 지킨채 누워있는 현민의 표정이 무심시크하건 말건, 여전히 잇꼬리를 올린 백 선생님은 깔끔하게 웃었다.
"반말하지 말랬지?"
어조도 참으로 깔끔했다.
"<백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연회석에서 손바닥 꽤나 비벼봤을 법한 중년들이나 쓰는 표현으로 따박따박 답하자 이번에는 성격좋아보인다고 소문난 백선생님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늙은이 취급하는 법은 또 언제 배웠냐?"
"말실수 한번 했다고 사람목숨 가지고 노는 게 꼬장꼬장한 늙은이 아니면 뭡니까?"
"허이구, 자네는 가지고 놀아댈만한 놈은 되고요?"
"백 반장님이 갖고 놀 수 없을만한 상대가 세상이 있기는 하고요?"
한마디도 안 지려드는 개새끼(최근 늑대라고 의심중)을 향해 백반장은 미간을 한번 더 성대하게 구겨주고는 고개를 확 돌렸다. 최근들어 이 놈과의 놀음은 적절히 수를 판단하는 쪽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는 참이었다. 그대로 무시해버리고 바다소리 배경삼아 경치를 즐기려던 백반장이 경어체에 밀려서 사라진 질문을 떠올린 것은 조금 후였다.
"맞다, 생일은 왜?"
"됐습니다, 두 번 물어봤다가는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뭐 챙겨주려고 한 내가 바보지."
"아쭈, 기어오르시겠다? 배가 불렀구만, 안현민이."
"됐습니다- 됐고요-"
지금은 돌아갈 일도 없는 조국의 고리짝 개그말투로 능글맞게 한탄하는 그 옆모습이 하도 한심스러워서 백 반장은 하려던 빈정도 확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이 어린 놈에게 물먹은 것을 잊기 힘든 그의 두뇌는 금방 파바박 움직여서 그는 이내 권총을 다시 집어들었다. 한국이랑 비교해서 제일 좋은 점이 이거긴 하지. 기세가 등등한 회색머리칼을 곁눈질로 힐끗 본 안현민에게도 그 흉흉한 웃음은 찔끔했는지 그는 이내 꼬리를 쏙 내리고는 왠 서류 봉투 하나를 던졌다.
"자요, 하여간 선물."
"이건 또 뭔 지랄이냐."
혀를 쯧쯧 차면서도 백성찬은 서류봉투 입구를 까고 고운 모래 깔린 해변에서도 용케 바닷바람 안 묻고 남실남실 고운 종이 몇 개를 끌어냈다. 형사였던 시절 버릇 못 버리고 금새 눈매가 서늘해지는 그 모습을 보고 안현민은 또 예의 한탄스레 너털 웃었다. 이 번에는 또 어떤 드잡질 정보냐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들여다보던 백반장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곁에 누운 꼬마를 돌아보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뭐냐 이건?"
뭘요, 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투가 너무 태연해서 백반장은 서류를 다시 봤다.
암만봐도 공문서 다운 형식인게 역력한 그 종이에는 자기 이름 석자가 맨 꼭대기에 박혀있었다. 그리고는 또 국가 날인이 땅땅 찍혀있고. 민철이가 아무리 공문서 위조 달인이라지만 이런 것까지 위조할 리는 없겠고. 이건 아무래도 시민권인지 영주권인지 하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사들였냐. 하기사 그 좋은 대가리로 벌어들인 돈은 썩어날 테지 한 두개쯤은 무리도 아닐테지만. 한숨 팍팍 섞어 종이를 후딱 넘기자 이번에는 또 벙찔 물건이 들어있었다.
"..뭐냐 이건?"
"양자 입적서."
늑대 새끼놈은 이번에는 냉큼 대답했다. 제 이름 녀석이름 나란히 써 있고 서명 날인 끝나있다. 제가 사인할 부분만 비어있는 부분에 또 한심해서 말을 잃자, 여전히 포커페이스대로 빙싯거린 안현민이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영주권 만들며 보니까 집주소 같은데 관계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이 기회에 어떻습니까, 백 선생님."
"..구더기 잡으려 장독 들이붓는 헛소리는 어디서 배워온 거냐?"
"아 선물이라니까요?"
"뭐가?"
얄미울만큼 잘 그을리고 잘 놀게 생긴 만면에 미소를 짓고서, 안현민은 손가락 하나를 탁 펼쳐서는 자기 얼굴을 가르켰다.
"자식."
....한순간 다시금 총을 쥘 뻔했다.
"이 나이에 너 같은 놈을 자식으로 맞으라고?"
"결혼 안하셨잖아요? 양자 하나 만드시죠."
"내가 너한테 아버지 소리 들어야겠냐?"
"어 아버지 소리 안하면 되죠 뭐."
"..나 지금 심각하게 형사 복귀할까 고민중이다 이 새끼야."
"뭐 어때요, 앞으로 죽 같이 살 건데."
한껏 진심을 담아 뇌까린 욕설에도 새끼 늑대놈은 오만한건지 당당한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선포했다. 연륜의 힘인지 어이없음의 승리인지 동거인을 살해하는 지경까지는 안 가고 자신을 컨트롤한 백성찬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안현민이를 진작 처넣었어야 머리를 안 썩히고 끝나는 건데."
"안 처넣었으니까 해변에서 휴가 즐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김에 자식 하나 얻으세요."
"..저 놈의 아가리를 그냥."
"백 반장님."
씨익 웃은 녀석의 얼굴이 언제고 담판을 짓겠다는 양 여유 넘치게 능글맞았다. 이 놈의 서류 확 찢어 날려줄까 하던 마음이 스믈스믈 멀어져갈만큼 짜릿한 감각이 밀려왔다. 저 호기넘치는 어린 애새끼덕에 많이 구르고 많이 욕먹고.
...그래 더럽게 즐거웠지.
"...어휴, 이 개새끼가."
이번 판은 져주마. 가늘게 눈매를 휘고 욕설섞인 말을 내뱉고는 그 여유로운 미소지은 머리에 가볍게 주먹을 먹였다. 권총알 먹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을 텐데도 투덜투덜하는 소리는 돌아왔다. 백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눈이 동그래졌을만큼 천박스레 낄낄 웃고나서, 백성찬은 늑대새끼가 내민 서류에 사인했다.
햇볕 내리쬐는 남쪽 땅 해변은 마냥 맛깔스레 즐겁고, 담배 한 대 태워물기에는 최고인 곳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