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국립대에 원서를 넣어버린 건 일종의 객기였다. 선생님들의 반응은 인성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지만 '네가?'에서부터 '무리다'까지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붙는다던가 붙지 않는다던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붙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의 객기였는데.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합격은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 만큼 쉽게 찾아왔다.
..굳이 따지면 정말 고생한 건 합격 이후였다.
"축하한다, 라일. 고생 많았구나. 이야기 해주지 그랬니."
"저도 붙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원서 쓸 때 이야기해주었으면 좀 더 대비했을 텐데."
아버지는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보다 훨씬 더 섬세한 성격이던 어머니 린제이 디란디는 처음에는 기뻐해주었다. 하지만 곧 그 국립대학이 잉글랜드에 위치해 있고 자택에서 다닐 수 없는 거리라는 사실을 알자 눈물이 글썽해졌다. '여보, 라일이 집을 떠나는 건가요?' 애처가인 아버지는 펑펑 울음을 터트리는 아내를 달래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에 비하면 여동생 에이미의 반응은 좀 간단했다. '축하해, 오빠. 이제 집에 돌아오는 건 신부감 데리고 올 때나 되겠네?' 빙긋 웃는 얼굴은 마냥 순진무구한 것만은 아니었고, 에이미는 아마 자기 말의 파급 효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에이미의 말은 곧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세 배로 증폭시켰다. 딱 2분만 더 지속되었어도 합격통지서고 뭐고 다 가져다 버리고 집에서 아버지 일이나 도울래요 하고 선언할까말까하는 차에 나를 구해준 건, 뭐 역시나 구해주겠지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반대할 것도 없잖아요, 어머니. 국립 대학을 전액 장학생으로 붙은 거라구요. 기쁜 일이잖아."
"하지만 닐."
"모처럼 자기가 택한 길인데 응원해줘야죠."
쌍둥이 주제에 맞먹을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내 형. 닐 디란디는 아버지, 아니 차라리 어머니에 가까운 자상한 미소를 짓고서 내 어깨를 애정을 담아 툭 쳤다. 아프지 않은 그 손이 좀 아파서,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형도 못 보겠구나. 약간 감개무량해진 내 앞에서 형은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좀 숙연한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빙긋 웃은 닐이 방에서 무언가 봉투를 들고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고로 저도 가요, 아버지, 어머니."
"닐?"
"이거."
닐이 부모님에게 건네자 에이미는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 팔에 매달려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고개를 뺐다. 그리고 나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부스럭거리는 봉투안에는 내가 학교에서 통보받아 들고 온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의 합격 통지서가 들어있었다. 귀하의 입학을 환영합니다, 이하 블라블라블라. 다른 것은 딱 하나였다. '라일 디란디 귀하'가 아니라 '닐 디란디 귀하'.
"...닐?!"
"예비로 봤던 건데 붙었더라고."
바늘 귀 하나 안들어갈 것같은 얼굴로 씩 웃는 형제 앞에서 라일은 어처구니가 없어 화도 내지 못했다. 에이미는 아들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 씩이나 무통보 출가를 선언했다는 사실 때문에 굳어있는 아버지 손에서 통지서를 낚아챘다. 꼼꼼히 살펴보고 위조가 아니는 것을 안 에이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놈의 잘난 오빠들, 여동생이 받을 부담은 생각도 안하죠. 에이미는 곁눈질로 더더욱 서럽게 울고 있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팔에 남은 오랜 상처가 괜시리 욱신거리는 기분에 에이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숙은 우리 회사 직원이 소개시켜준 임대 주택을 빌렸단다. 좀 넓다고는 하지만 좁은 것보다야 낫겠지."
"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렇게 해주렴, 라일. 그리고 어머니 전언. 한달에 최소한 두번은 집에 오고 방학 중에는 집으로 올 것."
"아버지, 저 이제 생일 지나면 열 여덟 살이라구요."
"아직 열 일곱이잖니."
"그래도 좀 있으면 성년이에요."
"라일."
오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라일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움츠러드는 자신이 못마땅한지 뾰루퉁한 얼굴이 된 라일을 보고 오웬은 다정한 눈으로 웃었다. 이제 성인이 목전 앞인데도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어린 소년으로 보였다. 오웬은 손을 뻗어 아들의 어깨를 손을 얹었다.
"..네 어머니는 아직도 두려운 거란다."
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에 라일은 칼에라도 찔린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라앉은 아버지의 눈동자가 몹시도 지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중얼거린대로 라일은 열 넷이 아니라 열 아홉이었고, 아버지의 미소가 아직 극복하지 않은 상처를 누르고 있다는 것쯤은 알 나이였다. 라일은 문득 가슴 한저리가 꽉 메이는 것을 느꼈다.
부모를 졸라 입학한 기숙사제 주니어 스쿨의 풍경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학교, 잠자리, 생활환경, 식사. 모든 것이 달랐다. 모처럼의 주말 가족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어머니가 쾌활한 목소리로 전화했을 때 라일은 어린 소년이 흔히 그렇듯 투정을 부리며 피곤한 학교생활이며 엄격한 사감, 부족한 잠등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다음에는 꼭 오려무나, 에이미가 많이 보고 싶어해.' 웃음기 담긴 어머니의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놓았다. 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깨었을 때는 저녁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이.
...망할 테러따위. 다 죽어버리라고 해.
왠지 모르게 울 것같은 기분이 들어 라일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은 위로하듯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소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형과 눈이 마주쳤을 때, 시선을 피한 것은 라일 쪽이었다.
"형."
"왜?"
"아버지가.. 좀 크다고 했었지?"
"음, 의문이 좀 드네. 확실히. 라일, 알아?"
"뭐가?"
"AEU 통합 후에도 런던은 대도시야, 그치? 집값, 비싸지 아마."
"뭔 소리야? 당연하지."
"그 가운데서 이만한 크기의 집을 얻어준 아버지의 능력에 감탄할까, 과소비에 한탄할까. 골라봐, 라일."
"전자 후자 반반씩 할게."
"동감."
어깨를 으쓱한 형을 옆에 두고 라일은 앞으로 신세지게 될 집을 바라보았다. 새학기 시작전에 옮겨온 잉글랜드의 임대 주택은 확실히 너무 컸다. 방 네 개, 욕실 두 개, 거실과 부엌별도, 다락방과 창고 포함.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형제 둘이 살기에는 무식하게 넓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하는 라일 앞에서 닐은 한번 머리를 긁적이고 팔짱을 꼈다. 예리한 눈으로 쏘아보던 닐은 이내 속살같이 결정했다.
"욕실은 별도 사용 가능, 방 하나는 손님방, 하나는 네 방, 하나는 내 방, 하나는 침실. 됐지? 활용은 하겠네, 그럭저럭."
"침실이라니?"
"이층침대잖아."
상큼하게 대답한 형 앞에서 굳이 꼬투리를 잡을 생각도 못하고 라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이 돌려서 같은 방에서 자자고 말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짐을 부리고 난 후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쳐다본 시선에, 형은 하이 스쿨 내에서 이기는 자가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로 빙긋 웃어보이고는 쌕 고개를 돌려버렸다. 남들이야 시선을 떼지 못할지 모르지만 할 말 없으니 미소로 때운 거라는 걸 뻔히 아는 라일은 한심해서 그 등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떠들며 인스턴트와 어머니가 마련해준 도시락을 풀어 저녁을 떼우고, 네가 먼저 쓰느니 내가 먼저 쓰느니 다투며 욕실을 쓰고서 둘은 경쟁하듯 침대로 뛰어들었다. 2층 침대를 선점한 닐에게 떠밀려 아래층을 쓰게 된 라일은 패배를 곱씹으며 누워야 했다. 기숙사도 아니고, 이층 침대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라일은 툴툴거리며 발을 들어 천장을 걷어찼다.
"우와, 차지마, 라일. 흔들린단 말이야."
"그럼 자리 바꾸든가."
"내가 이겼는데?"
우와 애 같아- 하고 투정부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닐은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애같은 게 누군데? 웃음기 가득한 애정어린 시비조를 기꺼이 받아들여 라일은 턱짓으로 형을 가르켰다. 아쭈, 닐은 팔을 안쪽으로 휘두르다가 관성에 의해 라일의 침대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남은 것은 열 살때부터 해오던 장난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간지럼을 태웠다. 피차 서로의 약점은 싫을 만큼 잘 아는 쌍둥이다. 기진맥진해서 끅끅거리면서도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을 멈추지 않고, 몸을 뒤틀고, 웃음을 터트리고,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둘다 기진맥진해서 쓰려졌다. 그러고도 열 일곱의 혈기로 서로의 종아리를 퍽퍽 걷어차다가, 닐이 라일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쳤다. 너무 웃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닐은 웃음기가 덜 가신 쑥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라일. ..고마워."
"맞는 거 좋아했어 형? 우와, 지저스. 내 형제가 변태라니요!"
"라일!"
"농담, 농담. 뭐가 고마운 건데?"
"그냥, 억지 좀 부렸거든."
웃다말고 라일은 고개를 돌려 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형체만 어렴풋이 보이는 그 모습은 거울처럼 자신과 닮아있었다. 라일은 한번 쓰게 웃고는 뚱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혼자는 못 잘 거 아냐."
"알았었어?"
"...뭐어."
놀라지도 않은 닐의 말투가 생소해서 라일은 우물우물하다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닐은 지친 듯이 웃고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참 애같지, 하고 실없이 웃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핏기 없는 뺨이 그 날의 그를 떠올리게 해 라일은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닐의 핏기 없는 얼굴. 에이미의 팔.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정도의 과보호. 원흉은 그 때였다.
자살폭탄테러. KPSA. 들어본 적도 없는 그 단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부모님이, 에이미가, 닐이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이 라일이 아는 전부였다.
당시 공원과 백화점이 이어진 어뮤즈먼트 파크의 외곽은 휴일의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고 사상자는 천여명에 달했다. 그 한복판에 있었던 가족들이 모두 목숨을 건진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바깥벤치에 앉아있었던 닐은 폭파의 충격파로 나동그라져 날아온 돌에 몸을 긁힌 것이 상처의 전부였고, 어머니는 무너진 벽 사이 공간에 끼어 찰과상으로 끝났다. 어린 에이미를 감쌌던 아버지가 가장 중상이었다. 아버지는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내부 장기가 손상되어 장기간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라일이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수술중이었다.
'라일.. 라일.. 라일..!!'
대기 의자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여전히 채 갈아입지도 못한 피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결과 쇠스랑처럼 파고드는 손가락에 라일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린제이 디란디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고, 라일은 이렇게 흐트러진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우악스레 자신을 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어머니의 손짓에 순응하고 또 얼마간은 저항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옆 수술실에서 병실 침대에 누운 에이미가 의사와 함께 나타났다. 잠들어있는 에이미를 병실로 보내고 남은 의사는 지친 얼굴로 담담하게 증세를 설명했다. 직접 노출되지 않아 큰 상처는 없었습니다. 다만 오른팔이 신경까지 베었기 때문에 치료까지 좀 걸릴 겁니다. 귀에 들어온 말은 하나도 없었다. 몸을 휘감은 팔이 풀렸다. 기절할 것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어머니를 부축한 것은 쌍둥이 형이었다. 그제서야 형을 봤다. 안녕, 라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웃는 닐을 보며 땅이 자신을 잡아채는 것같은 기분을 맛봤다. 지독한 죄책감이었다.
디란디 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에이미는 지속적인 재활치료를 받아야하는 것을 제외하면 금방 나았다. 아버지는 반년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끌어안은 어머니의 뺨은 온통 눈물로 젖어있었다. 그 날은 모두가 함께 잠들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밤에 어머니는 처음으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곁에 누운 에이미와 그 너머로 보이는 닐, 아버지. 그리고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팔. 언제나 바로바로 잠드는 라일이었지만 그 때만큼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짧은 적응 기간동안 익숙해졌던 기숙사의 1인 침대가 떠올랐다. 쿠션도 별로 좋지 않고, 잘 시간도 적어서 늘 불편해하면서도 머리만 대는 순간 바로바로 잠들곤 했었다.
손을 뻗어서 에이미 건너편에 있는 형의 어깨를 스치듯 만져보았다. 어쩐지 우울해져서 라일은 손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닐이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은 다음 날 깨어나고서야 알았다.
기숙사의 그 침대로는 두번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야, 형."
"응?"
"기숙사 학교를 왜 갔던 걸까, 나."
"뭐야, 가고 싶다고 고집부렸었잖아."
"결국 한 달 조금 못 채우고 돌아왔잖아."
"라일."
"..그럴 정도면 가족들이랑 같이 있는 게 나았을 텐데."
천장을 보며 중얼거린 말에 닐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라일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자기도 그 곳에 있었다면 비정상적일 만큼 아이들을 떼어놓는 것을 무서워하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밤마다 팔이 아프다며 울음을 터트렸던 여동생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자신은 보지 못했다. 겪지도 못했다. 라일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려버렸다. 눈 위에 내려온 어둠 속에서 형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일. 네가 타인이라고 생각해?"
부인할 수 없었다. 라일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외상후 증후군으로 가족들은 약 2년간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 사고 이후에 상처투성이가 된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만이 외지인처럼 서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기에, 열 네살은 생각보다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사고 전에 기숙사 학교로 가겠다고 투정부린 것은 옆에 있는 형에 대한 감정때문이었다. 그리고 큰 사고가 닥쳤을 때 열 네살짜리 아이는 자신 안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학교 입학 한달만에 라일은 학교를 옮겼다.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위해 가족들 속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남은 감정만을 안으로, 안으로 숨겼다. 형을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그는 미워할 대상도 될 수 없었다. 그가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만이, 열등감만이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라일은 그 감정을 토해낼 만큼 성숙한 어른도 아니었고, 제 감정만 몰아붙일 정도로 어린애도 못되었다.
잠들지 못하는 형의 머리맡을 지키는 밤 속에는 자학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어설픈 치료와 기묘한 부조화 속에서 라일 디란디의 감정은 이리저리 얽힌 채 멈춰있었다. 4년의 세월이 어머니의 마음에 간신히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사고가 가져다준 상처들은 앞으로도 천천히, 천천히 치유되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 때, 자신은 어디에 있을 수 있는 걸까.
한번 물꼬가 터진 생각은 고름이 터져나오듯이 쏟아져내렸다. 라일은 뭐라 말하려 애쓰다가 포기하고 입을 손으로 눌러막았다. 견뎌, 라일 디란디. 참아. 참으라구.
"라일."
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번에도 손을 뻗었다. 억누른 라일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면 해묵은 감정들이 쏟아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닐에 대한 미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도 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자신이 그렇게 한번 무너져내리면 영영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닐은 천천히 라일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가, 이내 꽉 안아주었다.
"..미안해."
귓가에 속삭이듯 스친 닐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어떤 말과도 달랐다. 발치가 무너져내리지는 않았다. 라일은 문득 참을 수 없이 울고 싶어졌다. 우는 대신 자신을 안아준 쌍둥이 형에게 와락 고개를 묻어버렸다. 닐은 천천히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둠에 익은 눈이 가까이서 본 형의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닮아있었다. 그래도 라일은 결코 자신이 형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 형한테는 평생 못 이길거야."
"당연하잖아, 형이니까."
"...동양에서는 먼저 태어난 쪽이 형이라더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나서 안됐네."
울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애써 부루퉁한 척 중얼거리자, 닐도 모른 채 평소같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우와 얄미워. 눈물이 솟으려는 것을 참고 애써 웃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닐은 청록색 눈동자 한가득 미소를 담고 밝게 웃었다. 언제나 한 발자국, 아니 열 발자국쯤은 더 나가는 것같은 내 형은 이럴 때만 나보다 어린애같았다.
자신을 얽고 있는 가족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가족과, 상처와, 씁쓸한 미소와, 거리감과, 부담과, 그리고 형 닐 디란디에게서.
그런데도 지금 마주잡은 손은 따스했다. 놓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fin.
시험은 끝났습니다만 먼저 쓰다만 것부터 정리해봤습니다. 본격 '사고가 나지 않은 디란디 가에서 라일 디란디는 정상적으로 보낼 수 있었을까'. 어..엄, 어째 망한 것처럼 보이네요. 쓰고서 깨달았습니다. 라이라, 너 아무래도 니 형이 닐 디란디였던 시점부터 음.. 음... 글렀나보다orz
사랑한다 라일아,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라구요.
아뉴가 없는 라일도 록온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외로웠을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