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사이에 휘감긴 이불의 감촉이 질척거린다 싶어 티에리아는 느린 몸짓으로 이불을 밀어냈다. 더운 여름 공기가 눅진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배어나오는 땀을 훔치고,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습기 찬 더운 공기는 숨 속으로 배어들었다. 밤에서 흘러나온 것같은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것과 거의 동시였다.
"잠이 안 오나."
"세츠나."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소년같은 윤곽이 남아있는 청년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티에리아는 무의식 중에 입꼬리를 올렸다. 옆자리를 더듬어 하나 가져다놓았던 배개를 가슴 위에 올리고 끌어안았다. 체온보다는 시원한 감촉에 다소는 숨이 트였다.
"지상의 여름은 생각보다 덥군."
"별로 더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아직 여름이 아니다."
"나는 지구의 기상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단 말.. 여름이 아니라고?"
"굳이 따지면 늦봄이겠지."
"..."
"...에어컨을 틀까."
묵묵히 보충한 세츠나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사시사철 일정온도가 유지되는 곳에서 지내온 티에리아는 온도변화에 약했다. 한 방 먹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티에리아의 표정이 보일리도 없는데도 세츠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선선히 배려할 생각으로 세츠나는 리모컨을 찾아 더듬었다. 티에리아가 그 손짓을 저지했다.
"필요없다."
"..? 진심인가?"
"이런 기계가 없어도 옛날 사람들은 여름을 났다고 들었다. 나라고 못할 것은 없어."
"..."
..예전보다는 더 더워졌겠지만. ..아니 그보다 아직 여름이 아니지만. 세츠나는 머리 속으로 떠오른 말들을 내뱉는 대신 현명하게 침묵을 유지했다. 이마의 땀을 한번 더 손등으로 훔치고서 티에리아는 제 체온과 비슷해진 배개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돌아눕는 티에리아의 손끝이 툭, 세츠나의 손목을 스쳤다. 천장을 응시하다가 티에리아가 조용히 내뱉었다.
"너는 덥지 않나."
"참을만하다."
"..크루지스는 중동지역이었지."
"거기는 훨씬 더 더우니까."
"습도는 낮았을텐데."
"온도는 더 높았다."
"살기 힘들지 않았나?"
"적응하는 거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곳이어서 아름다운 것도 있었어."
티에리아는 세츠나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과거라면 결코 입에 담지 않았을 말들을 스스럼없이 나누게 되었다고 새삼 자각했다. 중동 지역의 소년병이 어떤 것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좋은 기억만 남아있을리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어딘가 그리움마저 배어있었다. 미션때문에 몇번인가 찾아갔던 세츠나의 고향은- 크루지스는 덥고 황량하고 메마른 곳이었다. 모래와 바위로 덮인 조용한 사막과 그 기후에 적응하여 살아가던 사람들. 그 곳에서 지냈을 마이스터가 되기 전의 어린 소년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을 한다는 생각에 티에리아는 보일듯말듯 웃었다.
"...막연히 네 체온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몸을 뒤척이는 기척이 났다. 티에리아는 옆에 누워있는 사람의 서늘한 팔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세츠나는 살짝 흠칫했지만 팔을 거두지는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냐, 라고 쓰여있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을 세츠나를 깨닫고 티에리아는 짐짓 장난스레 말했다.
"어린애 체온은 높다고 했으니까."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
"첫인상은 잘 안 지워지는 법이더군."
"..그 남자의 착각이다."
어쩐지 퉁명스럽기까지한 목소리에 티에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를 말하는 그의 음성은 조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기억 속의 그 사람은 제쪽에서 틈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쪽에서 틈을 보이면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시늉만큼은 해주었다. 가장 어렸던 세츠나는 그만큼 그 피해인지 수혜인지를 입을 때가 많아서, 그는 아이처럼 웃으며 세츠나를 건드리곤 했다. 어린애 체온은 높구나,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입버릇을 농담처럼 중얼거리면서.
자신만큼 경계심이 높았던 그가 순순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을리 만무한 만큼 그 농담의 대가는 싸늘한 시선이나 거칠게 쳐내는 손같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주 웃으며 팔을 뻗어주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나는 여기에 있다고, 그렇게 말하듯이.
"나도 그 사람에게 물들었던 모양이지."
"어린 얼굴로치면 네 쪽이 더하다, 티에리아."
"부인은 안하겠지만 선천적인 거니까 태클걸지 말아라."
농담처럼 대꾸하고는 손끝에 닿은 그 팔을 천천히 쓸었다. 좀처럼 살이 붙지 않은 마른 팔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단히 박힌 마른 근육과 균열처럼 맺혀있는 흉터들이 '세츠나 F. 세이에이'인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열을 품은 피부와, 단단한 감촉과, 다져진 형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 것들을 천천히 더듬어 확인하던 손가락이 그의 손에서 멈추었다. 더없이 거칠었다. 전장에서 다져지고 못이 박힌 채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손이었다. 그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세츠나."
"..."
부른 목소리에 그는 소리 대신 눈빛으로 대꾸했다. 열을 품고 부풀어오른 공기가 피부 위를 스치듯 감싸고 있었다. 붙잡은 손의 감촉. 마주하는 시선. 모든 것을 눈에 새겨둘 듯이 응시했다. 이어진 티에리아의 목소리는 여름날 새벽에 새겨놓듯이 선명하고, 고요했다.
"너는 여기에 있지?"
"...."
어슴푸레하게 밝은 밤 속에서 침묵만이 스몄다. 더운 공기사이로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마주보는 사람의 얼굴을 쫓았다. 마주닿은 손만큼 선명한 시선이 교차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세츠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조용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잃어버린 사람의 기억을 공유하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의 대답이었다. 티에리아는 그 목소리를 기억 속에 새기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여기에 있다.
입 속으로 그렇게 속삭이듯 중얼거리고, 티에리아는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소 망설이듯 지체하던 세츠나의 손가락도, 이내 상대를 천천히 쓸어안았다. 여름의 새벽, 더운 공기가 스치는 그 공간에서 열을 품은 두 개의 손은 그렇게 단단하게 서로를 마주잡았다.
사라지지 않는 것을 붙잡으려는 듯이.
fin.
여기 없는 것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적어내려갔습니다.
손을 뻗었을 때 여전히 그 곳에 있다고 착각할 수 없다면, 최소한 무언가 붙잡을 것이 그 곳에 남아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