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이상한 꿈으로 눈을 떴다. 그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마음은 청명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손에 든 검의 무게만큼. 좌우명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태도덕분에 애초에 이시카와 고에몬은 꿈을 꿀만큼 깊게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자리에서 드물게 당황하며 꿈을 반추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고, 익숙한 사건들이 있었다. 자신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검이 있었고 마음은 언제나처럼 예리하고 맑았다. 땅을 딛는 발의 감각과 뻗은 허리에 매어있는 검의 무게. 현실과 썩 다를 것같지도 않았던 꿈이었는데.
뻗어나간 손끝에 이어진 것은 늘 붙잡았던 검의 감촉이 아니었다. 익숙한 사람들과 변함없을 것같던 자신. 평소와 달랐던 것은 그 꿈속에서 저지른 자신의 행동 하나뿐.
고에몬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쓸고 주저앉았다.
지겐은 사무실로 들어서다말고 이상한 낌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로 사무실이랍시고 잡아놓은 곳은 언제나처럼 루팡이 산더미같은 계획서를 쟁여놓은 어느 외곽 호텔의 비지니스 룸이었다. 평소에 묵던 곳에 비하면 당연히 궁색하지만 그게 루팡답다면 루팡다워서 그럭저럭 수긍해버리기는 했다. 하지만 기껏 자리를 잡아놓은 것에 비해 내부가 너무 조용했다.
"루팡, 있나?"
"..."
"루.. 고에몬?"
"..지겐?"
"하아?"
루팡의 이름을 한번 더부르다가 지겐은 소파에 푸욱 파묻혀있는 고에몬을 발견했다. 참철검을 끌어안은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도 생각에 잠겨 자신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의 이시카와 고에몬이-하고 지겐이 얼빠진 입을 벌렸을 때야 고에몬은 제정신이 든 듯 자세를 고쳐잡았다.
"무,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라니.. 당연히 그 녀석이 불러서 왔다."
"루팡말이지."
"아아. 어차피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보다 녀석은?"
"나갔다."
"나가?"
비보가 어쩌고 저쩌고 한 주제에 무슨 놈의 외출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지겐에게 고에몬은 묵묵이 탁자 위를 가르켰다. 그 이마에는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지겐의 얼굴도 금세 험악해졌다. 가느다란 은테 안경과 흐트러진 여성용 코트. 지겐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 고에몬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또 후지코냐."
"아아. 새 코트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둘이 나가버렸다."
"그 여자는..! 저 안경은 뭐지?"
"후지코가 벗어놓고 갔다. 왔을 때는 교사풍으로 꾸미고 있었으니까."
"루팡 그 녀석은 진짜.."
고에몬은 짤막한 몇마디만으로도 상황을 전부 설명했고, 그 설명을 용케도 다 캐지한 지겐은 어렵지 않게 교사풍의 흰 블라우스에 은테 안경을 끼고 찾아와서 루팡을 구워삶아 데리고 나갔을 후지코를 상상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두번 일이 아니긴 하지만. 지겐의 짜증을 말릴 생각도 없다는 듯 고에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에 있는대로 인상을 쓰던 지겐이 문득 다른 화제에 생각이 미친 것은 조금 후였다.
"그보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네가 인기척을 눈치 못챈 거지?"
"눈치 못챈 건 아니다. 반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
"마찬가지잖아."
"달라."
"어느 쪽이든 내가 적이었으면 넌 죽은 상태였다는 건 변함없잖아."
"..."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고에몬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린애같은 승리감을 느끼지 모했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어쨌든 루팡과 달리 자제력이라는 게 있었던 지겐은 굳이 그 것을 밖으로 티내지는 않았다. 버번이 있다,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지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지니스 클래스의 작은 룸이라고 해서 술을 먹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을가. 냉장고를 따로 술병들의 라벨을 살피는 지겐의 뒤에서, 고에몬이 조용히 말했다.
"이상한 꿈을 꿨다."
"네가?"
"아아. 이상한 꿈이었다."
"어떤 거였는데?"
"후지코가 보석을 훔쳐 달아나서 루팡이 그 뒤를 쫓고, 너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갔어."
"평소랑 별 다를게 없는데?"
"..검을 뽑지는 않았다."
"네가?"
과연 이상한 꿈이긴 하군, 지겐은 혀를 차며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고에몬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챙에 가려진 표정은 보이지않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았다. 오랜 시간은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만큼은 둘의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고에몬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긴 시간은 지겐 다이스케라는 남자를 이시카와 고에몬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게끔 만들었다. 아마 그에게 있어도 마찬가지다. 모자에 가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자신이 읽어내듯, 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꿈도. 감정도. 왜 그러냐는 듯 지겐이 고에몬을 응시했다.
"왜 말하다 말아?"
"..."
"고에몬?"
"..아무 것도 아니다."
고에몬은 거의 티나지 않게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지겐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에몬은 거기에 앉아있는 그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익숙한 풍경처럼 자신은 그와 루팡과 함께였고 그역시 자신과 루팡과 함께 있었다. 그는 오랜 친우였고, 질긴 악연이였고, 믿을 수 있는 동료였고, 그리고. ..그리고.
꿈 속에서 자신이 붙잡았던 팔을 떠올렸다. 자신이 붙잡은 상대를 떠올렸다.
그에게 품었던 감정은, 분명 이 현실에서도 환상이 아니었다.
fin.
연성고자가 될 것같아서 즉석에서 리퀘를 받아보았습니다만 그래도 연성고자..orz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