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라기보다는 뇌리 속에서 몇번이나 반복되는 영상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인 그런 순간이었다. 의자위에 걸터앉은 늙은 노인은 노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을 하고 말도 안되는 꿈에 대해서 어린애처럼 떠들어댔다. 그런 게 가능해? 노인은 청년처럼 힘찬 눈빛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고말고, 너희들이 있다면. 이야기를 듣는 자신- 아니 '리제네 레제타'와 의식을 이은 누군가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할게. 천재 과학자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 부탁한다.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필름이 다시 반복되듯이 같은 화면이 또 지나갔다. 의자 위에 앉은 늙은 노인은 노인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눈을 하고 말도 안되는 꿈에 대해서 어린애처럼 떠들어댔다. 조금 괴로운 기분이 되었다. 이오리아. 당신은 그걸 믿었어? 이오리아 슈헨베르그. 나의, 우리들의 아버지. 당신은 이런 미래를 예측했어? 인간이면서도 우리들을 만들었던 아버지. 정말로 믿고 있었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안쪽에서만 맴돌았다. 노인은 여전히 신념이 깃든 눈으로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몇번이나 반복된 꿈 속에서. 이오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리제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서 순간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그가 알리가 없었다. 딱딱한 얼굴을 하고, 반복해서 이름을 불렀다. 리제네, 리제네 레제타. 이런 데서 자면. 이런데서 자면.
"-리제네. 이런 곳에서 자면 감기 들어요."
"...!"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였다. 허리를 굽힌 '그녀'의 연보라빛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고 내려와 그늘을 만들었다. 마주친 시선에서부터 차례차례 현실을 다시 재구성했다. 나를 부른 목소리, 눈 앞에 서 있는 나와 같은 아종. 그녀가 부른 '나'의 이름. 간신히 의식 속에서 꿈 속의 '그'가 떨어져나갔다.
"..아뉴 리터너."
"안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당신답지 않게."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손에 들고온 담요를 건네주었다. 받아들지 않자 아뉴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더니 넓게 펴서 하반신에 덮어주었다. 엉겹결에 담요를 쥐었다. 그녀는 내 옆, 소파의 빈 공간에 살짝 걸터앉았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밀어올려 아뉴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시간도 비겠다, 당신이 어디 갔나 찾으러 왔죠. 리본즈가 또 멋대로 가버렸다고 혀를 차던데요."
"내버려둬."
"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빙긋 웃고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억울한 심정이 되어 곁눈질로 그녀의 옆모습을 쫓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리바이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신체는 여성적인 곡선을 하고 있고, 다른 이노베이터들보다도 훨씬 부드러워보였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뉴는 고개를 돌렸다.
"신기해요?"
"..그다지."
"하기사.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죠."
"기껏해야 몸이 좀 다른 것뿐이잖아?"
"네. 신경 안 써요. ..그래도 좀 부럽기는 하지만."
"뭐가?"
"당신과 그 사람이나, 디바인과 브링같은."
"무슨 뜻이야?"
"리바이브는 나를 그렇게 기꺼이 받아들여주지는 않아요. ..내가 그와는 좀 다르니까."
고개를 돌리고 아뉴는 조금 쓸쓸한 듯 웃었다. 리바이브는 자신과 같은 타입인 아뉴 리터너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대하지는 못했다. 아뉴 리터너에게 거리를 두는 건 그런 이유에서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원리원칙에 따라 인과율을 중시하는 리바이브. 더없이 이노베이터 다운 그에게는 '자신과 완전히 같지 않은 동류'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불쑥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 애는 어린애니까."
"어머,리바이브를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요?"
"사실이잖아?"
"후후훗, 그렇긴 하지만."
아뉴는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었다. 그 모습조차도 여성스러워보였다. 리바이브와 같은 외관이지만 그는 저런 표정을 짓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 얼굴이 리바이브와는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져서, 어쩐지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여성체로 태어난 게 싫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뉴는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뇨, 그 것도 내 임무잖아요. 인간들 사이에 섞이게 되는 건 좀 싫지만, 그게 올바른 결과로 이끌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요."
"리바이브도 같은 말을 했어. 인간따위의 틈에 섞여야 하는 건 싫다고."
"그 애보다 내가 더 심할 거에요. 난 '평범한 인간'이 되어야하는걸. 기억까지 수정해야할 거고."
"자신 있어?"
"그걸 위해 이런 몸으로 태어났잖아요. 힐링이 들으면 질투하겠지만."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반쯤 장난스러운 어조로 불만을 말하던 아뉴의 표정이 처음으로 긴장한 듯 굳어졌다. 잠시 망설이듯 그녀는 눈을 내리 깔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움츠리며 다소 곤란한 듯이 웃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계획을 위해서라면."
"..아뉴 리터너."
"전 그걸 위해 태어났잖아요? ..열심히 할 거에요."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여성스럽게 부드럽고 고왔다. 그 안에 스미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못들은 척 어깨에 기댄 그녀에게 마주 체중을 기대었다. 서로 몸을 기대듯이 하고 한 모포를 덮고 있는 지금 이 상태가 몹시 이상한 것도 같고, 몹시 그리운 것같은 기분도 들었다. 조금 당황해서 아무거나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열심히 할 거면서 MS 훈련 땡땡이쳐도 되는 거야?"
"그건 리바이브 몫. 리바이브 기억에 동조해서 훈련 요령을 훔치는 게 제 몫이에요."
"리바이브가 들으면 화낸다."
"괜찮아요, 피차 얼마 후면 동조하기도 힘들어질 걸."
"아무렇지도 않아?"
"말했잖아요, 계획을 위해서라고. 참을 수 있어요."
아이처럼 웃고, 그녀는 다소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뺨을 부비다가,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리제네."
우리들은 잘 해낼 수 있어. 아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같았다. 아뉴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는 않았고, 그녀와 나는 동조한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그렇게 말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뉴가 알리도 없는데.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것을 보았던 걸까. 영원히 되풀이되는 꿈을. 기억을. 새삼스레 따뜻한 모포와, 빈자리를 메우는 듯한 체온이 그녀 나름의 위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대어있는 아뉴는 어느새 잠들었는지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깨에 닿은 뺨은 부드럽고 가냘퍼서, 마냥 낯선 것같으면서도 그리웠다. 영 익숙하진 않은 손길로 그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고는 조금 낯선 말을 속삭였다. 고마워, 아뉴. 어쩐지 그 말을 한 순간에, 잠들어있을 터인 그녀가 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라일, 우리들, 서로 사랑하고 있었죠?'
리바이브의 의식에 실린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었다. 이노베이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녀가 내린 선택이었다. 미안해요. 부드러우면서도 슬픈 목소리. 조그마한 죄책감. 동류들을 향한 그녀의 감정. 이노베이터인 자신을 뒤로 밀어놓은 그녀의 마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후에 그녀는 '라일 디란디'라는 인간 남자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당혹한 리바이브의 감정을 읽었다. 신기하게 자신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뉴는 상냥하게 웃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라면 그런 선택을 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온기를 나눠주던 다정한 동류. 그런 그녀라면. 그래도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울 생각은 없었다.
아뉴의 마지막 목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어깨에 닿았던 그녀의 체온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아뉴 리터너가 완전히 흐려진 후에도 거기에 남아있었다. 언제까지나 따뜻할 것처럼 다정해서, 상냥해서. 마음이 아팠다.
fin.
떠난 사람은 참 여러모르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합니다. 써놓고 뭐죠 이 뜬금없는 커플링은..! 하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같은데 의외로 쓱쓱썼습니다. 아뉴도 좀 별난 이노베이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별로 연애감정은 있는 건 아니고 누나와 동생같은 느낌.
리제네가 세상 속에 있는 이노베이드 단말 타입 중 하나를 움직여서 라일의 따귀를 때리는(혹은 다짜고짜 덮친 다음 있는 힘껏 혀를 씹어준다거나) 일을 망상했던 게 SS의 시초. 동류를 둘씩이나 앗아간 디란디 가문은 좀 얄미운 상대가 아닐까 싶어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