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동화책을 좋아했다. 유리구두를 신고서 계단을 뛰어내려간 아가씨, 사과를 먹고 잠든 공주님.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공주님에게든 멋진 왕자님이 찾아와 달콤한 키스를 남기고 공주님과 왕자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힘든 일을 이겨낸 공주님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채 왕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 속으로 들어간다.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않게 된 후에도 그 세계에 막연한 동경은 지속되었다. 나이가 들어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 공주님의 드레스가 아니라 왕자의 갑옷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동화 속의 세상을 잊지 못한 채 나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연인을 만났다. 대학 기숙사에서 옆방을 쓰고 있던 그는 기숙사가 정전된 날에 룸메이트가 없던 내 방을 찾아왔다. 여기 양초 없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제가 들고온 양초를 건네주었다. 깜깜하던 방에 불이 들어왔고 그 흐린 불 아래서 아이처럼 웃는 녀석의 얼굴을 처음봤다. 통성명을 나누고 친구가 되었고, 그 석 달 후에는 녀석이 고백해왔다. 학년이 바뀌었을 때 녀석은 성적이 부족하다며 기숙사를 나갔다. 그 때즈음 나는 그 자식의 자취방에 뻔질나게 찾아가 식탁을 차려주던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 날은 장을 봐서 녀석의 집에 찾아갔다. 과자와 과일같은 것을 내려놓자 녀석은 어린애같이 좋아했다. 허구헌날 청소라고는 죽어도 안하는 녀석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해주는 내 옆에서 그 놈은 사온 과일 중 바나나를 냉큼 집어들어 껍질을 벗겼다. 사람이 청소하는 데 뭐하는 짓이냐. 매섭게 노려보니 장난스레 웃은 녀석은 바나나를 혀로 빨아올렸다. 짐짓 외설스럽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서랍장을 뒤지더니 콘돔이 없다고 멋쩍게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호색한같은 새끼. 문밖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에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싫지 않은 기분에 웃으며 침대 시트를 벗겨냈다. 그 틈에서 못 보던 것이 떨어져내리지만 않았어도. 주워올린 그 것은 귀여운 방울이 달린 머리끈이었다. 그 자식도 나도 끈으로 묶어야할만한 긴 머리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사내새끼들이 할 물건이 아니다. 만면의 미소를 띄고 돌아온 그에게 그것을 내밀자, 안색이 확 변한 녀석은 여동생의 것이라고 둘러댔다. 변명을 고를 거면 똑바로 하던가. 녀석은 외동아들이었다.
3일 후에 휴대폰에 메세지가 왔다. 만나자. 문자를 꾹꾹 눌러 대답을 보냈다. '좆까.' 다음은 전화벨이 울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자식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기를 집어던지려 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병신같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만나달라는 소리를 반복했고 나는 좆병신같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내일, 집 근처 레스토랑. 오후 7시. 정해지자마자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만나자고 한 곳은 녀석과 자주가던 곳이었다. 씨발. 씨발. 욕설을 내뱉으며 배개에 얼굴을 묻었다.
레스토랑을 찾아가고, 앉아있는 그 자식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옆자리에는 귀여운 얼굴의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동아리 후배다. 안녕하세요, 선배. 내가 그날 침대에서 발견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곱게 묶고 그녀는 아이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진해보이는 미소에 할 말을 잃었다. 녀석도 나도 아무 말 없는 사이에 여자애만이 가벼운 손짓으로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후식으로 먹기에는 느끼하다며 나도 녀석도 먹지 않았던 메뉴였다. 녹기 전에 먹어야 돼서요. 눈이 마주치자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미소지었다. 가느다란 손목과 은색 스푼이 잘 어울렸다. 침묵 속에서 그녀는 결국 아이스크림을 혼자 다 먹었다. 스푼을 내려놓고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흔하디 흔하고 듣고 싶지 않은 그런 말들이었다. 병신같은 내 애인은 그녀와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고, 오늘 나를 이 자리에 불러낸 것도 저 유유부단한 놈에게 그녀가 채근한 결과였다고. 흔한 삼각관계에다 양념을 친 수준인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울 것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웃으면서 대꾸해줬다. 후장에 칼침박기 전에 내 눈 앞에서 꺼져. 그런 말을 한 주제에 레스토랑에서 먼저 나온 건 내 쪽이었다.
집에와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 자식이었다. 배터리를 뽑고 벽에다 집어던져버렸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침대에 옆으로 쓰러졌다. 1년 7개월의 연애였다. 데이트도 섹스도 일상처럼 해왔다. 어린애같은 그 자식에게 좋아하는 요리를 먹여주는 게 좋아서 이것저것 해주었다. 녀석은 좋아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한번에 끊지 못할만큼 녀석을 좋아했다. 병신같이 좋아했다. 병신같이.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배개에 머리를 쳐박고 숨죽여 울었다. 안구가 녹아서 흘러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지독하게 울었다. 심장 안쪽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죄다 타버리는 것같은 아픔에 울고 또 울었다. 문의 초인종이 긴 울음소리를 낸 것은 그 때였다. 열어줘. 열어줘. 잘못했어. 울음기 어린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그 자식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녀석은 울면서 뭐라고 변명을 들어놓았다. 고개를 들어 소리질렀다.
나가죽어, 개자식아. 뒈져버리라고. 울음에 질식한 것같은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꺼져 개새끼야. 한번 더 소리질러주고 귀를 막아버렸다.
의미도 없이 어린시절 곧잘 읽었던 동화책이 떠올랐다. 공주님은 왕자님을 만나고,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병신같이 아름답기만 한 그 동화책 속 이야기는 현실에 없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영원히 행복했다고. 엿이나 처먹으라지. 죽어버리라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이불 속에 몸을 웅크렸다. 세상에 그런 건 없었다는 걸 빨리 알았어야 했다. 치마를 찾는 아들을 보며 당황해하던 어머니를 보기 전에, 너같은 놈은 내 자식이 아니라며 나가라던 아버지에게 맞기 전에. ...그리고 저 개새끼를 만나기 전에.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그래야했는데.
미안해, 미안해. 작게 줄어든 소음이 여전히 모기소리마냥 귓속을 웽웽 울렸다. 빌어먹을 자식. 개자식. 나쁜 새끼. 소리죽여 끅끅 울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동화책 속의 공주님, 의절한 부모님, 쓸데없이 귀여웠던 애인의 여자친구, 병신같은 애인, 빌어먹을 세상. 그리고 그 병신같은 새끼를 좋아한 나 자신까지도.
나와 그의 울음소리에 뒤섞인 초인종은 영영 멈추지 않을 것처럼 반복되었다. 오설과 비명이 묻은 그 소리가 어서 꺼져버리길 바랬다. 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거기서 그 소리가 울렸으면 하고 기대했다. 그런 자신이 비참했다.
끝내 문은 열리지 않은 채, 초인종은 사그러들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