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온 스트라토스의 취미는 누가뭐래도 독서다. 진득하게 한 곳에 달라붙어있는 것은 전직 스나이퍼의 습관이자 마이스터의 미덕이었고 책은 한 자리에 붙박혀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동료였다. 다만 20세기부터 권장되어왔던 바른 책읽기는 그다지 그가 신경쓰는 항목에 들지 못했고, 때문에 록온은 정자로 앉아 30센티 거리를 두며 책장을 넘기기보다는 배를 깔고 누워 술렁술렁 책장을 넘기는 쪽을 택했다. 눈이 나빠진다 자세가 나빠진다하는 잔소리를 들을 나이도 아니었으리만치 록온은 자신의 책읽는 습관에 의문을 가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록온."
"록온 스트라토스."
"어, 세츠나, 티에리...아? 그건 뭐야?"
"가만있어줘야겠다."
"에? 에? 에에에에?;;;;;;;;;;;"
지상 대기포인트에 준비된 숙소에서 노닥거리고 있다가, 문답무용으로 세츠나와 티에리아에 의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제압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비명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 놈은 냉큼 등위에 올라탔고, 다른 한 놈은 우아한 손짓으로 책을 치우며 품에 안고 온 것은 바닥에 우수수 쏟았다. 장미향이 확 덮쳐왔다. 백송이는 족히 됐음직한 꽃들이었다. 상황판단을 못하고 록온이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사이, 티에리아는 단호한 태도로 안경을 밀어올렸다.
"시작하자, 세츠나 F 세이에이."
록온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등 뒤에 올라타 일어나지 못하게 내리누르는 16세의 무게와, 정좌로 꿇어앉아 반듯한 손가락으로 꽃을 엮는 추정연령 10대 중후반 미소년의 날카로운 시선을 번갈아보다말고, 록온은 그만 그대로 무너졌다.
약 30분 후.
록온은 눈만 굴려 고개숙인 티에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보라색의 매끄러운 머릿결에 한참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긴 하지만 여자보다도 고운 얼굴에, 손에는 새하얀 장미. 무릎에도 하얀 장미. 꽃과 소년이라는 멋진 주제였다. 그러나 꽃 두송이를 필사적으로 엮은 티에리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것은 머리칼에 꽂았다. - 세츠나가 서툰 손길로 열심히 땋.아.준. 록온의 갈색머리카락에.
록온은 좀 울고 싶어졌다.
"저기, 세츠나.. 티에리아.. 지금 뭐하는 거야?"
"머리를 다듬고 있다."
"그건 내 머린데, 세츠나.."
"평소의 답례다."
"..티에리아, 뭐하는 건지 물어보면 안될까?"
"꽃을 엮고 있습니다만."
"저기, 자연보호는..?"
"작전수행을 위한 희생은 필수불가결합니다."
돌파구를 찾아 건넨 말은 장렬하게 씹혔다. 머리를 감싸쥘 수도 없어 록온은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뭘 잘못했기에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전날밤 저녁식사중에 아무 생각없이 불러줬던 노래가 나빴던 걸까. 확실히 가사는 꽃단 소녀 메리X이었다. 아니 분위기가 나빠서 쇄신해보려고 한건데. 랄까 결국 그냥 싸해졌잖아, 알렐루야는 '록온, 음치였네요'같은 소리나 해댔고. 그러고보면 밥먹고 나오면서 꽃과 미인이라든가 예쁜 화관에 대한 시시껄렁한 농담도 했던 것같다.
"둘 다- 왜 하는지는 물어봐도 돼..?"
기운이 빠져 겨우겨우 물어본 말에 두 사람은 의외로 대답하지 않았다. 설령 밖에서 핵폭탄이 불발상태로 해변가에 파묻혀있다가 폭발한대도 꿈쩍 안할 것같은 두 사람이었던지라 록온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대로 떨쳐내도 되려나, 아니 그건 역시 조금 그런가-까지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열 여섯 아이다운 어린 목소리에 아이같은 기색은 조금도 없는 말투로 세츠나가 말했다.
"크리스티나 시에라가 꽃을 선물하는 게 최고라고 했다."
"..미스 스메라기는 꽃은 장식하는 게 제일이라고 했습니다.."
"지상에 와서 꽃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선물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감당안되는 동료를 어쩌면 좋을까. 죽이 척척 맞아 말을 늘어놓은 두 사람에 록온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악의라고는 한점도 없는 두 사람에게 매몰찬 소리도 할 수 없어 록온은 그대로 끄응,하고 고개를 파묻었다. 대체 애들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싶어 나이스 바디의 전술예보사와 마이 페이스의 오퍼레이터 양을 향한 원망이 무럭무럭 솟아올랐을 때, 세츠나는 눈치를 살피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너는 어제 꽃이 아름답다고 했다."
"꽃과 미인은 함께 있는 게 좋다고도 했습니다."
..제 1 원흉은 나였냐..!!!
당당하게 말하는 두 사람 앞에서 록온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요는, 입이 방정이라는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연하의 동료들에게 구속당한 상태로 머리에 꽃을 장식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한 적 없었는데. 거야 꽃과 미인은 함께 있으면 좋다고 하기는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로 여성들한테 해당되는 말이고, 마이스터들 중에서 굳이 고르라면 티에리아 정도가- ..얼레? 록온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 질문인데.. 왜 나야?"
이유는 궁금하다, 그래도 어쩐지 알아서는 안될 것같다- 망설이는 사이 멋대로 튀어나간 질문에 티에리아와 세츠나가 동시에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록온의 머리를 사이에 두고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약 5초후, 둘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네가 아름다우니까다."
"당신이 미인이니까입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시에 튀어나온 대답에 록온은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모르겠다, 항복. 나이 스물 넷하고도 반. 외모에 컴플랙스를 갖고 자란 적은 없었지만 동성의-덤으로 연하의- 소년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서툰 손길이나마 열심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세츠나건 티에리아건 태도는 한없이 진지했다. 실력이야 뭐라 말할 수 없었지만. 뭐라하든 화관도 머리 손질도 두 사람의 전문분야와는 아득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뭐든지 완벽주의자인 이 둘이 이렇게 서투르게 일하는 걸 볼 수 있다는 건 그 나름대로 득이려나.
암만 그렇대도 장미향에 파묻힌 지금 상태는 록온의 감성으로는 좀 힘들어서, 록온은 애써 치켜들었던 고개를 두 팔 사이에 푹 파묻고 절망했다. 하기사, 다음 순간 목께에 부스스하게 흩어진 고수머리를 붙잡고 땋아주고 있던 세츠나의 입에서 불만스러운 한숨이 터져나와, 고개를 다시 바싹 들어야하긴 했지만. 아까야 바둥거렸지만 지금은 일으켜준대도 일어나지 못하겠다 싶어서, 록온은 속으로만 눈물지었다.
fin.
맛있는 식재료를 사들고 돌아온 알렐루야는 록온을 보고 놀랍니다. 변명할 말을 생각하는 사이, 환하게 웃은 알렐루야의 첫마디는 "록온, 예뻐요!" 티에리아와 세츠나는 만족스러워하고 록온은 절망하며 고맙다고 눈물짓습니다.
크리스는 아무에게나 꽃 선물하라는 소리한 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할 때는) 꽃이 제일이지!"라고 했을 뿐.
록온 머리에 꽃 꽂으면 어울리겠다하고 멍하니 생각하다 쓴 뻘 SS입니다. 흰장미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응.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