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이 아닐 때의 프톨레마이오스에 평온한 공기가 흐르게 된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해오던 티에리아가 호기심 어린 병아리가 어미를 쫓는 것과도 같은 태도로 록온 스트라토스를 따라다니게 된지도 얼마 후, 프톨레마이오스의 브릿지에서 티에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 앞에 주어진 난제에 반론을 제기했다.
"차를.. 타라구요?"
그로서는 꽤 힘들인 반론이었다.
사람좋은 미소를 지은 록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차. 몰라?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영어로는-"
"압니다, 그런건!"
티에리아는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일장연설이라도 늘어놓을 태세의 록온의 말문을 끊었다. 좀 너무 놀렸나 싶어 록온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퍼뜩 정신이 든 티에리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압니다."
<알아, 알아!>
반복하는 목소리는 티에리아로서는 드물게 당혹하는 어조였다. 말꼬리를 붙잡아 짤랑거리는 오렌지 색의 구형 AI는 분위기 따위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럼 못써, 하로하고 웃으며 AI를 껴안은 록온은 시원스레 웃으며 빈손을 들어 윙크를 날렸다.
"그럼, 부탁한다?"
멍해진 티에리아를 남기고 그렇게 록온이 사라진지도 한참 후.
"..yes, sir."
어딘가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티에리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20분.
30분.
1시간.
1시간 30분.
"...저기, 멀었습니까...?;"
조심스레 입을 연 알렐루야는 당혹스러운 듯 맞은 편 소파의 록온을 바라보았다. 덧붙여 그 사이의 탁자 위에는 어디서 공수해온 것인지 제법 그럴 듯해보이는 디저트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쉬폰, 타라미슈, 초코무스에 치즈케이크까지. 보기만 해도 단향기가 올라올 것같은 식탁 앞에 앉은 세명의 남자들은 제법 진풍경이었으리라. 알렐루야의 눈에 조바심이 어린 것은 이 광경을 누군가-가령 이 광경을 본다면 절대로 사진으로 찍어 남길 듯한 브릿지의 누군가-에게 목격당할까봐 걱정한 탓도 좀 있었다. 그런 마이스터 전원에게 두 팔을 흔들어가며 집합을 명령했던 록온은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아 두 손을 들어보였다.
"글쎄- 그건 티에리아가 결정할 문제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
"..1시간 반이 지났어."
말끝을 흐리는 알렐루야의 대사를 세츠나가 담담하게 보충했다. 지금껏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손안의 휴대용 PC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세츠나로서도 꽤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록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거야, 좀 더 기다려도 나쁠 건 없겠지만-"
그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시점에서 세츠나는 물론이고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는 알렐루야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늘었다. 듀나미스의 스나이퍼답게 눈이 좋은 록온으로서야 놓칠리 없는 변화였지만 그는 애써 못본 척 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더 기다리면 케익이 말라버리겠지..? 아하하.."
말을 돌린 것이 분명한 제스쳐로 분란이 일어날 것같은 둘을 제지하고, 록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록온의 옆자리에서 구형의 몸을 흔들고 있던 하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뒤를 따랐다. 하로를 한 손에 끌어안은 록온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하아."
남겨진 두 사람의 입에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이- 티에리아-"
<티에리아, 티에리아->
조리실 문 앞에서 록온은 일단 예의삼아 티에리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기쁘게 그 이름을 부르는 하로를 기특하다는 듯 쓰다듬고, 록온은 잠시 기다렸다. 아무래도 대답은 없을 모양이었다. 조금 망설이다 록온은 인식장치위로 손을 얹었다.
"....하아?"
안으로 들어선 록온의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빠져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티에리아는 차를 타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것을 차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산처럼 쌓인 실험용 비커들이 조리대 위에 일사불란하게 늘어서있었다. 각각 미묘한 색깔의 물이 담겨있는 그 것들은 제작자의 손이 이미 떠나버린 작품인양 기묘한 색깔과 더불어 더더욱 기묘한 향을 주방 내에 내뿜고 있었다. 수십개의 기묘한 향이 섞여서 정신이 혼미해질만한 엄청난 냄새가 되어버렸음은 물론이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비커들의 한쪽 옆에서는 무언가 무시무시해보이는 액체가 담긴 주전자‘들’이 악마의 소환재료라도 되는 양 엄청난 기세로 끓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티에리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엄청난 양의 티백들을 한쪽 구석에 쌓아놓고 계랑기로 정밀하게 재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비율이 잘못된 건가, 적어도 확실했을-"
"..티에리아?;"
"...록온..!!"
반쯤 압도당해서 티에리아를 부른 록온의 목소리에, 티에리아는 흡사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반응했다. 상대를 확인한 티에리아의 얼굴에 낭패감이 퍼졌다.
"......아직..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만."
"아.. 저기, 그런데 이건 다 뭐야?"
"그건.. 실패작들입니다."
입술을 깨문 티에리아의 얼굴에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라 반응할 말을 찾지 못하고 록온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쨌든 넘치기 시작한 주전자의 불을 껐다. 티에리아는 그의 움직임에 흠칫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무서운 기세로 록온의 옆으로 가서 다른 주전자의 불을 차례차례 껐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록온. 이 임무는 실패입니다. 아무리해도 맛이 좋아지지 않아."
"티에리아."
"애시당초 내가 이런 것을 하는 게 무리였던 거에요. 다른 적절한 수행자를 선택했었어야 합니다."
"티에리아."
"내가 당신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실수였습니다. 완료 시간을 한참이나 넘기면서도 재대로된 결과를 내지 못했-"
"티에리아."
시선도 마주치려하지 않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록온은 스위치에서 손을 떼지 않은 티에리아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움찔한 티에리아가 고개를 들어서 록온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티에리아는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네에네에, 거기까지."
당황하고 있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껏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고, 록온은 티에리아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티에리아는 어색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빼지도 못한 채 딴 곳을 보고 있었다. 흡사 선생님에게 혼나는 유치원생같은 모습에, 록온은 저도 몰래 피식 웃어버렸다.
"..도대체가 말이야. "
록온은 손을 들어 티에리아의 머리카락을 푸스스 쓰다듬었다. 어린 남동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굳이 말하면 남동생이라기보다는- 이건 별로 상관없나. 록온은 다정한 어조로 핀잔을 주었다.
"이건 시험이 아니라구, 티에리아."
"..?"
아이가 어머니에게 흔히 그러하듯이, 티에리아는 조심스럽게 눈만 굴려 록온을 올려다보았다. 눈치를 살피는 어린애같은 태도에 씨익 웃고 록온은 실패작중 하나를 집어들어 가볍게 입에 머금었다. 티에리아가 흠칫 놀랐다. 차라기보다는 새까만 물체에 가까운 그 것이 맛있을리가 없는데.
"로,록온, 그건-"
"괜찮아, 괜찮아."
조바심어린 시선으로 보는 티에리아를 한 손으로 제지하며 록온은 비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목소리를 바꾸어 타일렀다.
"이건 그냥 만들면 되는 거야, 시험이나 미션같은게 아니라."
"..록온.."
"인생에 단번에 백점이 나오면 그게 사람이냐. 적당히 실패도 해보고 하는 거지. 나름 먹을만하다구-?"
<먹을만해, 먹을만해->
통통 뛰는 하로에게 웃으며 그래그래,하고 쓰다듬어주고 록온은 비커들 몇 개를 집어올렸다. 얼른 가서 먹자, 세츠나들은 한계라구-하고 웃으며 덧붙이는 록온 앞에서 티에리아는 금방 울것같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차가 왔습니다!"
"늦-"
한참 후에 나타난 록온에게 불만을 말하려던 세츠나는 쟁반을 받쳐든 록온 뒤에 서있는 그림자에 순간 할말을 잃었다. 동그란 오렌지 구체야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는 거지만, 싫은 듯한 걸음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온 티에리아 아데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세츠나와 알렐루야의 당혹을 모르는 척 웃어넘긴 록온은 탁자 위에 쟁반의 비커들을 내려놓았다.
"자아, 앉아앉아~"
손을 저으며 록온이 권유하자, 티에리아는 그제서야 어색한 걸음으로 자리로 걸어갔다. 다들 자리에 앉자 록온은 자신 몫의 비커를 집어들었다. 가장 심해보이는 색깔의 차를 택했다는 게 그다면 그답지만.
"티에리아 특제 티라구- 귀한 거니까 천천히 마셔."
말 끝에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록온의 기세에 눌려 마이스터들은 제 몫의 비커를 저마다 하나씩 집어들었다. 한 모금을 머금고, 저도 모르게 세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세츠나는 티에리아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맛..있어."
예의 무뚝뚝하기 짝이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세츠나는 황급히 눈 앞의 케이크에 포크를 찔러넣어 갈랐다. 부드럽게 녹는 치즈케이크가 너무 달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츠나는 말없이 그 것을 우걱우걱 씹었다. 조금 늦게 비커를 탁자위에 내려놓은 알렐루야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눈 앞의 타르트를 입안에 넣었다.
"봐, 다들 잘 마시잖아."
느긋하게 말한 록온이 웃으며 비커 속의 액체를 꿀꺽꿀꺽 마셨다. 하기사, 호쾌한 태도와 다르게 그 역시 내려놓자마자 카라멜 무스 절반을 입 안에 던져넣긴 했지만.
잔뜩 굳어있던 티에리아는 기계적으로 자신의 비커를 입술에 갖다댔다. 첫 모금을 넘기고, 티에리아역시 온 몸을 굳혔다. 록온이 아아, 하고 혀를 차는 순간, 뜻밖에도 티에리아는 두 손으로 비커를 꼭 붙들고는 그 차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다음 기회를 노리겠습니다."
탁 소리나게 컵을 내려놓고, 티에리아는 어딘가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누구도 대꾸하지 못한 사이, 티에리아는 자신 몫의 딸기쇼트케익을 서툴게 갈라서 입안에 넣고 꾸욱꾸욱 씹었다.
"...괜찮은 거죠?"
안경 뒤의 붉은 눈동자에 살짝 물기가 어린 것같은 것은, 분명 착각은 아니리라. 그렇게 케익으로 입안의 쓴맛을 중화시키고, 티에리아는 덧붙여서 작게 말했다.
"...시험이, 아니니까요."
얼핏 알아듣지 못한 다른 마이스터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 의미를 알아차린 록온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록온을 곁눈질로 보고, 티에리아는 별 좋아하지도 않는 케익을 다시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록온이 너털 웃으며 다들 더 먹으라고 손짓했다. 건담 마이스터의 네 청년들은 그렇게 쓴 차와 케익의 다과회를 진행했다. 달디달달한 케이크에 지독하게 쓰고 향은 다 날아가버려 맛이라고는 그림자도 없는 차였다.
그런데도 그 공간은 왠지 모르게 그 남자처럼 상냥해서, 티에리아에게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어딘가가 따스해지는 감촉과 함께.
오래도록.
오래도록.
fin.
1기 종영 직후에 썼던 거라 지금 보니 엄청 색다르네요. 지금은 저 티에리아가 2기 티에리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예전에 썼던 글을 올리는 건 좀 그런가 싶었는데 2기 이야기로 하나 쓰고 싶어서 어쨌든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