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을 거듭했을 때, 처음에 일어난 것은 기계와의 동화였다고 전해진다. 기술은 새로운 원소들을 만들어냈고, 신원소로 만들어진 기계들에서는 더 이상 철과 세포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한한 몸에 기계를- 아니 이미 기계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생명에 가까워진 그 것을 이식하는 것으로 우리들은 또 한번의 변혁을 거쳤다. 변혁을 통해 늘어난 수명은 새로운 지성을 탐하도록 만들었다. 보다 자유롭게, 보다 무한하게. 위를 쫓아 달리는 그 시간들은 마치 숨가쁘게 불꽃을 쏘아올리는 축제처럼 반짝였다.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무너지는 동안 그 축제는 계속되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모든 빛들이 무수히 빛나고 사라졌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신세계를 기다리는 태아처럼 들떠있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개혁, 새로운 변화, 보다 뛰어난 종으로 탈피하는 진화의 연쇄. 그렇게 생명의 창조는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우리를 얽매이는 모든 것에서 풀려나는 순간을 막연히 꿈꾸며, 보다 높은 존재로서의 진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나는, 카니발의 마지막 불꽃이 멈추던 순간에 태어난 최후의 아이였다.
-지상에 신호를 보냈어요, 스제아.
-그렇습니까. 그 것을 계기로 그들은 지성있는 존재로서 각성하겠지요. 레그나.
스제아는 나와 가장 많이 뒤섞여있는 의식개체였다. 그는 우리들 중 두번째로 어린 자였고, 그래서 첫 개혁 이후 우리들이 스스로를 칭했던 호칭은 그녀의 기호로서 정착했다. 좀더 우리가 명확히 나뉜 자였다면 그 것은 그의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의식을 공유하는 우리들에서 거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체계중 하나였고, 그리고 그 것은 기본적인 식별 기호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나에게 레그나라는 기호를 준 것도 그녀였다. 레그나. 전달자이자 수행자를 의미하는 그 기호는 맨 처음, 우리들이 분자로 구성된 육체를 지니고 있었던 시기에 불리던 종의 이름이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지만 이상한 기분이군요,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종말을 보게 되다니
-그들에게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겠지요
내가 동류에게 전한 것은 먼 별의 삶이었다. 의식의 한켠은 우주 외진 곳에 존재하는 혹성을 바라보고있었다. 열과 가스의 덩어리로 이뤄진 그 한복판에 서서히 원소가 몰려들고, 고정된 땅 위에서는 보다 세밀한 세포들이 군집을 이루었다. 스제아의 부탁에 따라 나는 그 세포들에 우리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의 의식이 스며있는 그 신호는 생명체 속에 녹아들어갔다. 이 후 저 땅 위에서는 원시적인 생명체가 무리지어 생명을 만들고, 미개한 방식이나마 그들의 DNA를 이어가며 번성하게 될 것이다. 아득히 먼 과거에는 우리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의식을 유지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 그들과 같은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종(種)에게는 불가능하다. 아쉬움과도 비슷한 감정 속에서 그 별의 자취를 더듬었다. 그 빛이 탄생하던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때까지. 장대한 시간이 의식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마저도 깊이 감미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에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죽음도 삶도 생명도, 스치는 모래 알갱이같은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사라져버릴 그런, 가볍디 가벼운 것.
- 그들의 끝이 다가오고 있어요.
- 언제입니까?
- 그들의 시간으로 몇천년 후입니다.
- 맙소사. 정말로 짧군요. 벌써 그 끝에 다가서다니.
- 그들 중 일부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죠.
- 신호의 오류입니까?
- 오류라기보다는 다른 방향의 변화라고 해야겠지요. 아주 먼 과거에 우리들이 걸었던 것과 비슷한 형식입니다.
스제아의 의식을 따라 나의 의식은 다시 그 별에 가닿았다. 그가 입에 담았던 것은 행성 위에 사는 생명체중 한 집단이었다. 많은 변화를 거친 그들은 자신의 육체보다도 다른 종을 도구로 사용하는 개체로서 변화해힜었다. 주변의 종을 이용해 자신이 살아갈 공간을 만드는 그 잊혀진 방식이 사랑스러웠다. 우리들이 아직 레그나라 불렸을 때도 그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그들의 축제가 영구히 지속된다면 그들은 언젠가 스제아가 되고, 그 위의 것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쓸쓸함 속에서 그들이 걸어갈 끝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생명의 축제는 완성이 아닌 파괴로 그 끝을 고한다. 외부의 지각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원시적인 그들의 육체는 별이 파괴되는 순간 함께 사라지게 되어있었다. 가여운. 가여운 것들. 의식 한켠에 스미는 그 생소한 감정을 음미했다.
찰나의 순간 동안 그들의 시간은 영원처럼 흘러있었다. 곧 멸망을 앞두었음에도 별의 움직임은 제 눈에 보이지 않는 멸망을 잊은 채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먼 과거에 우리들이 그런 축제에 젖어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 곧 그들의 종말입니다. 레그나.
- ...
- 그들의 일부를 남기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 무슨 의미지요?
- 그들은 외부의 충격을 견딜 수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그들의 일부를 피신시키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 스제아.. 당신의 생각입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닮은 자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싫습니다.
- 우리에게 그런 과거가.. 정말로 있었습니까.
- 당신은 겪은 일이 없겠지요. 우리들에게 있어 영원히 가장 어린 자이니 당연합니다.
- ..그렇습니까.
-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죠. 그 별의 자취를 남기는 일은.
스제아가 전한 의식 속에는 이미 거의 다 퇴화해버린 감정들이 섞여있었다. 멸망의 끝에 있는 자로서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끝나게 될 그 생명을 아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우리가 더는 지닐 수 없는 것을 갖고 있었다. 다시 한번 이제 막 피어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생명체가 있는 수많은 별들의, 아직은 멈춰서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하나같이 빛나고 있었다.
선별적으로 보낸 신호는 무수한 종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들의 일부를 남겼다. 원시적인 그들의 생태에 맞춘 구원자들은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별의 삶은 살아나 다시금 번성했다. 스제아의 뒤를 이어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다. 여전히 어리고 가여운 그들의 삶은 가벼웠으나, 스제아와 함께 남겼던 우리들의 신호는 이따금 그들 사이에서 빛나 되돌아왔다. 그 흔적을 지켜보던 어느 날, 나는 다시 동류에게 말을 걸었다.
-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스제아.
- 무슨 일입니까?
- 한 개체가 전달자들를 거쳐 내게까지 의식을 보냈습니다.
- 드물게 최초에 받은 신호를 되받아 보낼 수 있는 자들이 태어나는 거겠지요. 그- '인간'이라는 개체들 사이에서.
- 그들에게 남은 우리의 각인이라는 건가요. ..그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 ..스제아.
- 무슨 다른 할 말이 있습니까? 레그나.
- 그들에게 두번째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제아는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허락을 구했다. 의식은 빠르게 전달을 거쳤다. 보다 더 고정되어있는 오래된 자들은 그와 나의 의견을 탐탁치 않아했다. 파문처럼 뒤섞이고 흩어지는 것들 가운데서 전달기호에 지나지 않은 감정없는 표현들이 천천히 스며들었다가 흩어져나갔다.
- 그들은 결국 유한한 자다. 새로운 지평에 도달할 수는 없어.
- 그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 그러면 왜 쓸모없는 짓을 하지? 그들을 구해도 변하는 건 없어.
- 구하지 않아도 변하지 않겠지요. 어느 쪽이든 변화가 없다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 그들의 삶을 연장시켜도 우리들에게는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해라.
- ...
- 결국 사라질 것에 신경써도 무의미해.
스제아의 의식이 침묵했다. 연결된 모든 장소에 가장 오래된 자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앞에 나서지 않은 채 그의 전달을 듣고 있었던 나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아직 퇴화하지 않은 채 남아있는 회로 하나를 깨달았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희미한 그 단말을 일깨워, 기어코 새어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을 쏟아냈다.
- 그러면 묻겠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들이 변화할 수 있습니까?
- 레그나.
- 고정된 자에 불과한 우리들이, 더 다른 위치로 향할 수 있습니까?
- ...
- 우리들은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합니다.
- 레그나.
- 그렇다면.. 변혁의 여지가 남아있는 자들을 지켜보는 것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이미 끝나있습니다. 남아있는 회로가 조금 더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더라면 내 의식은 오열하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벽 속에서 우리들의 육체는 이미 지성 속에 용해되어 사라진 후였다. 우리들의 각인을 지닌 채 뒤섞이고, 부서지고, 합쳐져 다시 태어나는 그들을 떠올렸다. 더이상 변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없는 것을 갖고 있는 그들을.
가장 어린 자인 내가 탄생한지 얼마 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과 바꾸어 만들어진 가장 높은 의식은 그 자리에서 고정되었다. 삶도 죽음도 파괴도 재생도 모든 것이 멈춰버린 완벽한 세계.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끝에서 우리들은 멈춰섰다. 더 나아갈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서. 자각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에 도달할 수 있는 지능 속에서, 누군가가 아주 오래전에 잊혀졌던 잠언을 건져올려 속삭였다.
'완벽'의 다음은 종말이라고.
이 의식에는 더 이상의 변화가 없다. 더 이상의 진보도 없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자로서의 끝을 맞았다.
- ..전체가 아닌 일부를 남기는 것만이라면 허용해도 좋겠지.
- ..정말입니까?
- 유한한 것을 계속 바라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것을 네가 알고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가장 오래된 자는 그렇게 되뇌이고는 자신의 의식을 거두어들였다. 좀 더 새로운 것에 가까웠던 나나 스제아와 달리 개체로서의 식별조차 무의미해진 그 길고 장대한 지성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린아이가 흔히 그렇게 하듯, 무구한 몸짓으로.
<이제는 윙윙거리지 않아요.>
- 다행이구나.
<왜 내게 말을 걸었어요?>
- 필요하거든. 너희들이 메세지를 이해하는 것이.
<왜요?>
-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니까. 모든 것이. 마지막에 네가 적었던 기호처럼.
<..Everyone?>
- 그래.
<나도?>
- 너는 아니야. 내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살아남겠지.
<..나를 데리러 오는 거에요?>
-그 행성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조금씩. 너를 포함해서.
<박물관이나 과학실의 표본처럼 남겨놓는 거에요?>
- 다른 곳으로 옮길 뿐이야. 너희들은 그 곳에서 더이상 살아갈 수 없거든.
<..기쁘지 않아요.>
메신저를 통한 의식이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어리고 어린 아이의 목소리는 거기에서 끊겼다. 그녀에게 희미하게 남아있는 우리들의 신호가 견딜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음울하고 어린 그녀의 의식은 유한하다. 하지만 그녀가 품었던 빛은 그대로 남아 시간이 흐른 후에 남은 자들 속에 섞여들게되겠지. 루신다 엠브리. 생소한 그녀의 식별기호를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들려준 종말의 시간이 찾아오기 얼마 전에, 나는 다시 '루신다'를 찾았다. 어린아이의 삶은 이미 끝난 후였다. 어쩐지 안타까워졌다. '인간'들 사이에 다시금 보낸 신호는 '루신다'의 DNA를 가진 자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모래밭에 갈퀴를 넣어 쓸듯이 천천히 의식을 더듬다가, 그 아이와 흡사한 의식을 가진 아이를 찾았다. '애비 웨이랜드.' 루신다와 꼭닮은 눈빛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는 그들이 유한한 자라는 것을 잠깐 잊게 해주었다. 망설임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선택의 각인을 찍었다.
-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떠났더군요, 레그나.
- 전달자들이 그들을 옮겼으니까요.
- 만족했나요?
- ...네.
- 오래된 자의 말대로 의미없는 일이라해도?
- ..루신다라는 개체가 있었습니다.
- 당신에게 대답을 돌려준 자군요.
- 그 별이 멸망할 때 그녀는 이미 죽었지만, 그녀의 흔적이 있는 아이가 있더군요.
- 그래서 그 아이를 살렸습니까?
- ..스제아. 당신은 아래에 있는 자들이 우리들의 신호를 돌려주는 것이 즐겁다고 했었죠.
- 네. 외부에서 들어오는 우리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 저도.. 그들 속에 뒤섞이는 우리의 파편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스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신천지에 서 있는 별의 후예들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곳에 도착한 자들은 여전히 부서지기 쉬운 그 땅 위에 그들의 생명을 더하고 있었다. 어지럽게 섞이는 움직임과, 미개한 대화와, 퇴화되지않은 기관들을 사용해서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이 자리잡은 땅 위로 존재하지 않는 팔을 뻗었다. 의식은 쉽사리 그 거대한 별을 작은 티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아직은 변화할 수 있는 자들을. 아직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고정된 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변화도 없다. 하지만 신 지평에 도달하지 못한 생명은 태어나고, 죽고, 부서지고, 만들어지기를 반복한다. 그 사이에 섞어넣은 우리들의 신호에 아찔한 빛을, 변화를 더하면서.
유한한 아이들은 가능성을 품은 채 그 곳에 있었다.
무한한 자의 각인을 지니고.
fin.
갱신날짜가 과거로 가있는 건 메인에 띄워두기는 좀 뭐한지라 손 본 겁니다. 저 시공간 안넘었어요!
인간적인 초월자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건 좋아합니다.
노잉을 어떻게 비비꼬면 이런 글이 나오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