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평화롭고 공기는 조용했고 주변에는 넘실넘실하고 폭신폭신한 구름이 가득했다. 여러가지 각오했었지만 생각보다 자리잡고 앉아있는 건 별로 괴로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밝고 환한데다가 등따시고 배고플 일도 없는 것이다. 반평생은 끼고 살았지 싶은 장갑과 마이웨이청바지패션대신 푸대자루같은 흰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머리에 형광등 하나가 반짝반짝 매달려있는 대신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건 아쉽다면 좀 아쉬운 일이었지만.
푹신푹신한 구름만 끝없이 펼쳐져있는 곳은 -아마도 하늘이겠지- 외롭다면 외로운 곳이었다. 어쨌든간에 사람이라고는 자신 한 명 뿐이었던 것이다. 이 곳을 벗어나면 좀 더 여러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몇번인가 걸어가려다가 그만두었다. 기억 속에 계속 남아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도 곤란하다.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하물며 어쩌면 만나게 될 사람들은, 가능하면 뒤늦게 만나고 싶다는게 무르고 솔직한 본심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곳에서 자신의 이름은 어느 쪽일까. 록온 스트라토스? 닐 디란디? 구름 끝에 걸터앉아 묘하게 잔잔한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딱히 누군가 찾아올 기색도 없었던 것도 있어서, 그 어린애의 몽상같은 느긋한 사색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것같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와아아아앗! 당신이야?"
도대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생각도 못할 만큼 오랜만인지라 록온-혹은 닐-은 완전히 놀라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놀라서 저도 모르게 돌아본 곳에는 어느 틈에 찾아온 건지 연초록색 머리카락의 아이가 서 있었다. 1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반짝하게 치켜뜨고 있는 것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하여간 호기심 많아보이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이는 다시 높은 톤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당신이냐고 묻고 있잖아!"
"..넵?"
"그러니까, 록온 스트라토스! 그리고.. 그리고 라인디였던가? 니란디? 이름이 뭐더라?"
"어.. 닐 디란디."
"맞아, 그거!"
이것 참 굉장한 왕자님 근성이로세. 하도 당당한 아이의 태도에 록온은 처음보는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대답한 이름에 기세를 덧붙이듯이 눈 앞의 아이는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제서야 가까스로 정신 차린 록온은 지극 정당한 질문을 던졌다.
"시..실례지만 누구신지?"
"와아, 진짜 똑같이 생겼네- 기분나빠, 완전 쏙 빼닮았어. 어떻게 이렇게까지 닮는 거지? 기분 나빠-"
..그리고 그 질문은 한없이 자연스럽게 무시당했다. 초면인 상대에게 무슨 소리냐. 이쯤되니 천하의 록온도 슬슬 머리가 아파왔다.
"저기, 잠깐."
"아무런 조작도 안했는데 이렇게 닮을 수 있다니, 역시 인간은 이상하네. 그러고보니까 목소리까지 똑같아! 아하하하, 이상해-! -맞다, 그보다 당신이 리바이브를 죽였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이, 이봐!"
록온은 기어이 목소리 크기를 높였다. 신나서 재잘거리는 아이에 대한 당혹감도 있었지만 난데없는 살인누명이라니. 게다가 아이의 어조는 한없이 가벼웠다. 혹시 리바이브는 이 애가 키웠던 애완동물이나- 아니지, 게임의 캐릭터라거나 하는 걸까. 상대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놀란 모양인지 아이는 윽,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누르고 록온은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초면에 말이 심하잖아? 적당히 해둬."
"-뭐,뭐야, 인간주제에!"
"인간주제에라니,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잖아, 인간따위보다 뛰어난 존재야!"
"어이,아가씨? ..아니다, 도련님인가?"
"뭐야, 무례하게!!! 우리들의 계획을 엉망으로 해놓은 주제에! 나는 말야-!"
당황한 탓인지 반쯤 울 것같은 얼굴이 되었던 아가씨-도련님?-은 억지로 기세를 올리는 듯한 말투로 다시 파지직파지직 성을 냈다. 반응 안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록온은 성별에 갈피를 못잡은 채로 아이를 툭 건드렸다. 그 것이 또다시 역린을 자극했는지 아이는 파르르르 어깨를 떨었다. 이쯤되면 화낼 생각도 안들어서 록온은 팔을 괴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이 일국의 임금님이나 부릴 성싶은 고집에 불만, 거기에 재멋대로구는 태도. 절대 외동이겠구나,하고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화를 내는 아이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적당히 해둬, 힐링."
"리본즈!"
...외동인줄 알았는데.
"들어봐, 이 무례한 남자가!"
"그와 너는 초면이야."
"에? 하지만 나는-"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야. 그와 이 남자는 이어져있지 않으니까."
아이의 뒤에서 나타난 소년은 그 '힐링'과 꼭 닮아있었다. 힐링이라는 소녀-아무래도 여자인 모양이다-보다 살짝 키가 큰 소년은 록온을 보며 짐짓 상냥하게 웃었다. 어째 마주 웃어주기는 껄끄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어쨌든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살짝 목례한 소년은 다시 힐링을 향해 돌아섰다. 동생을 다독이는 오빠같은 태도였다.
"인간은 그래."
"..하지만 목소리까지 똑같은데?"
"그래도 달라."
"뭐야, 그럼.. 진짜 다른 사람이야?"
"그래."
"..이상해."
"어디가?"
"그치만.. 이상해. 둘인데 하나가 아니라니."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인간들에게는."
"그야 나도 리본즈가 원하지 않을 때는 리본즈와 이어지지 못하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리본즈와 같은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지만.. 정말로 조금도 이어져있지 않을 거야?"
"그래."
자신을 아예 제외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록온은 반쯤 관조하는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것도 있지만 오래도록 혼자 있었던지라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새삼스럽게 새로웠다. 형제다, 싶은 느낌이랄까.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던 록온은 문득 손끝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둘은 이어진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모르는 것을 의아해하고 있다. ..목소리도 얼굴도 같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알고 있다.
- 그런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록온은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힐링은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역시 인간은 이상하네. 정말로 리본즈가 이끌어주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좋았을 걸."
"그 결전에서 운명은 그를 택했어. 인류가 나아갈 길은 그들의 손으로 정하겠지. 내 계획을 벗어나서."
"분하지 않아, 리본즈?"
"글쎄, 어떨까."
"-이야기 중 실례지만 누군지 물어도 될까?"
록온의 눈매는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형형한 경계심에 가득 차 있는 시선에는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앉아있던 남자의 여유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저런 눈을 하는구나, 하고 힐링이 장난처럼 말했고 리본즈는 정중하게 웃었다. 닐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자들은 라일을 알고 있다.
리본즈는 정중하게 웃으며 인사처럼 팔을 가슴에 대었다.
"-인사가 늦었군, 나는 리본즈 알마크. ..네가 있었던 CB의 윗사람이자, 이오리아 슈헨베르그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던 자다."
"이오리아..의?"
"그런 셈이지."
"..그런데 여기 와있다는 건."
"그래, 난 계획에서 나왔어."
소년- 리본즈의 표정은 잔잔했다. 그는 그 사실을 제 3자라도 되는 양 평온한 어조로 논했다. 록온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라일을 알고 있는 소년이 죽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한 이런 소년은 CB의 계획에 없었다. 록온은 문득 트리니티 남매를 떠올렸다. 이 두 사람도 그 둘 처럼 백업요인인가. 그렇다면 CB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깨어나 달려들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계산을 거듭하고 있을 때, 힐링은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고는 쏘아붙였다.
"뭐야 리본즈, 멋 부릴 필요 없잖아- 져서 죽었습니다, 하면 되잖아?"
"다물어, 힐링."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록온이 멍한 얼굴을 한 순간에, 마냥 담담해보이던 리본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힐링은 재미있다는 듯 배를 쥐고 웃었다.
"꺄하하하하, 리본즈 바닥이 다 보여!"
"웃지말라고 했다."
"하지만 세츠나하고 싸워서 한방에 펑-! 이었는걸. 아쉬워, 리본즈만 살아있었으면 나도- 아 그래도 나는 힘들었으려나, 리본즈랑 동조 안하고 있었고."
"살아난다면 너도 꼭 살렸을 거야, 힐링."
"그치만 수백명씩 만들어지는 거 싫은데?"
"그건 디바인이나 브링은 불평 안할 타입이니까 한 거지."
"차라리 리제네로 하지, 보고 열이나 받으라고."
"제 아무리 인격이 없어도 그 얼굴로 자폭하라고 내보내면 틀림없이 우주 외곽으로 도망쳐서 지들끼리 군집만들고 놀 걸."
"하긴, 그 애 별나니까-"
"뭐 전부 굶어죽을 테니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민폐는 안되겠지만."
"우주 쓰레기도 민폐는 민폐야, 리본즈!"
세츠나? 익숙한 소년의 이름에 놀랄 틈새도 없이 두 사람은 다시 재멋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새 평온한 어조로 돌아온 리본즈와 생기발랄하게 떠드는 힐링을 보면서 록온은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록온은 이를 악물고 대화 사이에 개입했다.
"잠깐, 내가 알아듣게 설명좀 해봐. 세츠나라고 했지?"
"어, 신경 쓸 거 없어. 당신이랑은 전-!혀 관계 없는 걸. 솔레스탈 비잉은 지금도 유유작작하게 지상에 있으니까."
"..엄청 들어둬야할 필요성을 느끼는데?"
"아냐, 진-짜! 상관없어. 당신도 우리도 이제 상관없는 사람인 걸. 좀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요, 응."
"이 와중에 생산적은 무슨..!"
"것보다 당신 리제네 알아? 아아, 리제네랑 만나게 해주고 싶어! 그 애 엄청 당신 싫어했거든. 리바이브가 그 남자 싫어했던 것처럼. 뭐 미움받을만 하지, 티에리아는 어떻게 꼬셨어? 나도 상대해줄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린애가!;"
"뭐야, 나는 별로-"
록온은 기어이 페이스를 잃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동료를, 가족을 알고 있다. 짚어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말하면 말할 수록 휘말려들어가는 당혹스러운 느낌. 더럽게 익숙했다. 이 느낌, 비슷하다. 엄청나게. -그러니까 라일과 에이미가 팀먹고 폭주하던 그 때랑.
어떻게 다뤄야할지 갈피를 잃어가는 찰나, 제 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힐링! 리본즈! 뭐하는 짓이야!"
"어, 아뉴다."
"우리는 이 곳에 있으면 안되잖아요?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와이, 아뉴~"
힐링은 까르륵 웃음을 터트리며 당황한 얼굴로 달려온 여성에게 뛰어들었다. 어리광피우는 듯한 힐링을 다독여주면서도 아뉴는 난처한 기색으로 뭐라고 말을 이었다. 나는 부외자입니까. 록온은 한심스레 그 감동의 재회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두 사람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의 여성이었다. 그렇게 나이차이가 있을 것같은 얼굴이 아닌데도. 힐링에게 뭐라뭐라 말하던 여성은 좀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록온을 발견한 그녀의는 놀라움에 눈을 치켜떴다.
"...라일..!!"
"당신도 내 동생을 알고 있어?"
약간 씁쓸한 어조로 록온은 그렇게 물었다. 다시 경계 태세로 돌아간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아뉴는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녀의 한 팔에 매달린 힐링은 아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고.. 알고 있어요."
연보라빛 머리칼을 흔들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을 억누르는 그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틋함이 깃들여있었다.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잔뜩 날이 서 있던 기분이 어느 정도는 부드러워지는 것같았다. 울어버릴 것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이 사람은- 아마도 동생에게 있어 위협은 아니었겠지. 닐은 약간의 한숨과 걱정과- 염려를 담아 말했다.
"좀 묻고 싶은게 엄청 많은데 말이지.."
"그러실 것같아요. 저기.. 그런데 그 전에."
"응?"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그녀의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졌다. 입을 막은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록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발그스름해진 눈매로 활짝 웃고,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라일을 슬프게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 행복했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힐링은 아뉴의 의식의 파편을 민감하게 느꼈다. 한없이 인간적인 그 감정은 힐링에게는 그다지 익숙한 것이 아니러서, 힐링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닐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살짝 눈물이 맺힌 눈으로 웃는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몹시도 친근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앉아서 이야기 하는게 나을까?"
어느 틈엔가 경계심은 다소 풀려있었다. 앉을 식탁도 의자도 없는 대신 한없이 푹신푹신한 구름 위를 톡톡 두드리며, 록온은 살짝 지친 목소리로 웃어주었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훔쳐내고 웃는 소녀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가슴아팠다. 들을 것이 아주 많을 것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해야할 일도 생길지도 모른다.
어느새 '혼자'라는 느낌은 사라져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 최초의 방문자와 편히 앉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록온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fin.
그냥 사후 세계에서 록온과 이노베이터(정확히는 아뉴)가 만나는 게 보고 싶었습니다. 힐링은 아마 별로 변하지 않을 것같고, 록온은 무의식중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려고 하지 않을지도. 록온인 자신을 만들어버린 이상 가족들을 만날 자격이 없다는 느낌인가.. 아뉴는 닐에게 있어서는 제수씨(..) 일본에서는 그냥 여동생이 되나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