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언제부터일까. 이 지상의 중력이 괴롭지 않게 된 것은.
우주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영원히 바닥에 닿지 않을 것같은 유영을 반복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은 그런 물고기였다. 그리고 이 인간으로 가득찬 조그마한 장소는, 흡사 아이들이 건져올린 물고기를 아무렇게나 밀어넣은 좁은 웅덩이 속같았다. 발은 자유를 딛을 수 없다. 스치는 걸음에 인간의 소음이 묻어난다. 유려하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지상의 중력은 물고기의 꼬리 끝에 매달린 족쇄였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족쇄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로 나아갈 수 없는 이 자리의 무게에 안도한다. 사람들을 옮아매는 이 답답한 장소는 여전히 죽을만큼 싫었지만 자신의 의지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이 속박에 안도한다.
그렇게 숨막혀 죽을 듯한 공기 사이에서 떠올리는, 희미해진 소망이 하나.
이 곳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멀리까지 가버릴 수 없었을텐데.
---─────아마도 그 날 나의 신이 죽었다
언제부터인가 비오는 날에는 거리를 걷게 되었다.
그 것은 퍽이나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일이라,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이미 희미해졌다. 기억나는 것은, 그렇게 거리를 걷게 된 것이 평범하게 지상을 거닐 수 있게 된 이후부터였다는 것이었다.회색의 비로 물든 거리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없고, 조용해진 채 일정한 비의 음악만이 소음을 만들어내는 그 장소는, 흡사 먼 곳으로 이어져있을 것만 같았다.
피안으로 이어지는 길이야.
옅은 물안개가 낀 길을 걷던 사내가 죽은 부모님을 만났다지. 그 길이 저승으로 이어졌던 거야, 천만의 하나, 일억의 하나의 낮은 확률로. 남자는 부모님을 모시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아무리해도 부모님이 따라오질 않아서, 결국 울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나.
오래된 민화야.
그는 이름도 잊은 누군가가 모임에서 즐겁게 떠들었던 하찮은 옛 이야기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한 때 인류전체의 흐름을 예측했던 데이터베이스와 동조하던 머리는 그런 비 이성적인 것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단 한번도 그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사견을 비춘 적은 없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비의 길. 인기척이 없는 옅은 새벽의 길. 단지 그 것일 뿐이었다.
안경에 물방울이 그림자를 만들어, 티에리아는 그 것을 벗어 손에 들었다. 본디부터 그리 나쁜 시력은 아니었다. 유리의 장벽이 사라진 순간 한층 세계가 선명해졌다. 감흥없는 눈으로 그 세계를 관조하며 그는 천천히 비로 젖은 거리를 걸었다. 물론 어딘가로 이어질리는 없었다. 인간이 저 우주의 하늘로 도달한지도 오래인 시점에서, 그 것은 말도 안된다.
검은 우산이 살짝 눈 앞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 것을 밀어올리는 손길이 어딘가 기도하는 것과 닮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거두고 앞을 응시했다.
---──── 빗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
그 순간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은 우산이 손을 떠나 바닥을 굴렀다.
가볍게 들고 있던 안경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뒷모습이다. 목께를 따라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 짙은 회색의 양복에 감싸여있긴 했지만, 그 뒷모습이었다. 있을리 없는 사람이다. 그의 이성이 현실을 부정했으나 그 순간 티에리아는 기꺼이 자신의 이성을 무시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에, 발을 붙잡은 질척한 물의 감촉을 무시하며 달렸다.
젖은 소리가 볼쌍사납게 울려퍼졌다. 감사하게도 그의 모습은 멀어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은 듯이, 곧게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가던 그가 멈추어섰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재촉했다. 필사적이었다. 간신히 가까워진 순간에, 천천히 멈춰섰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그의 얼굴이다.
티에리아는 멈추어섰다. 곧게 편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희었고, 오렌지 색의 AI도 곁에 없었다. 언젠가 죽도록 후회하게 했던 그의 얼굴의 상처도 없었다. 티에리아는 비에 젖어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로..."
아마 평생, 두 번다시 부를 수 없을 것같았던 이름.
그러나 비 속에서 그를 응시하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신가요?"
...아.
..그 목소리마저도 같다. 그러나 티에리아는 말을 멈추었다. 남자는 의아한 시선을 담으며 빗속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온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도록 상냥한 녹색 눈동자는 그와 같아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 티끌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림자가 없었다.
-----────투둑 투둑
빗소리를 느끼면서 티에리아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는 게 느껴져 가만히 그 것을 떼어냈다. 전신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감각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자신을 조소했다. 감정에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실례했습니다."
"저기, 뭔가 사정이 있어보이는데-"
"아니요."
말을 건네려는 남자를 향해 티에리아는 듣지 않겠다는 듯 말을 끊었다.
"아는 사람과 착각했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평소의 그와 똑같이 냉정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감정을 지운 소년은 묵묵히 시선을 돌렸다. 당황한 듯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티에리아 쪽으로 내밀었다. 쏟아지던 비가 장막에 가로막힌 듯 잠시 멈추었다.
"..쓰고 가시지 않겠습니까?"
부드러운 음성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와 닮았다. 그와 똑같은 남자의 목소리는 그와 똑같이 상냥했다.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티에리아는 짧게 거부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싸늘한 그의 어조에 남자는 다시 말을 건네지 않은 채, 그저 우산을 받쳐들고 망설이듯 서 있었다. 호의에 감사를 표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인 티에리아는 다시 빗속으로 나왔다.
그리고 티에리아는 그를 꼭 닮은 남자의 얼굴을 한번 뒤돌아 보는 일 없이 걸어나갔다.
회색의 비.
회색의 거리.
----── 피안으로 이어지는 장소야
쓸모없는 옛 민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저 어쩌다 붙어버린 습관은 어쩌다 지울 수 없게끔 확고한 것으로 남아버렸다. 중력이 옭아매는 지상에서 검은 우산을 쓰고 인기척이 없는 거리를 걷는 것.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 습관은 자연스레 몸에 물들어버렸다. 간혹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그 산책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곤 했지만, 딱히 의미는 없었다. 젖은 비의 소리와 회색의 거리 너머로 무언가가 아른거릴 듯한 기분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따위는 별 일 아니었다. 설령 오늘같은 경우를 또다시 만난다 해도, 그 것에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만일 만난다면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두들겨패고 기절시켜서라도
이 세계로 그를 다시 끌어오겠다고.
덧없는 바램이다.
의미없는 소원이다.
도대체가 이루어질 리가 없다.
그와 닮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있어도, 그를 찾을 수는 없다. 우주너머로 사라진 사람이 이런, 지구의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을리 없다. 비과학적이고 의미 없는 미신이다. 수천년 전의 사람도 믿지 않았을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 그런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은 아무 것도 입에 담지 않는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도
회색 비의 거리를 조용히 걷는다.
fin.
그건 잃어버린 자를 향한 서툰 애도. 혹은 죽은 신을 향한 미사.
여전히 2기 시작전일 때의. 이 때만해도 경어체 라일의 꿈에 부풀어있었습니다. 믹신이 경어체를 쓰면 아주.. 가 아니라.. 쓴 것과 형태는 많이 달랐지만 2기에서 묘비 앞에서 한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나가는 티에리아가 좋았습니다. 결의한 남자의 뒷모습. 아쉬운 소리는 안해도 좋으니까 속으로만 품어주세요.
아 진짜.. 파면 팔 수록 티에리아는 남자다워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