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보고 있어?>
의식은 등 뒤에서 감아오는 손길과 어리광부리듯이 기대어온 뺨을 감지했다.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앞세웠던 자신이야 그렇다치고, 이노베이터로서 살아온 이 반쪽은 굳이 자신의 의식은 인간의 형태로 고정시켜놓는 법이 없었다. 고로 지금 이런 태도는 명백한 고의가 들어있다. 익숙해졌던 방식대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 티에리아는 의식을 움직여 달라붙어온 리제네를 떼어냈다.
<엇, 도망가는 거야? 치사하네.>
<..누가 도망갔다는 거냐!>
<지금 싹-하고 빠져나갔잖아. 쓱-하고.>
어린애가 흔히 그러는 것마냥 손짓발짓으로 움직이는 형태가 눈에 잡힐 듯이 보였다. 덤으로 천진한 척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도. 한 의식으로 녹아든지 몇 년, 뺀질뺀질대는 스킬만 도가 튼 줄 알았더니 이제는 모른척 신공도 쌓아놓고 있던 거냐. 스트레스가 폭발해 티에리아는 기어이 베다 전체가 흔들릴만한 대음성을 내질렀다.
<넌 좀 생산적인 방향으로 살아볼 생각은 없는 건가!>
<생산적으로 사는 방향은 너한테 다 가버린 것같아서, 난 그냥 슬슬 놀면서 있으려구.>
<네가 필요이상 일하지 않는 것뿐이다, 리제네 레제타!!! 죽어야 정신을 차릴 생각인가!!>
<신체는 벌써 죽었는데?>
<그럼 정신까지 싸그리 포맷해버려라!!!>
<으와~ 같이 지워져줄 거야?>
<내가 미쳤나!!>
티에리아는 버럭 성질을 냈다. 그 바람에 티에리아와 감응하고 있는 리제네의 의식이 세차게 튕겨나갔지만 리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유유히 돌아왔다. 냉정하게 말하면 전기신호의 이동과 별로 다르지 않을 움직임인데도 그 모양새가 흡사 미적미적 기어오는 미꾸라지며 능구렁이를 떠올리게 해 티에리아는 치를 떨었다. 유유히 자리 잡고 앉은-티에리아의 의식 속에 아빠다리를 하고 발목을 잡은 채 느긋하게 뒹굴거리는 리제네의 모습이 전송되었다-리제네는 천연덕스레 말했다.
<네가 너무 지나치게 일하는 거라니까, 티에리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가 지나치게 노는 거다!>
<하지만 말이야, 어차피 네 의식은 그들보다 오래 살텐데?>
<...!>
산처럼 부풀어올랐던 티에리아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리제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지상을 향한 그의 의식이 솜씨 좋게 움직여,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의 의식을 잡아냈다. 익숙한 몇개의 형태가 시야에 잡혔다. 알렐루야와 할렐루야, 세츠나와 라일, 스메라기와 펠트. 밀레이나와 이안. 리제네는 담담하게 그들을 스치며 티에리아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수명은 잘해야 백 년이 안돼. 베다는 이미 삼백년 이상전부터 존재했었고. >
<..알고 있어.>
<정말로?>
잦아든 티에리아의 의식을 마주하고, 리제네는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노베이터의 육체를 가진 채였다면 육체가 손상되는 순간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베다에 동조한 상태여서야, 무리지. 응. 실제로 너나 나나 여기에 있고.>
<..>
<난 별로 상관없어. 난 너처럼 인간을 익애하지는 않거든. 세상의 변혁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해. 처음부터 그게 목표였고.>
뭐, 리본즈가 하도 잘난척해서 띠꺼운 건 있었지만-하고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덧붙이고, 리제네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티에리아를 쏘아보았다. 티에리아는 애써 그 의식을 되받았지만 개방되어있는 의식의 공유 속에서 자신의 동요를 숨기지도 못했다. 그 동요를 감지했을 게 뻔하면서도, 리제네는 굳이 되물었다.
<너는 어때?>
<..나는.>
<티에리아. 넌 인간을 너무 아껴. 버티기 힘들다? 너보다 먼저 사라질 것들을 아껴봤자 허무해질 뿐이라구.>
<....그렇지 않아.>
<거짓말.>
<나는..나는..>
티에리아의 목소리가 꺼질 듯 잦아들었다. 에구에구, 너무 몰아붙였나. 좀 자기자신이 한심해져서 리제네는 티에리아의 의식 속에 섞여들어갔다. 의기소침해져있는 동류를 달래주려 팔을 뻗어 토닥토닥 두드려주는데, 돌연 냉랭한 목소리가 몰아쳤다.
<-라고 할 거라 생각했나?>
<에?>
<그걸로 네 태만함은 설명이 안돼, 죽어 마땅하다, 리제네 레제타!!!>
<에에에-?!>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거센 반응에 리제네의 의식은 베다 한구석 저멀리로 날아갔다. 추풍낙엽마냥 중점을 잡지 못하고 뱅글뱅글 도는 리제네를 오만하게 쏘아봐주고, 티에리아는 매섭게 쪼아댔다.
<인간적이든 이노베이터적이든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했나! 이오리아가 인간의 변혁을 지켜보는 존재로서 너를 만들었다면 그 일을 하란 말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허구헌날 가십 매체의 전파나 뒤쫓고 유치한 프로만 보는 주제에 뭐가 인간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 운운이냐! 그냥 재밌는 것만 하겠다는 헛소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거잖아!!!>
<으아아아.. 아,알고 있었어?>
<의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제 쪽에서 말해놓고 그런 소리냐!>
크르르릉. 금방이라도 해킹을 시도할 것같은 티에리아의 성난 기세에 굴러갔다 돌아온 리제네는 삐질삐질 몸을 뒤로 뺐다. 어쨌든 닿지 않는 쪽이 좋아보인다. 성난 파도마냥 화냈던 티에리아의 의식이 아직도 형형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조금 지나서야, 그는 눈치보는 반신을 향해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그리고 별로 인간을 아끼는 건 아니다.>
<에,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난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눈치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새어나간 말에, 티에리아라는 한없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식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도 한 참 늦게 그 말을 이해한 리제네는 경악으로 눈을 치켜떴다.
<엑, 거짓말-!>
<싸우자는 거냐!!>
<하지만 너 지금 상태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헤에- 인간은 싱크같은 거 못합니다? 의식만으로 살아있지도 않습니다? 굉장하다, 착각도 이정도면 신급이야 신급.>
<불만있나!!>
티에리아가 빽 소리쳤다. 그 기세에 리제네는 다시 몸을 낮추었다. 티에리아는 아무래도 칼슘을 섭취할 필요가 있다니까. 아, 이 상태에서는 무리인가. 톨레미 크루를 족쳐서 새로운 정보라도 달라고 할까. 궁시렁거리는 리제네를 티에리아가 한번 띠껍게 쏘아보았다. 다소는 차분해진-그러나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티에리아는 말을 이었다.
<별로 사람이라는 게 정의 안에 들어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는 록온에게서, 동료들에게서 인간다움을 배웠다. 그리고 그걸 잊어버릴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다.>
<그건 또 엄청 무지막지하고 뒤끝없는 발언이네..>
<무모해서 미안하군.>
그 이상 지껄이면 죽여버리겠다라는 기운이 팍팍 풍겨오는 목소리에 리제네는 너털 웃었다. 동조된 동류의 의식은 분명 조금은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잘도 인간다운 소리를 내뱉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리제네는 팔짱을 끼는 시늉을 했다. 몸이야 없지만 의식은 그 때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리제네는 티에리아에게 말했다.
<뭐 괜찮아, 나는 그런 네가 좋은 거니까.>
<...>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계속 너와 함께 있을 건데.>
<함께 있는게 방구석을 굴러다니는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지.>
<냉정해라~ 세포 분열할 때 네가 내 성실성을 다 가져간 거라니까.>
<그럼 지금 당장 절반을 가져가라!! 당장!>
또다시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는 반쪽의 의식을 살풋 무시하고, 리제네는 이번에야 말로 어리광 부리듯이 티에리아에게 달라붙었다. 오래도록 헤어져있었다. 가끔 네 기척을 느낄 때마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목에 매달린 손을 떼어내려 티에리아가 길길히 날뛰었지만 리제네는 꿋꿋하게 달라붙어 뺨을 부볐다. 죽어마땅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반신은 시끄럽고, 사랑스럽고,
인간적이었다.
fin.
30. 此処にいたい (여기 있고 싶어) / 焼け野が原
밀레이나는 가끔 도시락을 싸서 베다에 찾아옵니다. 티에리아에게 재잘거리면서 주변의 일을 보고해줍니다. 다 알지만 티에리아는 차분하게 들어줍니다. 리제네가 가끔 츳코미를 겁니다. 티에리아는 날뜁니다. 세츠나는 가끔 베다에 싱크합니다. 리제네가 장난을 칩니다. 티에리아는 넌 닥치고 있으라고 날뜁니다. 리제네가 죽은 자신의 몸에서 채취한 세포를 기반으로 외출용 의체를 만듭니다. 장난삼아 티에리아와 같은 외관을 만듭니다. CB에 찾아갑니다. 라일을 덮치려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튑니다. 티에리아가 세츠나의 보고를 받습니다. 열받아서 외출용 의체 2호에 의식을 싣고 찾아가 리제네를 곤죽으로 때려눕힙니다. (일단 패는 감각이 있는 몸이 좋긴 하군, 하고 냉정하게 생각합니다) 벙쪄서 보고 있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고 딱딱하게 사과하는데 밀레이나가 티에리아에게 달려들면서 별안간 <오랜만이야 티에리아, 돌아온 걸 환영해> 파티가 개최됩니다. 당황하면서도 웃으며 어울립니다. 어느 틈에 머리스타일을 자신의 것으로 바꾼(아마도 톨레미의 개조실에서 특수 메이크업으로) 리제네도 곰실곰실 끼어 어울립니다.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잠듭니다.
티에리아의 상태를 생각하면 의체를 만들어도 이 얘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베다에 동조되어있으니까 (봉신연의에서 태상노군이 양의 입을 빌려 제 의식을 말한 것처럼) 인간 속에 녹아들기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뭐 리본즈의 링크를 끊어냈던 것처럼 리제네가 장악하고 이 애를 인간으로 보내주는 루트도 있겠지만 그건 일단 치워두고요. 둘이 같이 있는 것도 좋겠구나 싶습니다. 25화에서 베다가 부서지지만 않으면 웃을 수 있을 것같아요. 여러가지로. 최종화 이후에 쓸까 했지만 마음이 벅차서 일단 두드립니다. 저는 티에리아가 티에리아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좋아합니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