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할 말 없어?"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 거지?"
"..됐어, 질렸다- 별로 예상했던 것보다는 대단하지 않네. '아버지'는."
"뭐, 그런 법인가보군."
붉은 머리의 소녀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외관이었지만 네나는 자신이 입에 담은 호칭에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소녀를 보고 있었다. 상냥해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그 시선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소년을 바라보던 소녀의 입가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하고싶은 말이 아주 많은데 막상 얼굴보니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난 처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없었는데."
"여자아이에게는 차갑게 대하는 게 기본 룰이기라도 한 거야?"
"별로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너에게는 신경쓸만한 가치가 없거든."
리본즈는 평온한 목소리로 네나 트리니티에게 지적해주었다. 한순간 네나의 얼굴에 희미한 떨림이 스쳐지나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네나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천진하고 잔혹한 아이의 얼굴. 그녀는 짐짓 꾸며낸 것같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래하는 듯한 어조였다.
"밉살맞기는. 오빠들이랑은 전혀 안닮았어. 얼굴도 성격도."
"당연하잖아? 너희들은 디자인 베이비야. 굳이 나를 닮게 만들 필요는 없어."
"매정하구나. 이래뵈도 당신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들인데."
"실험의 결과물에 연연할 연구자가 어디있지? 뭐, 이노베이터와 인간의 교배종이라는 건 좀 흥미있는 요소였어."
사뭇 차가운 친절을 담아 리본즈는 웃으며 말해주었다. 네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말의 칼날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츠리는 네나를 리본즈는 즐거운 듯 응시했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공기 중에서 깊게 숨을 들이쉰 소녀의 가슴이 들썩였다. 온몸으로 외치려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그랬기에 그녀의 입술끝에서 미끄러져내려온 목소리는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그걸로 끝이야?"
"폐기처분된 물건에 흥미를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어."
"..헛소리하지마. 난 아직 살아있어."
"네 역할은 끝났어. 넌 어쩌다가 덜 치운 쓰레기에 불과해."
"닥쳐!"
유리조각이 깨져나가듯이 일순간 억눌렀던 네나의 격정이 다시 폭발했다. 새빨간 의식의 파편이 자신에게까지 날아오는 것을 느끼며 리본즈는 하위종을 내려볼 때 언제나 그래왔듯이, 다정하게 그녀를 비웃었다.
"그런 부분은 정말 인간답군. 알레한드로 코너는 꽤 거창한 꿈을 꿨던 모양이지만 그런 점에서는 인혁련의 인체실험에서 그다지 발전한 것도 없었던 모양이야."
"...!!"
"착각하고 있는 것같으니까 다시 말해주지. 넌 실험체에 지나지 않아. 그 실험은 이미 끝났고. 내가 뭔가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
"..바라지도 않아. 리본즈. 애초부터 난 이미 당신의 일부따위가 아니야. 네나 트리니티야."
"널 내 일부라고 생각할만큼 기꺼워한 적은 없어."
"그거 고맙네."
"천만에. 쓰레기를 신경쓰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한마디만 할게."
자신에게서 채집되어 만들어진 실험체는 자극하는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어린 소녀의 얼굴에 독한 증오의 미소를 지었다. 흐려짐하나 없이 새빨간 분노 속에는 자기자신에 대한 긍지와, 지독하게 끈적거리는 집착과,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네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리본즈에게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네나는 물어뜯을 것같은 시선으로 리본즈를 쏘아보았다. 씹어뱉듯 내뱉는 목소리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난 살아남을 거야. 죽어도 살아남아보이고 말겠어, 나를 깔본 것들을, 오빠들을 죽인 놈들을, 전부 쥐어터트린 후에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비웃어줄 때까지 죽지 않을 거야. 진흙탕 속을 기게 하고, 쓰레기장에 버려져도 살아남을 거야. 복수할 때까지 살아남을 거라구."
금빛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저주로 가득차 있었다. 의식 속에는 다른 잇속을 재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애초부터 이 아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인간의 도덕도 윤리도 입력되지 않았다. 그 머리 속에는 추구하는 것을 쫓는 욕망만이 아이의 그것처럼 잔혹하고 천진하게 살아있었다. 어리석게도. 리본즈는 말을 섞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명백하게 비웃고 있는 리본즈를 향해 네나는 똑같이 잔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 거기서 웃고 있어, 난 반드시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될 거니까."
그 때가 되면 당신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금속성의 싸늘한 울림은 소리가 아닌 의식으로 전해왔다. 리본즈는 흥미롭게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감추는 것도 재대로 못하는 계집애의 날 선 분노는 추악하고 생생했다. 리본즈는 대꾸하지 않고 떠나는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자기애에 가득 찬 인간 소녀는 곧 바깥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혼자 남은 리본즈는 천천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그는 오만하게 눈을 감았다.
..복수라, 흥미로운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리본즈는 바깥에서 걸어들어오는 다른 의식을 기분 좋게 감지했다. 하나가 떠나고, 하나가 들어온다. 둘다 똑같은 인간 여자다. 비슷한 연령대에 비슷한 전장에 서 있는 자들. 비웃어주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리본즈는 천천히 다가오는 의식을 쫓았다. 이내 그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네나 트리니티가 떠나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어서와, 루이스 할레비 양."
주춤거리며 다가온 그녀의 눈빛은 텅 비어있었다. 네나 트리니티, 너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그는 밀려오는 즐거운 기분을 애써 감추었다. 루이스는 조용히 그를 보고 있었다. 모든 빛깔이 바래버린 황폐한 여자. 그녀도 속에 품고 있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너는 네게도 저주가 따라붙어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네나 트리니티. 어디 자유롭게 놀아봐. 떠나간 네나의 강한 감정과 가라앉아있는 그녀의 미약한 의식을 대비하며, 리본즈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우월감과 비웃음 속에서 리본즈는 떠나간 여자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 복수가 부디 달콤한 것이 되기를.
너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fin.
트리니티 남매 태생의 비밀을 알고 끄적였습니다. 인간과 섞인 자기 세포에 용서 없을 것같은 리본즈. 하지만 네나랑 리본즈는 꽤 닮은 것같아요, 그, 오만함이나 뒤도 안돌아보는 나쁜 버릇같은게. 으앙 아빠노릇하는 리본즈 보고 싶다..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