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 스물 일곱. 하이스쿨에 다닐 때부터 자취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만큼 생활능력도 있었고, 소탈한 편이라 딱히 돈드는 취미도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좋은 기업에 다니고 모자랄 것없는 수입을 버는 만큼 저축도 해마다 차곡차곡 쌓였다. 그 패턴에 익숙해진 소시민으로서는 늘어가는 통장의 금액이 괜시리 즐겁기도 했다.
..'저 것'만 아니었더라도.
저녁 11시, 야근 대신 들고 온 업무들을 컴퓨터로 처리하다 말고 괜시리 머리가 아파져 라일 디란디는 이유도 없이 차고쪽을 노려보았다. 꽉 잠겨있는 그 곳에는 소식도 없던 사람이 어느 날 대뜸 보내온 자동차 한 대가 얌전히 놓여있을 터였다. 란치아 랠리 037. 이름도 생소한 차를 마주하고, 보내온 인간의 이름을 한번 더 확인하고, 이 밑도 끝도 없는 인간이 외지에 나가서 대체 무슨 취미를 갖고 뭔 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 처음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약 3주 후에 분노어린 저주로 바뀌었다.
처음 살고 있던 원룸 아파트는 독신 남성이 살기에는 딱 좋은 크기였지만 지하주차장은 면적이 좁았다. 애초에 소탈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놔두기에는 무리있는 차종이었던 모양인지, 처음 이틀간 지하의 왜소한 잠금장치는 세번 박살났고 란치아는 두번 도난 위기에 처했다. 임시로 맡겨둔 보관센터에 막대한 청구서를 작성하기를 3주. 어쩔 도리가 없어서 결국 이사했다. 다행히 회사 관련으로 신세졌던 리처드슨 씨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는 분이었고 차고 딸린 교외의 좋은 저택을 여러 군데나 물색해주었다.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싼 곳을 찾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꿋꿋히 모아온 저금도 다 날리고 빚쟁이가 되었을 것이다.
소시민의 소심한 행복을 앗아간 원망을 담아 차고를 노려보다 말고 라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가 커피메이커를 작동시켰다. 하필 그 곁에는 얌전하게 접힌 봉투가 하나 놓여있었다. 이제는 화낼 생각도 안들어 라일은 봉투를 열었다. 이미 확인했지만 다시 봐도 싫은 금액이었다. 어째서 20대 독신 청년이 이런 세금을 청구받아야하는 거냐. 이도저도 죄다 저 란치아 탓이다. 화석연료규제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23세기에 석유로 달리는 구닥다리 자동차의 레플리카는 어마어마한 세금도둑이었다. 쌍둥이 형의 못된 취향을 어쩌다 동생인 자신이 덤태기 써야하는지 분노한 것도 여러번이었지만 차마 내다버릴 수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세금을 물었다. 내일도 세금청구서를 내러나가야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닐 디란디..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진짜."
눈이 튀어나올 것같은 자리 수의 세금 청구서를 내려놓으며 라일은 툴툴거렸다. 커피 메이커에서 막 내려온 원두 커피가 좋은 향기를 냈다. 따끈따끈해진 머그잔을 두 손으로 붙잡고, 생각도 없이 식탁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다가 문득 그 인간의 이름을 부른 건 진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자랐을까. 기억에 남아있는 그의 얼굴은 아주 어렸을 때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기껏해야 열 네살. 열 다섯살.. 10년도 훨씬 전이다. 문득 그 사건을 겪었을 나이 수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다 무너진 것같았던 열 넷. 거기에 십 몇년을 더해봤댔자 자신은 그다지 자라지 못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인간은 나보다는 더 어른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늘 어른스러웠던 형이었으니까. 문득 청승맞아져서 라일은 식탁에 엎드리다시피 해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이래서 그 인간 생각은 안하려고 했는데. 투정부리는 애같은 심정이 되어 라일은 손끝으로 청구서 봉투를 건드렸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
"진짜, 괜히 쓸데없는 짓해서..."
그 사람이 뭔가를 보내온 건 처음이었다. 관심도 없던 자동차는 상상 이외로 비싼 물건이었는지 이래저래 처치곤란이어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사했다. 돈 먹는 벌레같은 자동차였지만 반쯤 오기로 갖고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싼 세금을 물어가면서 휘발유를 넣고 몰고 다녔다. ..그도 그럴 게.
[차고가 있긴 하지만 그 집은 혼자 살기에는 좀 넓을 텐데, 괜찮은가?]
집을 사겠다고 연락했을 때 성격좋은 리처드슨씨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자기 딸이랑 결혼할 생각 없냐고 만면의 미소로 물어왔던 예전 일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신중한 표정이던 그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어 그냥 웃으면서 제일 튼튼한 집으로 고른 거라고 얼버무렸다.
확실히 궁상맞은 독신남이 혼자 살기에 3LDK의 교외 주택은 좀 심하게 호화로웠다. 당연히 가재도구도 한참 부족해서 구색도 맞출 겸 이것저것 새로 사야했다. 덕분에 통장의 금액은 팍팍 줄어갔지만 원망과 투정을 담아 그 사람이 보냈던 돈을 마구 써줬다. 좀 더 큰 쇼파라든가, 거실의 tv라든가, ..여분의 옷이라든가, 컵세트같은 것도. 그러고도 방은 한참 남아서 한 방은 침실로 쓰고, 한 방은 서재로 쓰기로 했다. 다른 한 방은 딱히 쓸 용도가 생각나지 않아서 손님용 방으로 쓸 겸 침대를 들여놓았다. 손님맞이용이라면서 옷장같은 걸 들여놓는 건 좀 망설였지만 마침 사들인 옷들도 걸어둘 겸 좋다 싶었다.
"괜히 궁상맞아지잖아.."
툭 중얼거리고 라일은 머그컵을 저만큼 밀어놓았다. 턱을 괴다가 문득 그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체격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헤어진 건 둘 다 아직 한참 자랄 시기였다. 하지만 기묘한 확신같은 것도 있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나와 달라질리 없다는 확신이. '라일 디란디'에 +a를 더한 것. 그게 언제나 그 사람의, 닐의 위치였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서는 그만 할 말이 없어져서 라일은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저 구닥다리 자동차를 보내온 것에 큰 의미는 없으리라 스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기대할 생각도 걱정할 생각도 없다고 정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그러니까 별로 의미가 있어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혼자 살기에는 좀 큰 집에 여분의 침대와 여분의 식기와, 여분의 옷. ..별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통장에 쌓이던 금액 이외에 그 사람한테 무엇을 받은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대학 졸업 이후에 그가 보내오는 돈에 손을 댄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혹시, 그 사람이.
아마도 의미없는 생각이라 것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은 이내 부정해버렸다. 그 후에 품은 바램도 그다지 실현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십 여년간 연락도 주지 않았던 인간이다. 이제와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저 차가 와버려서.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래서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의미없는 기대를, 잊고 싶은 불안감을 애써 잠재워버렸다.
식탁 위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이 놓여있었다. 찬장 속에는 같은 디자인의 머그잔이 하나 더 들어있었다.
한번도 쓰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해둔, 똑같은 컵이었다.
fin.
고백합니다, 저는 궁상맞은(어린애같은) 라일이 좋습니다.
아마도 그 차를 받았을 때 직감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닐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