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어느 별에서는 남녀가 짝을 지어 살고, 거기에 서로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협약까지 맺고 사는 모양이다.
언젠가 친구들에게 얼핏 들은 이야기를 하자, 그들의 반응은 자신이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폭소. 호기심. 신기해하는 목소리. 한창 이야기도 물이 오르고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별의 풍습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그거, 진짜로 다들 지키고 사는 거야?'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물어온 건 버독이었다.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그렇지만도 않은 것같아, 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럼 그렇지, 하고 수긍했다. 거기에 그 ‘배신하지 않는다’이라는 것이 상대방 이외의 이성과는 몸을 섞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부연설명을 해주자 이번에야말로 정말 이상하다는 듯 친구들은 대폭소를 터트렸다. 상대를 위해 다른 이성을 찾지 않겠다니, 어쩌면 그렇게 나약해빠진 약속인 걸까. 한 사람하고만 잠자리를 갖는다면, 그 것이 증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어쩌면, 그렇게.
79번째의 원정은 제법 멀었다. 행성계 전체에 걸친 정복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능력이야 어쨌건 간에 무척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지겹지는 않았다. 싸움이 길어지면 이미 이성은 사라진다. 몰이쳐오는 것은 순수한 분노. 돌려주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적의.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남자의 그 것보다 훨씬 예리하게 상대를 찢어발긴다. 손끝에서 찢겨나가는 무수한 붉은 빛과 진득한 피냄새와 녹아내릴 듯한 살과 살이 맞닿는 쾌감. 그것은 짐승의 사냥이다. 죽은 시체를 쌓아올리고 몸을 움직이며 들떠 날뛰는 피냄새를 즐겼다. 팔을 찢어놓고 목을 자르는 동안 붉은 피가 미친 듯한 궤도를 그렸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자신의 몸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에 환희를 느꼈다.
대인원이 동원된 이번 원정은 원거리였던만큼 대인전용의 큰 시설이었고 식사도 목욕도 가능한 구조였다. 소형의 이동전용 우주선이건 뭐건 상관은 없지만 피가 말라 굳어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귀찮다. 때문에 일찌감치 몸을 씻으러 향했다. 전투복을 벗고 스카우터도 던져버린 채로 뜨거운 물을 즐긴 후에 타월 하나를 몸에 감고 대충 걸어나왔다. 나른한 기분으로 방을 향해 걸어가는데,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친구와 마주쳤다.
"야아, 셸파."
"버독. 씻었어?"
가볍게 물어보긴 했지만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피칠갑을 한 옷부터 여기저기 상채기가 남은 얼굴까지. 흉폭하게 싸우는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자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했다.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를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문득 목에 난 상처에 시선이 갔다. 부상자가 생길만한 싸움은 아니었는데도 그의 목덜미에는 살점이 도려져나간 흔적이 있었다. 붉은 피가 엉겨붙어있는 상처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아는 한, 그는 이런 상처를 입을 남자가 아니다. 그런데. 시선을 의식한 듯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투에서 입은 건 아니야."
"천하의 네가?"
"물어뜯겼어."
그렇게만 말하고 그는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살점이 떨어져나간 붉은 자국이 아찔하게 움직이는 데에 시선이 팔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듣고보면 그렇기도 했다. 짐승의 이빨자국같은 유약한 것보다는 훨씬 작고, 거칠고, 예리한. 날이 선 듯 너덜너덜해져있는 살갗이 거친 공격을 실감케했다. 그렇다고는해도 너무 작다. 답을 내놓으라고 노려보자, 그는 싱겁게 대답했다.
"그래, 애한테 물렸다."
"그걸 가만히 놔뒀어?"
납득은 가면서도 어이없는 답변이었다. 사이어인의 어린아이들은 본성을 숨기지 못한다. 다른 혹성으로 보내지지 않은 아이들의 대다수는 감금되거나 최소한 싸울 수 있는 환경으로 보내지곤 했다. 어른들에 비해서 한참 약하기는 해도 이성이 없는 공격은 귀찮았다. 공격성을 생각하면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버독은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어린아이를 받아줄 만한 인간도 아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툴툴대며 어깨를 쳤다.
"그렇게 빤히 보지마, 상위 클래스였다고."
"그래서 당하셨다?"
"왕자인데 어쩌라구."
여전히 불만어린 목소리라 한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기가 찬 한숨이 입에서 빠져나왔다. 베지터. 그건 아마도 차기 혹성의 주인이 될 자의 이름이었다. 순수혈통이 낳은 사이어인의 정수. 하위계급이기는 해도 위쪽에 자주 갈 일이 있었던 버독이 그와 마주쳤다는 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존심 높은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을 인식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하위 계급에 비해 이성이 완성되어있는 상위, 그 것도 초고급의 전사 클래스가 이런 공격을 했다니. 그 것도 전투 중에?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아무리 너라도 정도가 있어."
"싸우지는 않았어. 이게 다야."
"하아? 그걸로 끝났다구?"
"그게.. 묻지마, 설명하기 귀찮아."
"별로 캐물을 생각은 없어. 그보다 이거."
뭔가 말을 생각하려는 듯 궁시렁대던 그가 이내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캐물어볼 마음도 나지 않고 해서, 몸에 둘렀던 수건을 풀어서 건네주었다.
"그걸로 상처라도 누르고 씻어."
"아, 땡큐."
우물거리며 감사의 말을 하고 그는 수건을 받아들었다. 욕실쪽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는 얼굴을 한번 찌푸리고 돌아섰다.
"셸파."
"응?"
"입을 옷은 없어?"
"방에 있을 거야."
"그럼 이거 그냥 갖고 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주제에 그는 마음에 안든다는 얼굴로 수건을 돌려주었다. 무슨 짓이냐 싶어 기가 찼다.
"뭐, 굳이 가릴 필요 있어?"
"아니, 그건 니 자유긴 하지만.. 어쨌거나 맨몸으로 다니지는 마."
"수건 한 장이 갑옷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누가 치근덕대거나 공격을 가하면 그걸로."
씨익 웃고, 그는 두 손을 들어 목에 뭔가를 두르는 시늉을 했다. 응? 얼굴을 올려다보자, 성격나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목 졸라버리라고."
"...설마 꼬마한테 목 뜯긴 사람이 하루에 둘이나 나오겠어?"
"남이사."
멋지게 말한 보람도 없이 뭉개져버리자 그는 다시 어린애같은 얼굴이 되었다. 별로 가릴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일단은 호의고 하니, 싶어 수건을 몸에 비끄러맸다. 이제 진짜 방으로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가 문득 떠올라서 그를 불렀다.
"아, 버독."
"응?"
"이따 하지 않을래?"
담담한 어조에 그가 좀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뭐냐, 발정했냐?"
"낮에 너무 신이 났거든."
"알았어, 저녁에 갈게."
선뜻 말하고 그는 손을 흔들었다. 응, 하고 손을 흔들어주고 복도를 빠져나와 방으로 걸어갔다. 손을 꾹 쥐어보았다. 목욕하는 동안에도 손톱 밑에 빠지지 않고 남아있던 붉은 색조가 한층 진하게 돌았다. 손끝에서 찢겨져나가는 살. 근육. 피. 죽음. 환희.
살육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섹스와 닮아있다. 거칠게 정복하고, 부수고, 밀려들어오는 감각. 사이어인의 성인식은 이른 편이었고, 성관계는 그보다 더 이르다. 전투 이후의 고양되는 감각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어 가장 직접적이고 안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임기같은 귀찮은 것을 피하기 위해 2차 성징 직후 난소를 적출하는 사이어인의 여자들이 임신할 리도 없어서, 살육의 환희 이후로 이어지는 육체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자신이 처음으로 덮쳤던 남자도 버독이었다. 기억에 선명한 첫 전투 후였다. 머리에 피가 빠지지 않아 반쯤 미쳐있는 상태에서 정신없이 덮친 것이 하필 버독이었다. 다행히 심각한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었지만. 이래저래 얽히는 게 많은 친구와의 추억을 생각하니 새삼 웃음이 나와, 미끄러지려던 수건을 단단히 동여맸다.
버독이 찾아온 것은 약속대로 저녁 시간이었다. 태도는 얌전했지만 들여다본 눈동자 깊숙한 곳에 격앙되어있는 감정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너도 어차피 나와 같지 않느냐며 장난스레 비웃어주었던 것도 같다. 수순을 나누는 듯한 기분으로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동료들에 비해서 약간 더 차고 단단한 그의 근육은 하나하나가 기분이 좋았다. 손끝으로 쓰다듬을 때마다 이대로 손톱을 찔러 박아 갈라보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몸이었다. 사이어인의 야성에서 생겨난 잘 짜여진 몸. 뼈를 발라내고 그 밑에 흐르는 격정을 들이마시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제물. 격앙된 기분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매달리듯이 몸을 맡겼다. 가슴을 더듬는 손이 서늘한 그의 온도와 다르게 열을 품고 있었다.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다리를 벌리고 그를 내부에 받아들이고,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고 숨을 내뱉고. 땀에 젖어 신음하는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좋았다. 손톱으로 파고 누른 등을 이대로 으깨버리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버독. 내 사랑하는 벗.
나는 당신이 좋아.
사이어인의 본능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다. 몸을 잇는 것보다도 이 남자와 피를 섞어보고 싶었다. 뼈가 부러지고 피를 쏟는 남자의 얼굴을 짓누르고 그 얼굴을 바라보며 입맞추고 싶었다. 이 남자는 강하고 아름답다. 몸도 정신도 영혼도. 한가지만을 바라보는 사이어인의 정신이 그 안에는 살아있었다.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자신의 야성이 깨어나게 만든다. 육체적인 접촉으로는 결코 그를 다 잡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추구하는 강함을 마주보며, 그와 서로 물어뜯고 싶었다. 싸움을 벌이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열기를 서로 주고 받을 수 있게끔.
무리한 바램이다.
상냥한 친우에게, 순수한 강인함밖에 머리 속에 없는 친우에게 자신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되지 못한다. 알아. 너는 결국 몸을 섞은 여자같은 건 네 길 앞에서 놓아버릴 거야.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당신의 야성을 채우러 갈 거야.
버독. 나는 당신만큼 순수하지 못해. 스며나온 감정은 애닮은 연모같기도 하고 질척한 질투 같기도 했다. 그 기척을 눈치챘는지 버독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던져왔다. 고개를 한번 젓고, 그를 끌어당겨 자신의 내부를 채웠다. 몸을 겹쳐온 그의 품에 매달려 엉겨붙은 피가 얼기설기 가린 목덜미의 상처 위에 이를 세웠다. 찢겨진 살갗을 혀로 파헤쳐 핥아올리자 그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입 속에 도는 짭짤한 피 맛에 까륵 웃음을 터츠리고 몸 안을 잠식하는 이 남자의 육체를 받아들이며 질투도 괴로움도 살의도 잊었다. 등을 달리는 환희에 휠쓸려 짐승같은 환성을 내질렀다.
잠든 그를 침대 위에 내버려두고 복도로 나간 것은 한번 더 씻고 싶어서였다. 그가 사정한 정액은 한동안 품고 있어도 될만큼 기분좋은 감각이었지만 일찍 긁어내는 편이 뒤처리든 뭐든 편했다. 어차피 땀에 젖어 끈적한 몸을 하고 자는 것도 싫었다. 목욕하러 가는데에 단단히 입는 것도 우스워 곁에 놓여있던 바스로브를 집어 몸에 감았다. 원정에는 사치스러운 물건이다. 선내에는 보통 비치해두지 않을텐데. 이 대선함은 아무래도 이것저것 갖춰놓은 모양이었다.
‘고위 계급이 있다고 했지, 그러고보면’
직접 출진한 어린 왕자를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변방의 전투에 따라온 것일까.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풍족한 보급을 받긴 했지만. 남을 위해 준비해준 것에 빌붙는 셈인가. 가볍게 혀를 찼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밖은 아무도 없었다. 전사들이 움직일만한 시간은 아니다. 복도를 걸어나가자 아까 전 버독과 마주쳤던 욕실이 보였다. 어서 씻자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작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주춤하는 사이, 그 쪽에서부터 입을 열었다.
"네가 그의 여자냐?"
"...하아?"
고압적인 명령조의 말투며 의미를 선뜻 파악할 수 없는 내용에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한숨이 흘러나왔다. 발걸음 소리가 나고, 복도 저 쪽에 있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까워져왔다. 대여섯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어린애였다. 복장이나 태도로 보아 같은 사이어인임에는 틀림없을테지만, 무슨 오만불손한 아이란 말인가.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뭐라고 한 거야, 너?"
다소 날카롭게 튀어나간 말에도 어린애는 고압적인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위 아래로 흝어보는 시선은 철저하게 무강정했다. 물건을 대하듯 바라보던 꼬마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취향이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최악이군."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입닥쳐라, 천한 게."
"...이 게!!"
어린 꼬마는 얼어붙은 것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머리 속에 새빨간 분노가 치달았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앞에 서 있는 어린애를 향해서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미쳐날뛰는 본능대로 몸을 움직였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감각으로 당혹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쉬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덮쳐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자 여전히 무표정한 꼬마는 갓난아기의 팔을 비틀기라도 하는 것처럼 쉽사리 팔을 꺾어버렸다.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는 힘에 저항하려 애쓰며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이것 놔!!!"
"아무리 봐도 멍청한 여자인데."
"...죽여버리겠어!!"
전신을 내달리는 분노와 다르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쏘아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굴욕적이었다. 죽여버리겠어.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 시선에도 상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리듯, 아이가 툭 중얼거렸다.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여전히 굴욕적인 말이었지만 그 씁쓸해보이는 어조에 셸파는 순간적으로 분노를 잊었다. 선물을 빼앗긴 아이의 토라진 목소리. ..아니, 그 것보다는 훨씬 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순간 그를 이해했다.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는 입을 열고 있었다.
".....네가 그 ‘왕자님’이군?"
"..."
아이는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감정없는 어린애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스쳤다. 동요였을까. 어쨌든 팔을 붙잡았던 강한 힘이 조금이나마 느슨해져서 셸파는 잽싸게 몸을 빼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를 상대는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 붙잡힌 자국이 역력한 손목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얼마간 안정을 되찾은 셸파가 굳은 얼굴로 베지터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취향 나쁜 것’이라는 거, 버독이지?"
"..."
어린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모로 돌린 그 얼굴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다 읽어낼 수 있었다. 셸파의 굳은 얼굴이 풀어졌다. 이 왕자님도 그에게 눈을 준 자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일방적으로 압도당해야했던 아까의 상황과는 사뭇 대비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셸파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취향이 이상한 건 왕자님 쪽 아니야?"
"...닥쳐."
나직하게 말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아이의 것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없는 중압감을 갖고 있었다. 그 낮고 무게있는 목소리가 이번에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비꼬는 듯 낭랑하게 말했다.
"안됐네. 내가 아는 버독은 정액받이가 되어줄 성격은 아니거든."
그녀의 목소리에 어린아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런데도 셸파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의 입으로 담아버릴 만큼 어린애에게 두려움을 느낄만큼 자신은 나약하지 않다. ..혹은, 그에게 매혹당한 덜 자란 어린애에게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충고 하나 할까?"
몸을 앞으로 숙여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렇게 속삭였다. 바로 올려다보는 검은 눈에는 아직도 얼마간 경멸이 남아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저 아이가 있는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자신들은 기어다니는 벌레들보다 대단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어린아이가, 우연히 그 중 하나에 보석이 박혀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예외가 생긴 건 아니다.
"죽여 봐. 피를 쏟고 뼈를 잘라내는 살육을 저질러."
"..."
"‘너’로는 그도 너도 채워지지 않아."
버독은 무릎을 굽히는 법을 모르는 사이어인이다. 누구보다도 순수한 야성과 살의를 가진 남자.
그러나 그 순수한 야성조차 이 핏빛 선명한 소년 앞에서는 간단히 숙여질 것이다. 절대자로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순수혈통에게는 버독의 그 날 것 그대로의 야성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승패와 복종은 다른 차원에 있다. 버독은 고삐를 맬 수 있는 짐승이 아니다. 무엇으로 찍어눌러도 버독은 여전히 상대를 따르는 법은 모르겠지. 군림하는 자로서 그를 대해봐야 그는 대적하고, 대적한 채, 죽어버릴 것이다.
하다못해 왕자님.
당신이 빛에 눈 멀어 자신의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 어린애였다면.
본능적으로 알았다. 버독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는 순수한 본능이 살아 숨쉬고 있다면, 왕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림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가 같은 사이어인으로서, 피와 살육 속에 서는 자로서 더없이 야성의 정수같은 버독을 발견했다해도 마찬가지다. 그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저 왕자님은 아마도 영원히 혼자 옥좌에 앉아있겠지. 그리고 버독에게는 그를 납득시킬만한 강함도, 그를 돌보아줄 만큼의 관심도 없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야.
"살인이 주는 격정은 섹스가 주는 충족감이랑 가장 닮아있거든."
손을 피로 물들이고 날뛰는 야수를 풀어놔. 너를 채워주는 충족감을 느껴봐. 그게 그에게 눈을 돌려버린 네게 가능한 해결책이야. 최소한의 해결책.
너는 그를 가질 수 없으니까.
"가르침을 본받아 그 시작을 너로 해도 될까?"
하위 계급을 대하는 말답지 않게 예의를 갖춘 말씨였다. 그 속에서 조용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셸파는 가볍게 웃었다.
"그건 사양하겠어. ..좀 더 재미있는 걸 보고 싶으니까."
"...?"
"슬슬 돌아가야겠으니까 실례할게."
의문을 띄운 소년에게 재대로 된 답변을 돌려주지 않은 채 뒤돌아 섰다. 몸을 씻어내지 못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공격했다면 금방이라도 죽일 수 있었겠지만, 왕자님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서서 침실로 향하며 셸파는 속으로 웃었다. 빨갛게 살을 드러낸 날 것의 웃음이었다.
버독, 버독. 넌 역시 잔혹해.
몸 속의 세포들이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 격정을 억누르며 웃음을 참았다. 절대로 길들일 수 없는 짐승. 내 사랑스러운 친구. 그가 바라보는 앞에는 어떤 타인도 끼어들지 못한다. 힘이나 능력과는 상관없다. 그 순수한 격정. 그는 그 감정을 품은 채 빛나면서도, 결코 그 것을 나누어주지는 않는다.
굴복당하는 것도 굴복시키는 것도 허락하지 않은 네 세계에는 너 하나밖에 살 수 없겠지.
그녀는 짐짓 얇은 옷에 덮힌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남자를 품었던 감촉을 새삼 떠올렸다. 환희. 쾌락. 그가 쏟아부은 욕망에 결과물을 낳아줄 만큼 이 몸이 상냥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몸이 자라고서 바로 자궁을 적출해버린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절차를 밟아왔었다... 문득 나쁜 농담같던 그 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 먼 행성에는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제도가 있다더군. 한 사람하고만 잠자리를 갖는대.
그런게 증표가 된다니 우습지.
응, 정말 우스워. 그런 나약한 사람들의 전통 따위 우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거야. 입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이다. 사이어인들에게 섹스는 그런 증표가 아니다. 해소에 지나지 않는다. 버독도 자신도 그 행위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몸을 잇는 순간에 자신이 아주 조금 그를 나누어 받을 수 있다해도. 자신은 그에게 아무 것도 돌려주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도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적어도 그 자존심 센 어린아이보다 자신은 낫다.
이 몸은 그를 품을 수 있다.
아마 그 것을 절대로 해내지 못할 어린아이로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방법으로.
나는 그런 당신을 조금이나마 훔쳐낼 수 있지만, 그런 법을 배웠지만.
영원히 당신을 갖지 못할 왕자님은 얼마나 괴로워해줄까?
복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가장 고귀한 소년의 눈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맑고, 앞만을 바라봤을 눈이다. ..그 남자가 그 눈에 비치지만 않았더라해도. 셸파는 높고 고귀한 왕자님을 비웃었다. 웃었다. 그 눈에 맺혀있는 절절한 기아감이 자신의 것과 똑같았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버독. 내 사랑하는 친구.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평생 그렇게 하지 못할 거야.
너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그리고.
그리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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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파x버독 & 버독<-베지터 입니다. 실은 여기에 베지x셸파도 추가되는 게 제 안의 친세대(..)
친구에게 "셸파랑 버독이랑 베지터 삼각관계 있을 법하지 않아?"라고 말한 후에 썼던 건데
친구한테 혼났습니다. "내 친세대를 뭘로 만든 거야!"하고.
극장판을 보면서 버독한테 압도당했습니다. 손오공처럼 강한 것도 아니었는데 눈을 빼앗겼어요. 오공이 인간스레 강했다면 버독은 정말 사이어인이구나 싶은 느낌. 실제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그 정신은 순수 사이어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같은 느낌이랄까..
잠깐 나온거지만 셸파는 좋아했어요.
오공 엄마는 이 사람이었을 거야! 라고 했다가 '어차피 인공배양이잖아'소리 듣긴 했지만..o<-<
어쨌거나 주변좀 신경쓰고 살아도 안죽는단다, 손가 부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