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루딤 미세조정 끝났습니다!"
"고마워."
"천만에요!"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투입된 오퍼레이터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유능했다. 이안 바스티 못지 않은 빠른 속도로 기체 점검을 마친 소녀는 계속해서 들여다보며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케루딤을 올려다보는 라일을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밀레이나는 멋쩍은 듯 천진하게 웃었다. 라일은 따라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표정을 지으려고 몇번 애를 쓰다 포기하고 라일은 고개를 푹 숙였다.
"힘들지 않아? 나이도 어린데."
"으음~ 힘들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일 좋아합니다!"
"신기하네."
라일은 무심히 가장 처음 떠올린 생각을 내뱉었다. 밀레이나는 화를 내는 대신에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양 아이처럼 웃었다. 싫은 기색도 없이 붙임성 좋게 재잘거리면서도 밀레이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리듬을 만들 듯이 화면의 수치들을 입력하면서 밀레이나는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톨레미는 계속 가족이었으니까."
"..."
"솔레스탈 비잉에서 파파는 마마를 만났습니다."
너는 우주에서 태어났다고 그레이스 씨도 말했고, 하고 덧붙이고 밀레이나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 밝은 모습에 라일은 침묵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문득 시야의 한켠이 흐려졌다. 타는 듯이 괴롭던 아픔을 잊었다. 멈추지 않는 아픔에 익숙해져버린 걸지도 모르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 곳을 좋아해?"
"물론입니다!"
밝게 웃는 소녀를 보며 라일은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혹은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말했다.
"..두 사람이 너를 남기고 죽더라도?"
밀레이나의 미소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감정으로 가득 차서 생기가 넘쳐흐르던 어린 소녀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라일은 자신이 담은 경솔한 발언에 후회했다. 어린 소녀에게 물어서 좋을 것이 없는 이야기였는데. 눈 앞의 소녀는 아직 아이에 지나지 않는데. ..화풀이 따위,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라일 앞에서 밀레이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러기 위한 CB입니다."
"밀레이나, 나는.."
"파파도 마마도 말했는걸요. 우리들은 그런 거라고. 전쟁터에 서 있는 걸 각오한 상태에서 우리들은 여기에 있다고."
"..."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누군가 없어져도."
약간 슬픈 얼굴이 되어서 밀레이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하고 기울였다.
"스트라토스 씨도 그 걸 알고 이 곳에 오신 거잖아요?"
"..응."
아직 젖은 기가 가시지 않는 소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같은 앳된 목소리에 긍정의 답을 돌려주는 데에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느릿하게 토해낸 대답을 듣자 밀레이나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미리 각오하고 있으면.. 조금 덜 아픕니다."
"..그래."
"저,저는, 아데 씨한테 보고할 게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자기의 말에 당황하기라도 한 것처럼, 밀레이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밀레이나가 가버린 조정실에 혼자 남아 라일은 아직 깜빡이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함내 통신이 가능한 상태에서 굳이 이 자리를 비울 필요가 없었는데도 밀레이나가 나가버린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혼자가 되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일은 팔로 눈을 가렸다.
자책하는 말은 산더미처럼 갖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은 밀레이나의 생기를 거슬려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데도. 흐려지는 시선 너머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것같아 그녀가 없는 것에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작은 소녀까지도 이유없이 미워졌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해버렸다. ..그리고.
어린 소녀는 생각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자신보다는 훨씬.
각오같은 건 무엇하나 되어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이제와서 깨닫는다. 이 곳은 그의 장소고, 그의 것들 중에서 나를 봐줄 사람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만 있었다. 전쟁터에 뛰어들었을 때, 카탈론에서 활동할 때, 각오는 이미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전부 바보같은 발상이었다. 무엇하나 잃을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총을 쥐던 그 순간까지도.
목이 메어 중얼거린 이름은 불분명해서, 자신의 귀에도 닿지 않은 채 흩어졌다.
fin
15. ピストル (권총) / 靴下の秘密
누군가를 쏠 각오도 힘들지만 잃을 각오는 더 힘들겠죠. 본격 라일이가 여성 크루들에게 한방 먹는 연작시리즈. 아니 의도한 건 아니고요..o<-<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에 있어 라일은 각오하기가 참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가져본 적이 별로 없잖아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