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렐루야는 록온이 독서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서로를 터치하지 않는 것이 CB의 규율이었지만 가끔 그의 방을 찾아갔을 때 한쪽 벽에 몇권씩 놓여있는 장서는 싫어도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우주 공간의 특성상 그가 갖고 올 수 있는 개인물품은 굉장히 제한되어있었을 텐데도. 언제인가 왜 단말기에 자료를 넣어서 보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책은 역시 넘기며 봐야 제맛이지-하고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표정과 벽에 꽂혀있는 책이 묘하게 기억에 남아서 가끔 상상해보곤 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서 상체를 일으켜 앉아 심각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록온의 모습을.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와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지고나서였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무슨 일이에요 록-..온."
높게 울리다가 가라앉은 알렐루야의 마지막 목소리에는 가득히 한심함이 묻어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동료의 실루엣을 발견하자마자 조급하게 그를 부른 록온은 어린애같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거실 바닥에 자리잡은 그는 모로 누워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배고 있는 것은 시리즈 물의 속편으로 보이는 검은 표지의 양장본. 갈색 고수 머리가 거실 바닥에 흐트러져있었다. 열서너살의 어린애가 했다면 그럭저럭 귀여워보일지 모르지만 180을 넘어가는 남자가 그러고 있어서야 잘봐줘야 백수, 못하면 철없는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록온 상태는 딱 후자다. 알렐루야는 한숨을 쉬고 부엌에 들릴 틈도 없이 그대로 들고 거실까지 직행한 비닐봉투들을 내려놓았다. 시장과 테러리스트라니 참 안 어울리는 선택지였지만 도심 한복판 주거 포인트에서 대기하면서 굳이 세끼를 우주식으로 때울 필요는 없다고 록온은 강력하게 주장했고, 덤태기는 그나마 요리실력이 좋은 알렐루야가 뒤집어썼다. 애초부터 거들어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알렐루야는 애써 에둘러 록온의 상태를 지적했다.
"어, 음- 누워서 책 보면 눈에 안 좋다구요?"
"괜찮아- 나이든 사람은 시력도 쉽게 안 떨어지거든."
"말도 안돼."
"어 진짜라니까? 왜, 나이든 사람은 암같은 것도 진행이 느리잖아."
"암이랑 시력은 다르잖아요. 록온은 딱히 나이든 것도 아니고."
"우리중에는 제일 연장자인데? 다들 어리잖아. 좋구나~ 10대의 청춘."
"나도 이제 스무살이에요. 성인인데."
티에리아라면 즉각 '그렇다면 어른주제에 방바닥 긁으며 누워있지 마라, 꼴 사납다'라든가 '마이스터주제에 칠칠치 못하다'라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르지만 알렐루야에게는 그런 선택권은 없었다. (하기사 상대가 저 사람이면 그 티에리아도 그런 말까지는 못할 지도 모르지) 차마 눈꼽만큼의 도움도 주지 않는 동료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알렐루야는 어색하게 말하고는 봉투를 뒤적뒤적했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조금 울컥해서 돌아보자 록온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알렐루야, 여기로 와봐."
"배고픈 거 아니었어요?"
"잠깐이면 되니까, 잠깐이면."
목소리는 사뭇 진지한 척 꾸며내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못말릴 사람이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생각을 하고 알렐루야는 드러누운 록온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섰다. 록온은 여전히 즐거워보이는 얼굴로 입모양만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초병의 시선이 허툰 것은 아니어서 알렐루야는 쉽게 입모양을 읽어냈다. ..정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알렐루야는 시키는대로 다소곳히 무릎을 모으고 록온의 옆에 주저앉았다.
"OK- 잘했어."
어린애를 달래는 것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록온은 고개를 들었다. 어어,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록온은 솜씨도 좋게 머리를 괴고 있던 검은 양장본을 빼고서는 알렐루야의 무릎을 냉큼 베어버렸다. 에, 하고 한참이나 지나어샤 얼빠진 소리를 내뱉는 알렐루야를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록온은 짐짓 승리에 찬 V자를 그려보였다.
"이야~ 역시 이쪽이 편하다니까. 책은 너무 딱딱해서."
"록온."
"늙은이를 위해 성인이 된 알렐루야가 희생합니다. 오케이?"
"..티에리아가 있었으면 절대 나이값 못한다고 했을 걸요."
"괜찮아, 괜찮아. 맨바닥보다 알렐루야가 편한 건 티에리아도 동감할 걸."
"..저기, 전 가구는 아닌데요.."
"별로 가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널 편하게 생각할 뿐이지."
책망하는 것같기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것같기도 한 목소리를 가볍게 털어버리며 록온은 가슴 위에 읽고 있던 책을 올려놓았다. 문득 올려다보는 록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가 몹시 기분좋아 보였다. ..어쩐지 눈을 돌리는 것조차도 부끄러워졌다. 알렐루야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록온은 시선을 돌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의 상태를 점검하기라도 하듯 손을 까딱이다가, 록온은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예전에 왜 굳이 책을 고집하냐고 했었지? 단말이며 뭐며 여러가지 있는데도."
"아..네."
"이유는 간단해. 그게 더 편하거든. 지금 이 자세가 편한 것처럼."
뭐라고 대답해야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는 알렐루야를 눈만 굴려서 올려다보고 록온은 피식 웃었다.
"책장에 앉아서 정좌자세로 읽는 것보다 뒹굴거리면서 읽는 게 훨씬 편하고 익숙해. 마찬가지로 정보단말기보다는 먼지쌓이는 종이책이 더 좋아. 아- 뭐 확실히 특이한 취향이긴 하다만."
"어, 나쁜 취향이라고는 생각 안해요."
"그거 고맙네. ...알렐루야, 사람 관계도 비슷한 거 알아?"
갑작스레 말을 돌리는 록온에 알렐루야는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잘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서지 않는 동료를 향해 록온은 다독이듯 천천히 말해주었다. 표정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책읽는 습관이든, 사람사귀는 관계든. 네게 익숙하고 편한 자리를 만들면 되는 거야."
"록온.."
"버릇처럼 생각해. 거기 있는 게 당연하고, 편안해질 때까지 겪어봐. 타인 안에 네 자리를 만들고, 네 안의 다른 사람이 들어갈 자리를 주고. 그럼 훨씬 편해질 걸. 너랑 나만해도-"
거기서 잠깐 말을 끊고 록온은 배고 있던 알렐루야의 다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다분히 장난기어린 태도였다.
"처음에는 가까이 오는 것도 어색해했지? 알렐루야.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같이 있는 게 편하잖아? 아,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펴,편해요!"
록온의 말을 정신놓고 듣고 있던 알렐루야는 거기서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필요이상으로 큰 목소리였긴 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건 단둘뿐이겠다, 록온은 크게 개의치않고 그거 고맙네, 하고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록온은 말을 이었다.
"나한테 한 것처럼 네가 편해질 자리를 다른 사람한테서도 찾아봐. 자리를 찾아. 뒹굴거리고 발을 뻗어도 편하겠다 싶을 만큼 익숙한 곳으로 만들어. 그럼 소중한 사람이 훨씬 많이 생길 걸. 넌 좋은 녀석이니까."
"..록온은 그런 편한 곳이 있나요?"
"물론이지."
웃고 있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이상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은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허락된 것은 거기까지니까. 어쩐지 어렴풋이- 아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대신 무릎 위에 얹혀진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간지러워 알렐루야, 하고 그가 아이같은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숙이고, 살며시 그에게 속삭였다.
"..록온이랑 있으면 편해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참으며 쑥스럽게 웃자 그가 이내 따라서 싱긋 웃었다. 록온이 손을 들었다. 그 손이 숙인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느꼈다. 네가 편한 자리를 만들어, 그리고 거기서 행복해져, 알렐루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이를 걱정하는 부모의 목소리만큼 따뜻하고, 다독이는 손길은 연하의 아이를 상대하듯 다정해서, 행복한 만큼 아쉬웠다.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아요?"
"어-음, 뭐, 그럭저럭. 일단은 아주 지상에 발붙이고 산 건 아니었거든. 우주정거장도 몇번 와봤고."
"아..그러고보니 그렇네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지상에 오래 있다가 오면 무기력해지기 쉽다고 들었거든요."
"뭐어.. 그러는 넌 괜찮아? 장난 아닌 상태였다고 들었는데."
"아시잖아요. 전 몸이 튼튼하게 되어있으니까."
"그걸로 설명이 되냐.. 뭐 조종 잘 하더라, 너."
"그거 칭찬이에요?"
"? 굳이 따지면 칭찬일텐데."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좀 이상한 기분이에요."
"왜?"
"모의전에서는 록온에게 이긴적이 드물었으니까요."
"..저기, 잠깐만."
웃으면서 말하는 상대에게는 추호의 악의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라일은 상대와의 대화에서 미묘하게 엇돌아가고 있는 부분을 감지했다. 그리고 어느 부분이 엇돌고 있는지는 곧 깨달았다. ..또냐. 라일은 반쯤 포기한 기분이 되었다.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오던 상대는 왜그러냐는 듯 쳐다보았다. 약간 수줍어하는 것같은 웃음을 짓고 쳐다보는 상대는 적어도 위험인물은 못될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보여주는 성격으로 판단할 수 없는 모양이다. 결코 작은 신장이 아닌 자신이 올려다봐야할만큼 키도 체격도 큰 청년을 앞에 두고 손을 뻗었다. 푹푹 솟아나는 한숨을 억누르고 라일은 손으로 상대의 눈을 덮어 가렸다.
"록온?"
"..이래도 아직 형님으로 보여?"
"무슨 뜻이에요?"
"네가 말하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닌 것같아서."
다소 악의에 찬 말이었다. 하지만 그 것도 소용 없는지 고개를 조금 갸웃하더니, 마냥 사람좋아보이는 청년은 손을 뻗었다. 한번 망설이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고 그는 눈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라일의 뺨에 두 손을 가져다대었다. 손을 놓고 도망쳐버리고 싶은 심정이 울컥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한 오기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았다. 손가락은 형태를 확인하듯 뺨을 쓸어내렸다.
"당신은 여기 있잖아요."
온화한 말투에는 악의라고는 한점도 없었다. 웃음기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라일은 그만 기가 차서 손을 내렸다. 상황파악이 덜 되었는지 알렐루야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라일을 바라보다가, 그 얼굴이 잔뜩 구겨져있음을 깨닫고 당황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미..미안해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너 말이야.."
"아, 저,저기. 별로 당신이 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라일 디란디씨인 건 알고 있어요."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당신이 록온이니까요."
기어들어가는 어조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그 울려버린 분홍머리의 오퍼레이터 아가씨나 칼같이 선을 긋던 교관님, 백보 양보해서 자신과는 그다지 말을 섞으려하지 않는 세츠나쪽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그들은 망설이기라도 했었다. 잔뜩 구겨진 라일의 얼굴을 보고 알렐루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록온이 말했었거든요. 상대의 안에 익숙한 자리를 만들라고. 편하게 생각하라고. 그래야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고 했어요."
"그거랑 엄한 사람으로 인형놀이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라일은 비야냥거리는 어조를 숨기지 않았다. 알렐루야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시돋힌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당신이 저한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
"아직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편안한 자리'가 없어졌다는 건."
그리고 아마 인정할 수도 없을 것같아요. 속삭이듯이 말하고, 알렐루야는 손을 뻗어 라일의 고수머리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라일은 차마 몸을 뒤로 빼지도 못했다. 알렐루야의 손가락이 닿았다. 유리세공을 만져보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고, 서툴고, 겁많아보이는 손짓이었다. 손은 천천히 록온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뺨, 목, 어깨, 팔, 그리고 손가락. 선을 그리듯이 상대를 확인한 알렐루야는 조심스럽게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알렐루야는 손에 닿는 감각이 변함없다는 것에 간신히 안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여기 있어서 다행이에요."
천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알렐루야는 나직하게 한마디를 더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당신이 그가 남겨준 사람이니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야단맞는 아이처럼 풀이 죽었고, 내리깐 눈동자는 처연해보였다. 잡지도 놓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닿아있는 그의 손이 지독히도 무겁게 느껴져, 라일은 입술을 짓씹었다.
fin.
09. 遺書 (유서) / 遺書
알아도 외면하는 것에 익숙한 건 알렐루야. 록온이 바란 건 홀로서기. 혹은 알렐루야의 세계가 더 넓어지는 것. 근데 애들은 잘 가르쳐놔도 부모 눈이 떨어지면 삐뚤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건 록온.
+추가.
록온은 알렐루야가 행복해질 장소를 찾길 바랬습니다. 본인이 되어줄 생각은 없고요.
Posted by 네츠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