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씨엘 완결
* 스포일러 있습니다.
1. 하늘은 이어져있고 용서할 수 없어도 사랑했던 커플은 오랜 후의 재회를 기약했습니다. 수억의 낮과 수억의 밤을 지나서. 그래도 엔딩에서 뱃속이 뜨듯해지길래 왜 이렇게 희망적으로 해석하고 앉았나했더니 적어도 완전한 이별이 아니어서 저에게는 차라리 해피엔딩에 가까웠던 것같습니다. 천억의 밤을 넘어 내 영혼이 소멸하는 그 날에 내 사랑이 영원이었다고 증명하고 스러지겠다던 엔딩에 비하면 행복하잖아요(...) 언젠가, 언젠가. '다시'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게.
2. 이비엔에 대한 이야기는 본편 중에 남김없이 풀린 것이 흡사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생각났습니다. 이야기의 시작, 결말, 흐름, 그녀와 얽힌 사람들,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 그녀가 살아가는 세계. 지키는 세계. 그래서 이비엔에 대한 건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아플지언정 후회는 없었는데 스쳐가듯 향기만 남기고 총총..으로 넘어간 사람들의 이야기에 목이 말라서 울 것같았습니다. 8년간 사랑했고 23권간 모아왔던 세계가 이렇게 닫히는 게 아쉬운가봐요. 셜리가 지룡 발끝으로 굴리는 이야기, 겨울이 지난 후의 이클리체 커플, 어느 온화한 날의 도터와 제뉴어리, 제뉴어리와 유지니아의 티파티와 도터의 애보기 한숨, 크로히텐에게 그랬듯 도터에게 위로가 되어줄 자손들, 옥타비아와 테나이얼의 길고 오랜 회환을 풀기까지의 이야기, 크로히텐과 메노라, 카를라와 크로히텐, 에버릿 가의 어느 날, 어린 크로히텐과 어느 쉬는 날 여신의 하루-세상 다시 없이 환상적인-, 긴 겨울 이야기, 그리고 또...... 보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 설정집 팬북 공략본 뭐든 좋으니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ㅠㅠㅠㅠ
3. 반짝반짝 흐르는 물처럼 고운데 마음이 참 많이 아파요. 사락사락거리기도 하고. 처음 시엘을 집어든 건 중학교 3학년때인가 할 무렵이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소중하게 이야기를 지켜봐왔습니다. 책장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소중했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만화 취향이 바뀌었구나~하고 느낄 때가 있지만 저한테 씨엘은 유리반지고 제인 에어이며 라일락 피는 집입니다. 내 소녀심의 향수같은 거요. 으아아아아 팬북 보고싶어..ㅠㅠ 애들 눈동자색이랑 머리카락 색이라도 지정해주세요..! 이비엔이랑 제뉴어리는 들었지만서도..!
4. 크로히텐을 둘로 나누어서 앞조각은 카를라에게, 뒷조각은 이비엔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산 자는 강하고 살아남아 이어지는 것은 강합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아무리 소중했던 것이라도 다가올 미래에는 이기지 못하고 과거가 된다는 것. 전 그게 참 싫어서.. 아니 슬퍼서 많이 머뭇거리는 사람이라, 그 부분이 참 아팠어요. 거기 나타난게 실제의 카를라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어요. 변하고 무너지고 흐려지고 퇴색되고. 그 점에 있어서 이비엔은 처음부터 변할 것도 무너질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영원에 가까울 나날들도 과거를 품은 채 기다릴 수 있을 거고, 그래서 영원이 끝나는 날, 결말이 지어지는, 완성되는 그 날에서야 만날 거라고. 장생커플이 좋구나 하고 씁쓸히 웃었던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5. 도터한테는 해줄 말이 없어요. 그냥 그 겁나 착한 애가 앞으로 크로히텐이 알레그로에게, 그 후손들에게 위로받은 것처럼 도터도 생이 끝나는 날까지 그랬으면 하는 것정도. 불사를 받지 않으니 사람보다 얼마나 길게 살려나요. 천국은 있고 저승은 있는 걸까.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다시 만나면 그 때는 변하지 않은 상태일까.
6. 생각하면 서러워지는 부분이라서 으쌰으쌰 접어두고 다른 이야기. 긴 겨울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데 초원의 집 시리즈의 '긴 겨울'이 생각났어요. 마침 딱 전 날에 비룡소 완역본 초원의 집 시리즈를 싸그리 독파한 이후라서. 그보다 훨씬 가혹하고 광대하고 지옥같은 그런 시기일테니까(몇 달만에 돌아갔다는 걸 보면 의외로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같지만) 그 시기의 추악함이나 괴로움이나 재난에 대해서 이야기 빈틈을 꼬깃꼬깃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엔딩이 희망차고 예뻐서 그럴 수는 없겠구나 싶어 막연히 상상으로 그쳤습니다. 줄어드는 테고리, 좁아지는 반경, 떨어지는 식료품. 그래도 그렇게 암담했을 것같지 않아요. 인피니티가 펼쳐지던 그 날밤처럼 혼란과 죽음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보는 그런 시기였을 것같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왕이 그런 사람이잖아요.
7. 음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더라...... 여튼 즐겁고 슬프고 아름답고 곱고.. 그랬어요. 사실 지금 눈이 많이 안 좋아져서(라섹 수술 이후에도 강철같이 책 읽고 컴퓨터 하고 할 거 다하고 있음) 마지막은 꼼꼼히 못 일었어요. 내일 눈 좀 나아지면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8 마그놀리아가 다시 피어나는 계절이 오면, 보석처럼 고귀하고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세계로 삼아서. 하늘을 건너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9.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건데 라이트스피어 무슨 뜻일까요. 마이크로소프트야 홈즈 형님이라고 쳐도 제뉴어리 성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것같은데. 빛의 창? 라리가 왕의 보석(킹 다이아몬드)고 이비엔이 마그놀리아(겨울 이후 피어나는 목련)인 시점에서 뭔가 있을 것같단 말이에요, 궁금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