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보고 187 - [과거에 안녕을 고하고]
1. 방학 아닌 방학입니다. 졸업 요건 다 채우고 딱 한 과목만 안들은 상태라 널널하게 있었는데 너 이대로 가다간 졸업이라고 문자가 와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마음같아서는 느긋하게 있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모양입니다. 따로 확인하고 전화 주신다고 했고 저는 졸업유예가 되는 게 맞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떨지.. 내일 학교 교직과에 전화를 다시 걸어봐야하나봐요.
2. 그것과 별개로 대학교 일학년 때즈음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입니다. 미친듯이 듣고 있는 성우라든가, 방학의 여유로움이라든가. 항상 학기 동안은 미친듯이 최선을 다하고 방학이 되면 잠수를 탔습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컴퓨터를 하거나 인터넷 기사를 읽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도 사회 생활도 없이 모든 연락을 끊고 그렇게 몇개월씩 놀다보면 학기가 시작할 때즈음은 '하고싶다!'로 꽉 차서 몸이 근질근질하게 됩니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하면 또다시 공부도 하고 열정도 쏟고. 이번 1학기에는 그 공부가 적었지만 실습이 있어서 쉬는 게 굉장히 반가웠는데.. 한 2주쯤 되니까 벌써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네요. 어른이 된다는 건 적은 휴식으로도 빨리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되고, 매일매일 일하거나 하는 것을 보다 일상으로 느끼게 되는 그런 걸까요.
3. 대학교 4학년 때까지 '뭐든지 될 수 있을 것같은 자신'인 채로 열심히 열심히 하고 싶은 것들만 했더니, 졸업시기가 다가오자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내 쪽에서 걸음을 먼저 내딛으려고 하지 않는 자신이 보여서 당황하고 있습니다. 젝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저는 일본어를 잘하고, 글을 쓰거나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잘하고, 사람에게 있어 순진할 정도로 착합니다. 그런 걸 살릴 수 있는 직업은 뭐가 있을까요. 6개월동안 천천히 찾아보려고 했는데.
4. 착하거나 그런 건 뭐랄까.. 딱히 성품이 착하지 않아도 착해질 수 있는 것같습니다. (아니, 저는 제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니까!) 착해질 수 있는 조건은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것, 그리고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할 수 있을 것, 이 두 가지인 것같습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미덕은 아닌 것같지만 그 미덕을 가지고 살아오신 제 부모님은 항상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예쁘시단 말이에요. 서로 껴안고 사랑한다고 앵기고 부대낄 수만 있으면 세상에 바랄 것이 없을 것같은데.
5. 요기까지 쓰고서 엄마랑 씽나게 양파를 까다왔습니다. 개똥철학 이야기좀 하려고 했더니 엄마한테 애교부리다가 까묵까묵했네요.
6. 덕질 이야기를 잠깐.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레포트랄까 인터뷰를 읽고나서,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울었다는 아상의 답변에 드물게 놀랐고 또 많이 슬퍼졌습니다.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행복과, 그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곁에 없는 슬픔도 알았습니다. 타쿠미처럼 되고 싶지만, 머네요, 타쿠미.' 드라마시디에서 타쿠미의 모자란 모습은 굉장히 많이 빠져있어요. "처음으로 돌아가 사랑을 했습니다." 아상의 타쿠미가 농부르 선생님 앞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 어, 이렇게 멋있을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모노를 잊어버리고 여섯살짜리 아들에게 의지해야하는 부족한 모습이나, 지저분한 카레자국이 남은 옷. 아니 그런 건 대본에도 표시되어있지만, 뭐랄까.. 그 서툴고 모자란 느낌이 아니라 지병으로 인해 망가졌다는 인상이라고 해야할까요. 미오에게 과거의 두 사람을 이야기해주는 부분이 활자가 아니라 목소리가 되었더니 별안간 너무 멋있어져서 어쩔 줄 모르게 된 그런 느김이었어요. 너는 말하고 있었어. 나를 좋아해주세요. 나는 천성이 단순한 사람이라 금방 그 메세지를 받아들였지. 네, 당신을 좋아하게 되겠습니다. 그런 부분이 멋있어지고 아름다워졌더니, 안그래도 장난감 별처럼 깜빡거리던 예쁜 이야기는 별안간 눈부신 것이 되어있었습니다.
7.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한발 떨어져있었던 학창시절.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사람이 많은 곳에 갈 수 없는 것. 이렇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비슷한 부분이 많은 역할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사람을 외곩수로 사랑하는 순수한 면같은 걸 보면서 동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하고는 머네요, 타쿠미.'라는 그 말 한마디가 뭔가.. 음. 제 과잉반응일거라고도 생각하지만, 연기 이후의 에피소드(단간론파 라디오에서 말한) 그런 거라든가, 있잖아요.
8. 사람은 이야기나 연극이랑은 달라서 한 면만 있지도 않고 이야기가 완결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라면, 연극 속에서라면, 만들어진 작품 안에서라면 언제든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출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선량한 사람도 물건을 훔칠 수 있고, 남에게 헌신적인 사람도 지칠 수 있어요. 무엇도 영원하지도 한 모습이지도 않습니다. 힘껏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들에게 '좋은 사람'인 채 한 달을 보내고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단기적인 그 순간에는 항상 가장 좋은 사람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고 웃을 수 있어요. 그래도 그 순간이 지나고나면 지쳐버립니다.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게 아니라, 지치는 거에요. 그런 만큼 만들어진 이야기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을 동경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는, 그 순간에서는 진짜잖아요. 굉장히 외로운 사고방식이기도 하지만. 요컨대 불완전한 현실을 인정하기에는 완전한 환상이 너무 예뻐요. 그만큼 슬퍼집니다. 현실의 연애든 뭐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완벽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면 이런 생각을 안하게 될까요. 이런 소리 하면서도 만나서 행복한 관계도 즐거운 순간도 많습니다. 그래도, 뭔가. 음.
9. 지금 만나러갑니다 이치카와 타쿠지의 다른 책인 '온 세상이 비라면'도 읽었어요. 열화판 오츠 이치같은 느낌. 죽음이나 시체를 꺼내들고도 소년같이 서툴고 은은한 느낌이 나는 건 싫어하지 않지만, 장난감 별같았던 아카이브 별과 붓꽃이 젖어드는 비 속의 사랑을 이야기했던 작가에게서 바란 문장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책도 한권 남아있지만.. 약간 느꼈던 이미지와 달라서 아쉬웠어요.
10. 나아갈 세상은 눈 앞에 있습니다. 준비를 해야겠지요. 느긋하게 서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걸어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