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보고 186 - [오보에, 와스레, 나가레]
1. 이 곳에는 일년 하고도 6개월을 보낸 뒤에쓰는 일기입니다. 다른 곳에 여기저기 감상도 있고 하지만.. 음 지난 2012년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2013년은 교생실습이랑 해외여행이랑 이것저것하면서 아직 제법 느긋하게 살고 있습니다. 교정도 했고 라섹도 했어요. 라섹은 아직 낫는 중이라서 눈을 너무 피로하게 만들면 안되는데, 그런 거 없고 평소처럼 죽어라 컴퓨터를 하고 있어서 시력은 좀 걱정입니다. 요 근래에 한 거라면 에바Q를 봤던 것을 계기로 에바에 다시 빠진 것. 음 다시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리얼타임 세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음 이시다 아키라의 연기에 다시 빠진 건 다시 빠졌다고 해도 좋을 것같습니다.
2. 아상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알았던 "성우"입니다. 성우에 빠지게 된건 중3 여름이었지만 초등학교 5학년때쯤이었을까요. 최유기를 한참 좋아했었고 인터넷에서 찾은 최유기 홈페이지에 이시다 아키라를 응원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팔계 성우구나, 성우도 있구나~했던 게 최초의 기억입니다. 그 탓인지 모르겠지만 전 아상의 연기를 정말정말 좋아해요. 게임에서 특히. 호흡 하나까지도 자연스럽게 어색하지 않은 연기가 좋습니다. 사람으로서 알고 싶어하게 된 거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극히 최근이지만 그 것과 별개로 이 분의 연기가 정말 좋아요. 상자같은 데에 가만히 넣어두고 듣고 싶어집니다. 다만 워낙 주는 일 안 가리고 다 연기하시다보니 폭이 엄청나게 넓어서...orz 좋아하는 건 신나게 들을 수 있는데 다 들으려면 죽어나는 그런 느낌도 있어요. BL분야에서 좋은 작품을 하나만 남기고 가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 좋은 아상 보이스를 데려다 한 연기는 다 쇼타, 소년, 소년, 앙앙이란 말입니까...
3. 아상 보이스에서 가장 좋은 건 20대쯤의 톤인 것같아요. 요즘은 30대도 괜찮고. 과하게 올려서 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톤이 제일 좋습니다. 이건 아마 후시기공방 영향. (제 인생의 거의 첫 번역 시디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다시 들어도 단어가 어려운 게 많아서 잘도 이런 걸 번역하겠다고 덤볐구나; 싶기도 해요) 담담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이따금 감정이 채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나올 때의 격해지는 그 한순간의 호흡. 그게 정말 물처럼 자연스러워서 듣고 있으면 한없이 가라앉아 함께 휘말려갑니다. 햇볕이 좋은 깊은 산속에서 해를 받아 데워진 시냇물이 조용하게 흐르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자연스러운 느낌. 와, 뭐 이렇게 묘사를 과하게 하는 걸까요.
4. 저는 기본적으로 미성계, 그 중에서도 청음 계열의 맑은 톤을 좋아합니다. 카밍이라던가 호시라든가(호시상은 탁음 연기와 청음 연기를 보기 좋게 나눠서 쓰는 분이지요) 아상은 정말정말 청음계열. 탁해질 수가 없는 톤이라 낮춰서 내도 목 안쪽에서 내도 목소리가 맑아요. 은혼의 즈라 연기같은 건 한껏 낮추어서 뽑은 톤이고-하루카의 선생님이 더 하겠지만 그 연기는 잘 들은 적이 없어서요- 실제로 낮은 톤이지만 탁음의 목소리는 안나옵니다. 세키 토시히코상도 맑고 반드르르한 톤이고 그걸 나누어서 연기하시는 분이지만 최유기 삼장은 낮춰서 뽑고 톤도 바뀌었는데 재밌죠. ..나만 재밌나. 여하튼 청음에 특화되어있는 목소리인데 그 계열 내에서 톤 구분을 어떻게 하냐면, 연기력으로 백퍼센트 커버합니다. 억양이랑 말투, 감정, 인물에 따라서는 호흡도 바뀌어요. 이시다아키라가 아니고서야, 라는 단서가 붙을만한 캐릭터들- 저팔계라든지 제로스라든지 신공표라든지, 하는 우상쿠사이한 캐릭터들로 이어지는 이시다 아키라의 계보는 물론이고 오만가지 캐릭터를 다 연기하는 건 저 연기력 탓이 크가도 생각합니다. 아, 쓰다보니 배가 다 부르네요. 여튼 좋아하는 분이에요오..
5. 내일은 에바 온리전. 예약도 무엇도 하지 않고 갈 예정이지만 폭우주의보가 내렸으니까 경쟁자좀 떨어지지 않을까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못 사면 못 사는대로 괜찮아요. 꽃단장하고 카오루와 신지군을 만나러가는 기분으로 가려합니다. 그 마음을 담아서 EOE를 재생. 이건 정말 면도날로 내장을 그어대는 것같은 영화에요. 남성답게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축하는데, 안에 담아놓은 섬세하다못해 신경질적인 내면의 이미지는 여성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가느다란 신경을 유리로 베는 것같아요. 현실의 장면을 담은 건 엿먹어봐라 씹쌔들아ㅡㅡ 하는 비뚤어짐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거부, 소통, 불안, 성장, 죽음, 상처, 교류, 사랑, 고통, 외면, 오해. 어린아이가 눈을 감고 칼을 휘두르면서 오지마, 하지만 곁에 있어줘, 다 미워, 하지만 외로워, 하고 소리지르고 있는 것같은 영화입니다. 날것인 감정을 그대로 토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치기어림도, 부족함도, 모자람도, 모순도. 다 더해서 그 이야기를 사랑해요.
6. 하지만 아이들은 정말 재멋대로에요. 타인을 생각하는 법을 모릅니다. 나의 고통이, 나의 것들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마주보지 못해요. 배려하지 못해요. 그 점에서 혈연과 자식이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인생을 떠맡들어주고 나를 베어가면서 키워주는 거잖아요. 아직 어른이 덜 되어서 그런가. 한 순간 최선을 다해서 누군가를 배려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걸 일생동안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가, 사랑스러운데도 다 해줄 수 없는거구나, 하는 마음이 듣니다. 그런 걸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도 어린애 맞나봐요.
7. 조금 질릴만큼 아상을 먹었지만 (찾아놓은 드라마시디가 몽땅!! 이시다 아키라 출연작이므로) 조금 더 먹으면서 이번 주를 보낼 생각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느긋한 일주일이에요. 배경음악은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