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당신을 갈구하는 나에게
녀석이 사랑니를 뽑았다. 한쪽 볼이 퉁퉁 부어 나타나서는, 씩 웃으며 거즈에 싸인 것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뽑아온 치아였다. 기겁을 하며 치우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들리지도 않는 것같았다. 녀석은 아이처럼 헤실거리며 제 입에서 나온 치아를 자랑했다. 초등학생도 이러진 않겠다. 방싯거리면서 기계가 어땠다는 둥, 마취가 덜 풀린 뺨이 아직도 얼얼하다는 둥 이야기를 늘어놓던 녀석은 어찌나 팔팔한지 치과에서 나온 환자라기보다는 놀이공원에서 튀어나온 어린애처럼 보였다. 기가막혀서 가만히 듣고 있어주었더니 그게 감탄하는 얼굴로 보이기라도 했는지 한층 기세등등해져서 약봉지며 식염수까지 줄줄히 늘어놓았다. 어이가 없어서.
신데렐라는 열 두시가 되면 마력을 잃고 초라한 소녀로 돌아갔다지. 녀석에게 그런 과분한 묘사는 어울리진 않고, 뭍으로 튀어나온 물고기가 축늘어지는 것마냥 변했다고 하면 되겠다. 그 팔팔한 '기세등등'은 고작 한시간 후에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마취가 풀려가네, 하고 지나가는 듯 말한지 딱 5분 후였다. 녀석은 볼을 감싸쥐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 진통제는? 먹었어? - 아니. 먹어야 되는 거야? - ..죽기 싫으면 먹어라.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 그렇게 말해주자 녀석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칭얼거리는 것을 달래가며 빨대를 물려서 오렌지 주스를 먹이고, 그래도 아프다며 우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고, 입도 못 벌리겠다며 앓는 소리를 내길래 바나나며 뭐며 부드러운 음식을 잔뜩 꺼내놓았다. 녀석은 고개만 절레절레 젓더니 안방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끙끙 우는 게 퍽 안되보여서 불을 켜고 들어가려고 했더니, 잘 들리지도 않는 발음으로 켜지 말라고 잔뜩 울먹거렸다. 상처입은 짐승도 아니고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회복하겠다니 게임을 너무 많이 한 거 아니냐 너. 목까지 차오르는 핀잔을 꾹 누르고 이불 위로 도드라진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 가만히 방에서 나왔다.
보자, 죽은 끓여놨고. 방은 치워놨고, 저 꼴이면 한숨 재우는 게 낫겠지. 거실 탁자에 앉아 한숨 돌리자. 의자에 앉아서 신문이라도 꺼내보려는데, 탁자 위에는 아까 잔뜩 자랑하며 꺼내놓았던 치아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원래가 펼쳐놓으면 치우지 않는 녀석이다. 거즈째로 덩그마니 놓인 그 것에 손을 뻗었다. 기겁하느라 재대로 보지 못했었던 게 생각이 나서 호기심 반 장난 반의 기분으로 거즈를 펼치고 바라보았다.
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징그럽다.
뿌리까지 뽑아내서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긴 몸통을 주욱 뻗고 누워있는 치아는 새끼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크기였다. 미묘하게 갈라진 뿌리 끝에 분홍색 살점이 길게 매달려있었다. 이런걸 신경이라고 하던가. 핏자국이 동그랗게 찍혀있는 거즈와, 그 위의 살점이 매달린 치아를 보다가 살짝 몸서리를 쳤다. 번쩍번쩍 빛나는 기계가 꽉 찬 의자 위에 앉아서 입을 벌리고 살점이 딸린 치아를 뽑아낸다는 거지. 메스같은 걸로 째고? 무시무시한 펜치가 쩍 벌린 입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다가 무서워져서 말았다.
거즈에서 치아를 주워서 눈 앞까지 들어올렸다. 옅은 피냄새가 났고, 매끌매끌한 옆면은 단단했고, 살짝 울퉁불퉁한 표면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핏자국과 살점이 아니었으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갓 만들어낸 모형같았을 것이다. 거즈에 충분히 닦여나가서 피냄새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부엌으로 가서 치아를 씻어냈다. 손으로 문지르는 동안 매끌거리는 표면이 손사락 사이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손톱으로 가볍게 긁자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소파로 와서 깊게 몸을 파묻고 치아를 관찰했다. 다 떨어져나가지 않은 조직이 조개의 관자가 남은 것처럼 묘한 꼴로 매달려있었지만 거의 보이지 않아서 신경쓰지 않았다. 두 손가락으로 집어올리자 뾰족한 뿌리가 살을 지긋이 눌렀다. 그렇게 아플 정도로 예리하지는 않았지만. 표면에 나온 게 절반이라면 뿌리도 절반정도일까. 쇼파의 모서리에 대고 툭툭 두들겨보자 광택처리된 원목에 부딪힌 그 것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장난감같은 소리를 냈다. 손안에서 가만히 굴려보았다.
녀석의 사랑니는 매몰된 채로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었다. 잇몸 속에 파묻혀서 녀석의 입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 혀로 찌르고 건드리고 쓸었던 그 잇몸 속에.
아, 그러면 나는 지금 녀석의 내부를 만지고 있는 걸까.
황당한 생각에 스스로도 웃음이 나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치아의 표면을 혀끝으로 날름 핥아올렸다. 손 안에서 구르는 동안 메마른 치아의 표면은, 내 입속을 채우고 있는 치아와는 사뭇다르게, 차갑고 부드러운 돌같은 느낌이 났다. 문득 입안에 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녀석에게서 떨어져나온 일부를 내 안으로. 닿지않았을 뿌리까지 깊게 흝고, 핥아볼 수 있도록.
- ---, 밖에 있어..?
다 죽어가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케이서? 수준의 웅얼거리는 발음이었지만 아까보다는 나은 것같았다. 약기운이 드디어 돌기 시작했을까. 지금 가- 그렇게 말해주자, 방안에서 눈물 가득한 울음소리가 낮고 길게 울려퍼렸다. 너는 강아지냐, 낑낑거리기는. ...원래가 약한 녀석이니까, 한동안은 계속 옆에서 시중을 들어줘야지. 차가워진 치아를 소파 손잡이에 올려놓은 채 나는 녀석이 누운 방으로 걸어갔다. 울고 칭얼거리고 소리내어 내 이름을 부를 사랑스러운 연인의 곁으로.
일주일이 지나 겨우 녀석이 다시 딥 키스를 하게 허락해주었다. 입 안쪽, 사랑니를 뽑은 잇몸은 붓기가 가라앉고서도 벌어진 구멍이 남아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 부위를 혀끝으로 쓸며, 나는 장난치는 어린아이처럼 씩 웃었다.
fin.
동인녀가 사랑니 뽑고와서 탐미주의 문학과 포우에 대해 망상하다보니 이런 게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