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오/연성
[더블오][SS] 속삭이는 목소리
네츠케
2009. 4. 7. 23:14
"라일, 라일."
"어, 아뉴. 무슨 일이야?"
바쁜 걸음으로 다가와 경쾌하게 말을 붙이는 아뉴는 조금 흥분한 듯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라일은 아뉴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톨레미의 새로운 승무원 아뉴 리터너와 라일 디란디가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뉴가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라일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뉴는 빙긋 웃은 채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라일. 감추고 있던 게 있었어요."
"..에?"
밝은 그녀의 목소리에, 라일이 제일 처음 떠올린 것은 간혹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정신을 잃은 듯 먼 곳을 바라보는 생기없는 시선.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와, 무서운 표정."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무슨 일인데?"
"라일은 감추는 게 서투네요.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
"하아.."
"음음, 비밀 이야기 해줄게요."
그런 라일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본 아뉴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놀렸다. 황급히 표정을 바꾼 보람도 없이, 아뉴는 느긋한 목소리로 라일에게 농처럼 말을 걸었다. 놀림받았다는 당혹감보다도 엉뚱한 아뉴의 행동에 의미도 없이 한숨이 나와, 라일은 얼떨결에 웃어버렸다. 아뉴는 그 표정을 즐겁다는 듯 쳐다보았다.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그녀는 굉장한 것을 말하는 양 속삭였다.
"저, 실은 엄청 머리가 좋아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어린아이같았다.
" ...그게 비밀?"
" 어머나, 안 놀라는 거에요?"
라일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잠깐 지체했다. 순식간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하는 라일에게, 아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천진해보이는 얼굴에 한숨도 나지 않아 라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첫만남에서의 대화를 다시 입에 담았다.
"그야 첫만남에서 다 들었는데. 우주물리학, 모빌슈트공학, 재생치료의학. 거기에.."
"조선기술이랑 요리까지요."
"응, 요리. 언제 한번 먹어보고 싶은 걸."
"후후, 맡겨둬요. 지상에 가면 만들어줄게요."
" ..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 음, 그런 건 아니에요. 하고 싶었던 말은.. 음, 그거에요."
어깨를 조금 움츠리고, 그녀는 장난치듯 등짐진 손을 깍지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거."
"..하아?"
"아는 게 많으니까 그만큼 상대도 비슷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버리거든요.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버리니까 쉽게 다가서게 되는 일도 별로 없고. 나, 지금까지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요."
재잘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들떠있었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야기는 그녀답다면 너무도 그녀다운 이야기였다. 평소에 비해 훨씬 아이같아보이는 얼굴이지만 라일은 아뉴 리터너가 책무를 다 할 때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타인이 들어갈 만한 빈틈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 사생활에서도 비슷하겠지. 새삼 그녀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들이 자기에게만 한정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아, 라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 나도 해당이야?"
""아뇨, 라일은 예외."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아뉴는 소녀같은 얼굴로 뺨을 붉혔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아뉴는 두 손으로 뺨을 덮었다.
"이상하죠? 당신은 처음봤을 때부터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렇다기보다는, 첫눈에 반한 걸까."
"엣?"
"어머, 수줍어하는 거에요? 잘 들어줘요.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못 들을 귀중한 말이니까."
어린 소녀처럼 들뜬 태도를 하고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애정이 담긴 눈길이었다. 아뉴는 손을 뻗어 라일의 손을 잡았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미소지은 얼굴로 그녀는 발돋음했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아뉴는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당신이 좋아요. 처음봤을 때부터. 한눈에 반했어요."
"..."
"내 연인이 되어줘요, 라일."
다정한 눈동자와 부드러운 고백에 문득 숨이 막힐 것같아 라일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쑥스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긴장한 듯 속눈썹을 떨고 있었지만 아뉴는 여전히 화사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만난지 2개월. 새삼스럽다면 새삼스러운 고백이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는 무언가, 달콤한 것이 피어올라 채워지는 것같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던 라일은 팔을 들어 아뉴를 끌어안았다. 반쯤 목이 메어, 우는 듯 웃는 목소리로 라일은 겨우 말했다.
"..고백은 내가 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라일에게 안겨, 아뉴는 꽃처럼 웃었다.
라일 디란디는 팔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어둠 속에서 짓눌릴 것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죽음을 봐왔다. 그런 것들은 자신과 상관없으리라 믿고 있었던 어리석은 아이 때부터, 많은 죽음을 봐왔다. 하지만 한번도 잃어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버려두고 도망칠 수 있었다. 외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목 안쪽이 타는 듯이 아팠다.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환상처럼, 머리 속에서는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어린애같은 짓이었다는 거, 알고 있죠?
그런 말 하지 말아줘. 아뉴. 나는.
- 세츠나 씨에게는 잘못이 없었잖아요. 연하를 상대로 그런 짓, 어른스럽지 못했죠?
하지만, 나는.
- ..알고 있어요. 그래도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자기를 다치게하는 일도 하지 말고.
아뉴, 나는. 네가 없으면..
- 미안해요 라일. 외톨이로 만들어버려서. 그래도 있죠, 나.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서질 듯 투명했다. 그 목소리에 새삼 공허를 깨달았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기억 속에 남은 아뉴 리터너는 또다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때 잃어버렸던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고요한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안온하게, 다정하게 귓가에 울렸다.
- 나, 당신과 만나서 행복했어요. 정말로.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한 그 목소리가 살이 에이는 것처럼 아팠다. 라일은 입을 막았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오열이 새어나왔다. 밤은 어두웠고, 자신은 혼자 남아있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그 날처럼. 그저 상냥한 그녀의 목소리만이 언제까지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정말로, 행복했어요.
fin.
'아뉴가 열을 올리는 쪽이었다'라는 말을 듣고서 한번쯤 적어보고 싶었던 라일아뉴. 전개나 연출의 개연성이야 어찌됐건 참 예쁜 커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기억 속에서 웃는 아뉴의 얼굴이 정말 예뻤어요.
+ 리바이브랑 세트. 떠나간 여자와 남겨진 두 남자, 만쉐이.